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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 실제모델, 조선 최고 부자 변씨 ⇨ 충격적이지만 현명한 그의 유언

浮萍草 2015. 8. 23. 21:30

     ▲ 조선 최고 부자였던 역관 변승업(卞承業: 1622~1709)은 생전,급전이 필요한 시전 상인이나 일반인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빌려줬다.  그 액수가 50만냥에 이르렀다 한다.  ▲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대에 달한다고 한다.  ▲ 그가 죽기 전 자식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 “백성들에게 빌려 준 돈 50만냥을 받지 말라.”  ▲ 그는 이런 유언을 남기면서 자식들에게 “채권문서를 불태우라”고 했다.  ▲ 변승업의 판단은 충격적이었지만, 현명했다.  왜 그럴까.  ▲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쓴 실학소설 ‘허생전’의 실제모델이기도 했던 조선 최고 부자 ‘변승업 가문’의  처세술을 소개한다.
    ㆍ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부자 변씨 산 아래‘묵적골’에 사는 양반 허생은 어느 날 돈벌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내로부터 된통 핀잔을 들었다. 허름한 차림의 허생이 마지못해 발길을 옮긴 곳은 운종가(雲從街) 즉,종로 저자거리(시장)였다. 저자거리 사람들에게 그가 물었다. “한양 안에서 누가 가장 부자요?” 누군가가 변씨(卞氏)라고 말해줬다. 허생은 곧장 변씨 집으로 향했다. “내가 집이 가난한데 조금 시험해 볼 일이 있어서 그대에게 만금을 빌리러 왔소.” 그말을 들은 변씨는 담보도, 보증도 없이 선뜻 만냥을 내주었다. 놀란 아랫사람이 물었다. “대인께서는 그 손님을 아십니까. 어찌 이름도 묻지 않고 왜 그러셨습니까?” “그가 시험해 보겠다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니겠지만 나 또한 그에게 시험해 볼 일이 있는 거지. 주지 않았으면 모르거니와 이미 만금을 주었다면 이름을 물어서 무엇 하겠나.”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지은 실학소설 ‘허생전’중에서 허생이 조선 최고 부자 변씨에게 돈을 빌려가는 대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변씨’라는 인물은 당대 조선 최고 부자이자 역관이었던 변승업 가문 사람이다.
    ㆍ시장경제 관련 부서에도 근무했던 연암 박지원
    재미있는 건 연암이 시장경제와 관련된 부서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엮어서 만든‘과정록(過庭錄)’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연암은 53세 되던 해인 1789년 평시서(平市署) 주부(主簿:종6품)로 일했는데,평시서는 물가가 오르고 내리는 것을 다스리는 관청이었다. 1791년(55세)에 그는 한성부 판관(종5품)에 오른다. 이 해에 커다란 흉년이 들어 물가가 폭등했는데,정부의 재상이 물가를 동결시키고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연암은 상품의 유통을 막으면 더 큰 혼란이 오며,백성들의 자본이 축적되어야만 국가 경제도 넉넉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연암은 1805년 양양 부사(종3품)를 끝으로 서울로 올라와 지내다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저술가 이상각 “허생전 모델은 변승업 아버지 이거나 그의 할아버지” 밀양 변씨인 변승업은 연암보다 100여년 앞서 활동했던 조선의 왜학(倭學) 역관이었다. 일본어 통역사였다는 얘기다. 역사 저술가 이상각씨는‘조선 역관 열전’(2011년)이라는 책에서“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 부자(富者)의 모델이 바로 변승업의 아버지 변응성과 그의 할아버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최고의 역관 가문이자 최고 부자였던 변승업 일가(一家)는 대체 누구였을까. 그들은 역관을 하면서 어떻게 그런 부를 거머쥘 수 있었을까. 역사저술가 이상각의 글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밀양 변씨의 대표적인 역사속 인물로는,태종~세종대에 활약한 대학자 변계량을 꼽을 수 있다. 변계량 이후 밀양 변씨는 중인으로 신분이 떨어졌다 한다. 이들 가문에서 처음 역관이 된 이가 변승업의 아버지 변응성이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일궜다. ㆍ아홉 아들 중 여성 명이나 역과에 급제
    그의 대를 이은 아들 변승업은 밀양 변씨 역관 가문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622년 (광해군 2년) 변응성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난 변승업은 왜학역관으로 활동했다. 놀라운 건 변응성의 아홉 아들 중 여성 명이 역과에 급제해 역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학 역관으로 일본을 오가던 변승업은 부친의 대일무역을 확장시켜,한양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682년(숙종15) 당상역관으로 일본 수도 에도(지금의 도쿄)에 다녀온 변승업은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력을 증명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 이맘 때였다. 1684년 쓰시마 번주에게 뇌물을 주고 밀무역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이로 인해 변승업은 의금부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 변씨 가문은 엄청난 자금을 동원해 각계에 로비를 펼쳤다. 결국 변승업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ㆍ밀무역 혐의 옥살이 풀려난 후 ‘부 쌓기보다 수성(守城)’
    변승업은 이때 ‘부는 쌓기보다는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곧장 ‘수성(守城)’을 실행에 옮겼다. 각종 선행을 베풀어 세간의 질시를 희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급전이 필요한 시전 상인이나 일반인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빌려줬는데,그 액수가 무려 50만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원 가치에 달한다고 한다. 그는 이와 함께 아랫사람의 각종 경조사를 직접 챙겨 가문의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696년 아내가 죽자 변승업은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그는데 이게 문제가 됐다. 아내의 관에 옻칠을 한 것이다. 당시에는 관에 옻칠을 하는 것은 왕실만 할 수 있는 특권이었었다. 조정에서 이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돈의 위력’이 발휘됐다. 변승업은 수만 냥의 자금을 뿌려 특권 시비를 잠재웠다. 당시 시대 상황을 한번 보자. 변승업이 활동하던 시기는 숙종 제위 기간으로 장희빈 사건을 비롯해 서인과 남인의 정쟁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이런 정쟁 속에서 사리판단을 잘못했던 여러 역관 가문이 패가망신했다. ㆍ“백성들에 빌려준 거금 50만 냥 돌려받지 말라”유언
    그렇다면 변승업 가문은 어땠을까. 용케도 변씨 가문은 정쟁의 여파 속에서도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 조선 최고의 부자 변승업이 난세에도 가문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뜻밖에도 비결은 그의 유언이었다. 86세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그는 1709년,시중에 풀어준 돈 50만 냥을 돌려받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채권문서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긴 것다. 변승업의 판단은 충격적이었지만 현명했다. 이로 인해 그의 가문만은 끝까지 부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양 백성들도 한 몫했다. 돈을 빌려 쓴 한양 백성들은 이 가문이 위기에 처할 때 마다 ‘훌륭한 집안’이라며 변씨 가문을 옹호했다고 한다. 변승업의 ‘50만냥 포기’는 요즘 개념으로 보자면 일종의 기부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가문을 지키기 위한‘변종 나눔’(?)이지만 국민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오늘날의 일부 재벌들이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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