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9 '아스팔트 위의 이단자' 牛馬車… 경찰·황소, 1㎞ 추격전 벌이기도

浮萍草 2015. 9. 9. 00:00
    ▲  1963년 4월 서울 거리의 소달구지. 연탄, 쌀 등 생필품을 싣고 트럭이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길까지 날랐다.
    울 최고 기온이 38.9도까지 올랐던 1929년 8월 5일.시내 한복판에서 석재(石材)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던 말 한 마리가 쓰러져 폐사하더니 몇 시간 뒤엔 황소 한 마리도 큰길에 갑자기 주저앉아 죽었다. 너무 더워 일사병으로 숨진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노상(路上) 우마(牛馬)가 폐사(斃死)!'라는 제목 아래 2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짐차 끄는 짐승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기사에 묻어 있다(조선일보 1929년 8월 7일자). 수백년 우마차 역사에서, 마지막 50여년은 우마차들에게 어려운 시절이 됐다. 아스팔트 위의 자동차들 틈바구니에서 더 힘들고 위험하게 길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느려터진 수레가 길을 막자 자동차들도 짜증이 났다. 우마차란 '아스팔트 위의 이단자' 같았다. 1967년엔 서울 충무로에 세워둔 우마차의 소가 자동차 클랙슨 소리에 놀라 1㎞를 날뛰며 경찰 사이드카와 추격전을 벌이는 바람에 도심 교통이 마비되는 사건도 있었다. 광복 후 1960년대 말까지도 우마차는 중요한 수송 수단이었다. 1947년 5월 서울의 우마차는 3129대나 됐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합쳐 3840대였으니 우마차가 자동차보다 훨씬 많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56년 3월 경무대(청와대의 전신) 앞에서 벌어진 이승만 지지 시위 땐 우마차가 800여대나 몰려왔다. '우의(牛意) 마의(馬意)까지 동원했다'는 비판이 이때 나왔다. 우마차의 도심 통행을 막으려는 정책들이 1950~1960년대 시도됐지만 "어떻게 먹고살란 말이냐"는 우마차 주인들 반발에 밀려 규제가 완화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1967년 서울시장 김현옥은 강도 높은 카드를 뽑아들었다. "도시 미관에 좋지 않고 자동차 소통에 지장을 준다"며 1968년 1월부터 4대문 안의 우마차 통행을 금지하겠다고 밝혔다(1967년 10월 6일자). '불도저 시장'이 밀어붙인 결과인지 1968년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우마차는 점점 보기 어렵게 됐다. 오늘날 짐승이 끄는 탈것이라면 관광객용 마차 정도다. 그마저도 '말에게 아스팔트를 달리게 하는 건 학대'라는 동물보호단체들 비판에 점점 줄어든다. 청계천 꽃마차가 그렇게 중단됐고,작년 말 미국 뉴욕 시장은 센트럴 파크의 관광용 마차를 없애는 법안을 발의했다. 뜻밖에도 1924년 9월 이미 이 땅에'동물 학대 방지 협회'가 조직돼,수레 끄는 소·말 등에게 먹을 물 등을 주며 보살펴 주자는 운동이 시작됐었다 (1924년 9월 21일자). 근대 초기부터 싹튼 '아스팔트에서 일하는 동물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제 열매를 맺고 있는 듯하다.
    Premium Chosun ☜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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