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다산 정약용의 얄궂은 운명?

浮萍草 2015. 8. 23. 22:12
    태어난 곳과 유배지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다니…

     ▲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군 추부면 마현리(馬峴里)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 그런데 공교롭게 다산이 1801년 유배를 간 곳의 지명도 마현리(馬峴里)다.  ▲ 향토사학자 금낙두씨는 다산의 유배지와 태어난 곳의 지명이 같은 것에 대해“그건 우연치고는 참  대단한 우연”이라고 했다.  ▲ 하지만 금씨는“마산리가 언제,어떻게,왜 현재의 지명인 마현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ㆍ“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 산 정약용(1762~1836)은 유배를 통해 문학을 꽃피운 대표적인 조선후기 실학자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다산의 재발견’(2011,후마니스트)이라는 책에서 다산의 유배를 두고“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고 평했다. 다산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군 추부면 마현리(馬峴里)로,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다산은 40세부터 58세까지 무려 18년에 걸친, 긴 유배생활을 대부분 전라도 강진 땅에서 보냈다.


    ㆍ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서 3번의 유배 생활
    다산은 평생 3번 유배를 당했다. 전남 강진 출신인 차벽 작가가 쓴‘다산의 후반생’(2010, 돌베개)에 의하면,다산은 1790년 스물여덟살 때 시험 감독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충청도 해미(海美)에 유배됐다가 보름만에 풀려났다. 이후 1801년 신유사옥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때는 경상도 장기(長鬐)현에서 7개월 10일 동안 두 번째 유배생활을 했다. 장기현 유배됐을 때 ‘황서영 백서사건’(천주교 신자 황서영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했던 청원서 사건)이 터졌다. 이 일로 다산은 장기현에서 서울로 압송됐다. 다산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유배지를 바꾸라”는 명이 떨어졌다. 전라도 강진에서의 긴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산의 전라도 강진 유배생활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앞서 경상도 장기(長鬐)현에서의 유배생활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장기는 다산보다 120여년 앞서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 4년간 유배됐던 곳이기도 하다. 장기(長鬐)현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ㆍ장기는 고을 원님이 2번 울고 가는 곳…
    무더위가 절정이던 8월 2일(일요일) 이 곳을 찾았다. 장기는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포항시에 속하는 면소재지다. 장기면은 문무대왕 수중릉으로 유명한 경주 감포읍에서 포항 내륙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오지로 유명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장기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곳이었다. 다산의 학문과 삶에 몰두해 온 다산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 정약용 평전’(2014, 민음사)에서 장기 마을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기(長鬐)는 원님이 부임하면 두 번 울고 가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부임한 직후 하도 외지고 외딴 시골이어서‘이런 막촌에서 어떻게 사또 생활을 하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되어 한 번 울고 사또 생활을 하다 보면 주민들이 어찌나 정이 많고 인정이 후한지 이임할 때는 헤어지기 섭섭하여 또 한 번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ㆍ태어난 곳과 유배지 한자까지 같아
    신유사옥에 휘말린 다산 정약용이 경상도 장기 땅으로 유배를 떠난 날은 1801년 2월 28일,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한양을 출발해 장기현에 도착한 것은 열흘이 좀 지나서였다. 다산이 귀양 와서 거처한 곳은 장기현의 마산리(馬山里)라는 곳이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의 마을이 마현(馬峴)인데 귀향살이 할 마을이 마산(馬山)이라니 이런 우연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라고 얄궂은 운명을 강조했다. 마산리의 현재 지명은 마현리(馬峴里)다. 공교롭게도 다산의 고향인 경기도 마현리와 한자까지 똑같다.

    장기에서 다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장기초등학교다. 개교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초등학교 교정에는 다산 정약용과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의 시비가 있다. 장기 초등학교에 다산 사적비가 만들어 진 것은 2001년. 다산의 유배 2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사적비에는 “선생의 마현 땅 도착이 신유년(1801년) 삼월 초아흐레이다. 마현방 성선봉(馬峴坊 成善封)의 집을 배소(配所)로 하여 유배의 삶을 해가던 선생은 장형 약현(長兄 若鉉)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이 작성한 백서사건(帛書事件) 관련 의혹으로 시월 스무날에 서울로 압송된다”고 적혀 있다. 마현방(馬峴坊)의 방(坊)은 작은 동네를 뜻한다. 성선봉은 다산이 머문 집주인의 이름이다. 이 곳 장기에 다산의 사적비가 2001년 뒤늦게 들어선 데는 사연이 있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이렇게 쓰고 있다.
    ㆍ다산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현지 사람들도 몰라
    <필자는 1985년 이래 몇 차례 장기면 마현리를 찾았던 적이 있다. 다산이 묵었다는 성선봉이라는 분의 집터는 물론 마을도 통째로 없어지고,지금은 장기 초등학교라는 큰 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운동장에는 우암 송시열의 흔적이 완연했다. 우암이 귀양 살면서 심었다는 300년도 넘는 은행나무가 운동장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곳에서 다산 정약용이 귀양 살다 갔다는 것을 아는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1985년에 방문하여 다산이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 그곳 초등학교의 자리임을 다산의 시문을 통해 설명한 글을 썼더니,그것이 증거가 되어 먼 훗날 그 고장 출신 들이 학교 운동장 가에 우암과 다산의 유적비를 세워 이제는 명실공히 다산을 기념해야 할 장소로 굳어졌다. 기념비는 사적비라는 이름으로 시까지 새겨 아름답게 세워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요약하면 이렇다. 1985년 박석무 이사장이 장기초등학교 자리가 다산이 유배를 했던 곳이라고 글을 통해 밝히자,이를 토대로 다산 유배 200주년이 되는 2001년 장기 지역민들이 사적비를 세웠다는 얘기다. 사적비의 기록처럼,다산의 유배지 지명이 태어난 곳의 지명과 똑같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다. 초등학교 인근 지역에서 마현이라는 지명을 찾아보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자동차로 500미터 정도 달리자 용케도 마현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마현리 마을회관이 보였다. 마을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회관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날씨가 덥고 일요일이라 회관문은 잠겨 있었다. 시선을 돌렸다. 멀리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곳이 과연 다산이 214년 전 잠시 기거했던 유배지란 말인가.” 잠시 작은 탄식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마현리에 대한 단서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ㆍ향토사학자 “언제 마현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다음 날인 8월 3일, 이 곳 장기면의 역사를 잘 아는 향토사학자 금낙두(74)씨와 연락이 닿았다. 이곳 토박이인 금씨는 2002년 장기중학교 교장을 퇴임하고 장기충효관 운영국장을 맡고 있다. 다산의 유배지와 태어난 곳의 지명이 한자까지 똑같은 것에 대해 금낙두씨는“그건 우연치고는 참 대단한 우연”이라며“2001년 사적비를 세울 때 우리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다”고 했다. 그는“다산이 귀양왔을 때 이 곳 이름은 마산리였다”며“하지만 그후 마현리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 같은데,정확히 언제,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아쉬워 했다. 금씨는 다산이 머물렀다는 성선봉의 집에 대해“그 후손들이 인천으로 모두 옮겨간 것으로 알고 있다”며“그래서 다산이 머문 곳은 어디인지가 확실치 않다. 우리도 계속 정확한 위치를 찾고 있다”고 했다. ㆍ면사무소도 “바뀐 자료를 찾을 수 없다”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다. 마을 이름이 바뀐 이유를 장기면 사무소는 알고 있지 않을까. 향토 자료집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곧바로 장기면 사무소에 문의를 했다. 면사무소의 한 담당자는“향토 자료 등을 찾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몇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담당자는“찾을 길이 없다”며“미안하다”는 연락을 해왔다. 다산이 유배왔던 당시 지명 마산리가 언제,왜,지금의 마현리로 바뀌었는지는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다산은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기성잡시(鬐城雜詩) 27수 등 130여 수의 시를 지었다. 기성잡시는 장기현의 풍물을 묘사한 시다. 다산은 7개월 10일의 짧은 귀향살이에도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의서를 비롯 10여권의 저서를 이곳 장기 땅에서 썼다고 한다. 무덥던 8월의 어느 날 오후,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여정은 그렇게 궁금증만 남긴 채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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