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7 물지게 지기, '여자들의 일' 취급… "남편들은 밤에 도와 줘라" 충고

浮萍草 2015. 9. 7. 00:00
    ▲  1963년 2월 서울 서대문구의 공동 수돗가에 물지게를 들고 와 장사진을 친 수백 명 주민들. 거의 모두 여성들이다.
    뭄이 유난히도 길었던 1978년 여름,서울 시내 고지대(高地帶)의 약국들이 때아닌 대목을 맞았다. 근육통에 붙이는 파스와 연고제, 피로회복제의 판매량이 급증한 것이다. 수돗물이 끊기자 주부들이 연일 몇백m씩 떨어진 공동 수도를 오가며 물지게를 지고 먹을 물을 날라오느라 양 어깨에 멜빵 자국이 벌겋게 솟고 온몸이 쑤셨기 때문이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24시간 물이 콸콸콸 쏟아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오늘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광복 후 30년 가까이 우리나라 서민들에게 먹는 물 확보는 고단한 일이었다. 1962년까지도 서울의 상수도 보급률이 56%에 머물렀다. 높은 지대의 수도는 툭하면 병아리 오줌처럼 찔끔찔끔 나오다가 끊겼다. 먹고살려면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이때의 필수 장비가 물지게다. 양철 물통을 막대기 좌우에 걸어 지고 다니던 이 도구는 1970년대까지도 모든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 물지게 지기'란 '땔나무 해 오기'와 함께 고달팠던 삶의 대표적 풍경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정일권 전 국회의장 등 각계 인사들의 인생 회고에도 한때 물지게를 졌던 일들이 에피소드로 들어 있다(조선일보 1998년 6월 3일자). 얼마나 고되었으면 직업적으로 물지게를 졌던 물장수들은 식사 때 밥상 위의 모든 음식을 싹쓸이했다. 남김없이 먹어 치운 밥상을 '물장수 상(床)'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물지게를 지느라 어머니 누이들의 허리는 휘었다. 1966년 봄에는 꼭두새벽에 물지게 지고 언덕을 올라가던 주부가 졸도해 사망했다 (경향신문 1966년 4월 6일자). 같은 해 가을엔 9세 소녀가 물지게를 지고 가다 화물차에 치여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경찰은 물지게 진 아낙네들에 대해서는 야간 통금 위반을 눈감아 주기도 했다. 어느 모로 봐도 이 고된 노동은 남자들이 해야 제격이었다. 그런데도"사내가 부엌일 거들다간'고추'떨어진다"는 말이 있던 그 시절엔 물지게 지기란 아낙네들 몫이었다. 보다 못한 조선일보는 1960년 가정란에"아이들에게 시달리고 살림살이에 쫓기다가도 어깨가 휘어지게 물을 길어야 하니 (아내들이) 가엾지 않습니까"라며 남편들이 좀 도와주라는 기사를 썼다. 그러면서도 기사는"사람이 많은 골목길에 (남편이) 물지게를 지고 지나다니기를 부인들은 원치 않습니다" 라며"'해 진 뒤 밤 틈을 타서'두어 번 물을 길어 주면 어떠냐"고 했다(조선일보 1960년 7월 12일자). 여자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Chosun ☜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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