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2 '오늘도 무사히' 적힌 영국 聖畵… 50년간 '안전 운전' 아이콘으로

浮萍草 2015. 9. 2. 09:02
    ▲  1960년대부터 국내 버스·택시 운전석에 걸렸던 기도하는 어린이 그림(왼쪽)과 이를 변형해 현재 판매 중인 차량용 스티커.
    찬욱 감독 영화'올드보이'에는 신구 세대 감별용'리트머스 시험지'같은 소품 하나가 등장한다. 주인공 오대수(최민식)가 납치돼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으며 갇혀 있던 방에 걸린 그림이다. 인형처럼 예쁜 꼬마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림 여백에'오늘도 무사히'라는 글자가 적힌 이 액자가 낯익다면 그는'7080 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택시·버스의 운전석 부근에 이 그림이 흔히 걸려 있었다. 남편과 아빠의 무사고를 소망하는 가족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마스코트였다. 경찰도 안전 운전 계몽용으로 이 그림을 공식 보급했다. 1969년 서울의 한 경찰서는 이 그림을 2000장 인쇄해 택시 운전사들에게 나눠 주며 차 안에 붙여달라고 당부했다. 대중교통의 난폭 운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원인의 50%가 과속·추월 등 난폭 운전이라는 게 당시 경찰 분석이었다. 서울의 운전기사 700여 명이 모여 '안전 운전 총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조선일보 1967년 11월 12일자). 그럼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5년 서울의 택시 사고는 1만356건.1대당 건수가 뉴욕의 20배였다. 당국은 첫째 원인으로 '운전자의 준법정신 희박'을 꼽았다(조선일보 1976년 12월 16일자). '오늘도 무사히'를 기원하는 그림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어느 택시 운전기사는 그림을 걸었더니'손님들이 속력 좀 내자는 말을 안 한다'고 흡족해했다(동아일보 1968년 2월 3일자). 하지만 '오늘도 무사히'가 적힌 그림은 우리 마음을 어둡게도 했다. '오늘도 행복하게'나'오늘도 즐겁게'가 아니라 그저 하루가 무사하기만 해도 다행이었던 위태로운 시대의 반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그림을 보고 사고의 공포를 떠올리거나,'몸이 오싹해졌다'는 반응도 있었다(경향신문 1971년 3월 24일자). 오늘날 이 그림은 자주 볼 수 없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차량용품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의 1776년 작 '어린 새뮤얼(The Infant Samuel)'이다. 구약성서 속 선지자 '사무엘'이 어린 시절 기도하는 모습을 그렸다.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국내에서'소녀의 기도'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은 남자인 것이다. 18세기 영국 화가는 자신의 성화(聖畵) 속 인물이 훗날 소녀로 '성전환'당해 한국에서'안전 운전'의 아이콘으로 뿌리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Premium Chosun ☜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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