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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을 정벌한 漢나라의 18살 소년 장수 곽거병(霍去病) 이야기

浮萍草 2015. 7. 13. 12:17
    주천(酒泉)의 한무어(漢武御)와 신장 카자흐 유목민의 마유주(馬乳酒)
    ⊙ 곽거병, 한무제의 御酒를 샘터에 쏟아부은 뒤 병사들과 함께 나눠 마셔 ⊙ 카자흐인, 양고기로 배를 채운 뒤 본격적으로 마유주 마셔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나스진의 카자흐족. 유목민의 전통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다.
    원전(BC) 141년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이 16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당시 한나라는 대외적으로 편치 못했다. 북방의 유목국가가 번영을 구가하며 핍박해 왔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BC 209년 묵돌 선우(冒頓單于)가 제위에 오르면서 동으로는 만주(滿洲) 서로는 서역(西域)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BC 200년 한고조 유방(劉邦)이 이끌고 온 32만명의 대군도 물리쳤다. BC 3세기부터 600여년 동안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초원의 제국 흉노(匈奴)가 그 주인공이다. 유방은 친정(親征)에 나서기 전 아주 자신만만했다. 초한(楚漢)전쟁에서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BC 202년 통일제국을 세웠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이덩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되어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뒤로, 항상 흉노에 대한 공포에 떨었다. 유방은 묵돌 선우와 화친을 맺었는데, ▲한이 흉노를 형으로 모시고 ▲매년 곡식·비단·술 등 공물을 바치며 ▲한의 공주를 선우에게 출가시키는 굴욕적인 맹약이었다. 숨을 거둘 때는 “절대 흉노와 싸우질 말라”는 유언도 남겼다. 묵돌·노상(老上)·군신(軍臣) 선우로 이어지는 3대 81년 동안 흉노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에 한무제도 즉위 초기에는 화친정책을 이어 갔다. 하지만 BC 135년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던 두(竇)태후가 죽자,개혁정책을 거침없이 추진했다. 먼저 국정을 농단하던 두태후 일족과 추종 대신들을 숙청했다.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효렴(孝廉)제를 실시해 효행이 뛰어나거나 청렴한 인재를 등용했다. BC 133년 내정을 다진 한무제는 흉노와의 일전에 나섰다. 흉노와 교역하던 상인 섭일을 위장 투항시켜 군신 선우를 유인했다. 군신 선우는 기병 10만을 이끌고 내려왔는데 지금의 산시(山西)성 숴현(朔縣)인 마읍(馬邑)에 도착하기 전 한군(漢軍)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 선우는 철군을 단행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군은 아직 기병이 취약해 추격전을 감행할 처지가 못 됐다. 결국 한무제는 대군을 동원한 데 따른 인적·물적 손해만 감수해야 했다.

    ㆍ衛靑의 흉노정벌
    그로부터 4년 뒤 한무제는 위청(衛靑),공손오(公孫敖),공손하(公孫賀),이광(李廣) 등 네 장군에게 각각 1만의 기병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본래 화친맹약에 따라 한과 흉노는 진나라 때 쌓은 만리장성을 국경선으로 정했다. 이때 한군은 처음으로 장성을 넘어 북진했다. 네 방향에서 흉노 땅에 진입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공손오는 흉노군에 패해 부하 7000명을 잃었고, 이광도 대패해 포로까지 됐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공손하는 길을 잘못 들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위청만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이었다. 장성을 넘어 흉노 땅을 휘저은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이듬해에도 위청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가서 수천 명의 흉노군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원래 위청은 첩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종처럼 불우하게 보냈다. 하지만 노래하는 기녀(唱妓)였던 누나 위자부(衛子夫)가 한무제의 애첩이 되면서 신분이 수직상승했다. BC 127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내몽골(內蒙古) 오르도스(鄂爾多斯)까지 차지하여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해가 바뀌면서 흉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군신 선우가 죽자, 동생인 이치사(伊雉斜)가 어린 태자를 쫓아내고 즉위했다. 묵돌부터 군신까지 흉노가 번성한 데에는 선우의 뛰어난 용인술이 한몫했다. 한나라는 패전한 장수를 사형에 처한데 반해,흉노는 적장을 포로로 잡아서 장군으로 삼아 중용했다. 한데 이치사 선우는 한 황제와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훗날 전투에서 패한 혼야왕(渾耶王)이 부족을 이끌고 한군에 투항한 것은 이치사 선우가 내릴 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BC 123년 위청은 전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내몽골 전역을 휩쓸며 적군 1만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치사 선우의 주력 부대와 조우하면서 대패했다. 우(右)장군 소건은 휘하 병사를 모두 잃고 혼자 도망쳐 왔다. 전(前)장군 조신은 전투에서 져서 기병 800을 이끌고 투항해 버렸다. 단지 한 장수가 치고 빠지는 기습공격을 능란하게 펼치면서 흉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위청의 생질이자, 18살이었던 소년 장수 곽거병(霍去病)이었다.
    ㆍ“흉노의 오른쪽 어깨를 자르다”
    곽거병은 평양공주의 시녀였던 위소아(衛少兒)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2살 때 일가족이 모두 귀족이 됐다. 어릴 적 집안이 풍족하진 못했지만 이모가 황후에 오르면서 궁을 자주 드나들며 한무제의 눈에 들었다. 학문에 정진하고 무예를 익혀 16살부터 군문(軍門)에 몸을 담았다. 18살에는 표요교위(剽姚校尉)로 참전해 위기에 빠졌던 한군을 구출했고 수하 800명을 이끌고 진격해 흉노군 28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무제는 그 공로를 인정해 곽거병에게 작위(爵位)를 내렸다. BC 121년에는 표기(驃騎)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최정예 기병 1만을 줬다. 그에 부응하듯 곽거병은 지금의 간쑤(甘肅)성에 3차례 출격해서 큰 전공을 세웠다. 흉노의 번왕 절란왕(折蘭王)과 노호왕(盧胡王)을 죽였고 혼야왕을 항복시켜 치롄산(祁連山)까지 평정했다. 훗날 “흉노의 오른쪽 어깨(右肩)를 잘랐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같은 시기 출정한 이광은 흉노군과 일진일퇴만 거듭했고, 공손오는 행군이 늦어 전장에 늦게 도착했다. 한무제는 BC 119년 위청과 곽거병을 쌍익(雙翼)으로 삼아 각각 5만의 기병을 줘서 흉노 토벌전에 나섰다. 위청은 본진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이치사 선우가 이끄는 정예병과 조우했다. 양군이 격전을 치르던 중 모래폭풍이 불어 왔다. 그 와중에도 한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선우는 호위대를 이끌고 도망쳤다. 위청이 추격에 나섰지만 종적을 찾질 못했다. 이 전투에서 위청은 흉노군 1만90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에 반해 예하 장군들은 길을 헤매다 싸움에 참여하질 못했다. 막료 없이 전장에 나선 곽거병은 젊은 장수들을 과감히 발탁했다. 곽거병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인 우북평군(右北平郡)에서 출병해 1000리까지 북진하며 흉노의 왼쪽 어깨를 잘랐다. 번왕 3명을 주살했고 장군과 신하 83명을 붙잡았다. 병사 7만443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왔다.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서 보급을 제대로 받질 못하자, 적의 것을 빼앗아 군량미와 말먹이로 충당했다. 위청이 한 전투에서 1만명의 기병을 잃은 데 반해, 10배나 더 많은 전투를 치른 곽거병은 수하 1만5000명이 죽었다. 이렇듯 곽거병은 한무제의 날카로운 비수로 흉노를 난도질했다. 흉노는 제국의 좌우견이 잘려나갔기에 내몽골 남부와 간쑤성을 완전히 포기했다. 한군의 예봉을 피해 수도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옮겼고, 한동안 한을 넘보질 못했다. 그러나 곽거병은 불과 23살에 요절했다. 사막과 초원을 전전하면서 풍토병에 감염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史記)》의 〈위청·곽거병전〉에 따르면, 곽거병은 생전에 6차례 출정했다. 그중 4번은 장군으로 나서서 흉노군 11만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ㆍ常勝장군 곽거병
    ▲  곽거병의 흉노정벌을 기리는 馬踏匈奴像.
    漢의 기병이 흉노를 밟고 있는 모습이다.
    한무제는 이런 곽거병의 공로를 인정해 4차례에 걸쳐 식읍(食邑) 1만5100호를 하사했다. 곽거병을 따라 출정했던 교위와 군리(軍吏) 중 6명에게도 작위를 수여했고 2명을 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할 점은 곽거병의 뛰어난 리더십이다. 첫째, 곽거병은 뛰어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공정히 배치했다. 그가 발탁한 조파노(趙破奴)는 유목민 출신으로 흉노에서 살다가 한으로 귀순했었다. 조파노는 곽거병이 올린 장계에 따라 작위를 받았고, 훗날 장군까지 되어 크게 활약했다. 둘째, 곽거병은 전쟁터의 상황에 맞춰 전술을 펼치는 ‘언제나 이기는 장군(常勝將軍)’이었다. 《사기》에는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한무제가 곽거병에게 손오병법(孫吳兵法)을 가르치려 했다. 곽거병은 “어떤 작전을 쓸 것인가 생각하면 됩니다. 굳이 옛 병법을 익힐 필요는 없습니다”고 말했다. 실제 곽거병은 임기응변의 달인으로 전장을 고려해 수시로 전술을 바꿔 가며 전투를 벌였다. 병사들은 곽거병의 지휘를 믿고 따르면 항상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했다. 셋째, 곽거병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했다. 위로는 장수부터 아래로는 말단 군졸까지의 전공을 꼼꼼히 기록해서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이런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일처리 덕분에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 대부분은 승진하거나 포상을 받았다. 상승장군 밑에서 전투에 이기고 전공도 챙길 수 있었기에 누구나 곽거병 휘하로 들어가길 갈망했다. 이에 반해 BC 119년 토벌전에서 승리했지만,위청의 막료들과 병졸들에게는 별다른 은상(恩賞)이 없었다.
    ㆍ 곽거병이 샘터에 술을 부어 마셨던 주취안
    ▲  주취안공원에 보존되어 있는 샘터. 곽거병은 이 샘터에 술을 부어 병사들과 나눠 마셨다.

    물론 곽거병에게도 허물은 있었다. 황후의 일족으로 성장했기에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거침이 없었다. 사마천은 《사기》에 그런 성품을 보여주는 사례를 기록하며 비판했다. ‘표기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귀한 신분이라 병사를 돌볼 줄 몰랐다. 황제는 그가 출정하면 음식을 가득 실은 수레 수십 대를 보내줬는데 되돌아오는 길에 굶주린 병사가 있음에도 남은 고기와 양식을 버렸다. 요새 밖에서 주둔할 때는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려도 표기장군은 공차기를 하며 놀았다.’ 반면 위청에 대해서는 ‘성품이 인자하고 겸허하며 온화했기에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세상은 그를 칭송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위청은 분명 실력과 인품을 갖췄고 수많은 전공을 올렸던 장군이다. 한데 어찌하여 한무제와 병사들은 곽거병을 더 사랑하고 높이 평가했을까? 한무제는 어릴 적 종살이를 해서 겸손함이 몸에 배었던 위청보다, 위풍당당한 곽거병이 훨씬 더 사내답다고 여겼다. 곽거병을 너무나 아꼈기에 언제나 최고의 말·무기·장비 등을 배정해 주었다. 곽거병의 대장부 기질이 드러나는 고사가 있다. 표기장군으로 승진한 곽거병이 간쑤성에 출정해 큰 공을 세우자, 한무제는 어주(御酒) 한 병을 보내주어 승전을 축하했다. 당시 병사들은 전투에서 이겼으나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머나먼 전쟁터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도 깊었다. 이에 곽거병은 진영 앞 샘터로 병사들을 불러모았다. 술병을 높이 들고 “이 술은 황제께서 너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하사하셨으니 우리 모두 함께 마시자”고 외쳤다. 그러곤 술을 샘물에 쏟아 부었다. 곽거병이 먼저 바가지에 떠서 마셨고 병사들이 돌아가며 샘물을 마셨다. 곧 군영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뒤이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고작 한병의 술로 타이밍을 잘 잡아 군심(軍心)을 움직인 곽거병의 리더십을 잘 보여준다. 곽거병은 과묵하고 오만했지만, 이처럼 병사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았기에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인 한서사군(漢西四郡)을 개척했다. 한서사군은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酒泉)·둔황(敦煌)인데 곽거병이 샘터에 술을 부었던 곳은 주취안이다.
    ㆍ주취안 최대의 주류업체 한무주업이 내놓은 ‘韓武御’
    ▲  漢代 레이타이묘에서 출토된 靑銅騎馬兵俑.

    오늘날 간쑤성 곳곳에는 곽거병과 관련된 유적지가 개발됐다. 란저우(蘭州)는 시 중심가에 곽거병 테마공원을 조성했다. 우웨이에서는 한대 레이타이묘(雷臺墓)에서 출토된 청동기마병용(俑)을 ‘곽거병 군단’이라고 부른다. 이 청동용은 1969년에 99개가 발견됐는데, 이 중 마답비연(馬踏飛燕)이란 말용이 있다. 마답비연은 ‘나는 제비의 등을 밟고 뛰는 말’이라는 뜻으로, 예술성이 뛰어난 천고의 보물이다. 현재는 중국 국가여유국의 상징 로고로 쓰이고 란저우의 간쑤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곽거병이 술을 샘물에 부어 병사들과 나눠 마셨던 주취안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주취안이란 지명은 BC 106년 한무제가 곽거병을 기리며 지었다. 비록 송·원·명·청대 1000년 동안은 숙주(肅州)라 불리기도 했지만 1949년에 다시 복원됐다. 술을 부었던 샘물은 현재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주취안에는 한무제와 곽거병의 스토리를 인용해 론칭된 술 브랜드도 있다. 주취안 최대의 주류업체 한무(漢武)주업이 내놓은 한무어(漢武御)다. 한무어는 ‘한무제가 내린 어주’라는 뜻이다. 한무주업은 1970년대 초 설립된 국영 주취안시술공장(酒廠)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에는 값싼 주취안주(酒)를 양조해 팔면서 현지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의 소득수준이 급상승하면서 고급 바이주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양조기술을 개발해 1997년 한무어를 내놓았다. 주취안시술공장도 2002년 곡물유통기업인 쥐룽(巨龍)그룹에 인수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무어는 농(濃)·장(醬)·청(淸)·미(米) 등 향기와 숙성방식에 따라 나뉘는 분류법을 거부하고,‘중국 유일의 사조형(沙窖型) 바이주’라는 명칭을 고집스레 내세우고 있다. 왕잉훙(王英鴻) 한무주업 부사장은 “한무어를 양조할 때 쓰이는 누룩은 교외의 모래산에 마련된 저장고에서 발효된다”며 “다른 바이주와 달리 원료로 수수보다 밀의 비율이 높은 점도 특징이다”고 말했다. 저장고에 가 보고 싶었지만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너무 아쉬웠다. 현재 한무어는 간쑤성 일대에서만 판매되지만, 재미있는 스토리와 양조법을 지니고 있어 판매망을 더 확장하면 앞날은 밝아 보였다.
    ㆍ신장위구르자치구 고산초원에 남아 있는 흉노의 생활상
    ▲  카나스진은 울창한 산림과 맑은 물 때문에 ‘중국의 스위스’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흉노제국의 유목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북부의 한 고산초원에서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푸른 옥과 같은 물빛, 녹음(綠陰)을 한껏 뽐내는 산림, 호수 주변을 품고 있는 설산…. 사시사철 이 모든 것을 간직해 ‘중국 속의 스위스’라 상찬(賞讚)받는 부얼진(布爾津)현의 카나스(喀納斯)진이 바로 그 현장이다. 본래 카나스는 ‘협곡 중의 호수’라는 몽골어에서 유래됐다. 해발 1374m, 남북 24km, 수심 188.5m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고산 호수다. 카나스진은 이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촌락으로, 신장에서도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다. 카나스가 속한 알타이(阿勒泰)지구는 하나의 시와 6개의 현으로 구성된 알타이산맥의 중국 영토다. 전체면적이 11만8000km²로 한국(9.9만km²)보다 크지만, 2010년 현재 인구는 60만3000명에 불과해 인구밀도가 아주 낮다. 알타이지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시베리아계의 자연생태계를 품고 있다. 798종의 식물, 39종의 동물, 117종의 새, 7종의 어류, 300여종의 곤충류가 서식하는 생명의 보고다. 1년 중 절반이 겨울로 사나운 바람이 밤마다 몰아친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땅에는 카자흐(哈薩克)인과 투와(圖瓦)인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 투와인은 몽골인의 방계로 투르크계의 언어, 몽골의 종교와 문화, 카자흐의 생활습관을 갖춘 원시부족이다. 민족 분포는 한족이 38.5%(23만3000명)이고 카자흐인(32만8000명),회족(回族·2만3000명),위구르족(維吾爾族·8703명),몽골인(5376명) 등 소수민족이 61.5%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신장자치구 전역에는 12개의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인구수가 가장 많은 위구르족은 정주민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이와 달리 카자흐인과 몽골인은 유목민의 전통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이들을 도시로 이주시키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지금도 유목민들은 수천년간 이어져온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카나스의 아름다움이 1990년대 말부터 세상 밖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개발이 가속화했다. 이제는 유목생활이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ㆍ‘유목민의 요람’ 알타이
    알타이산맥은 중국,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4개 국가에 걸쳐 있을 만큼 거대하다. 평균 해발이 1000~3000m이고, 가장 높은 벨루하산은 무려 4506m에 달한다. 지질은 혈암(頁岩), 녹니편암(綠泥片岩), 사암(砂岩) 등으로 이뤄졌고 곳곳에 화강암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납, 아연, 주석, 금, 백금 등 다양한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는 이런 알타이를 ‘루드니(광석이 많은) 알타이’라 부른다. 겉으로 드러난 알타이는 더욱 풍요롭다. 알타이는 전형적인 대륙성 한대기후의 고산지대다. 낙엽송과 활엽수가 무성한 숲, 드넓은 고산초원,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호수, 만년설에 뒤덮인 빙하 등이 산맥 전체를 덮고 있다. 특히 산맥 허리인 1500~2500m 지대는 다양한 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여 있다. 이런 산림은 총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연평균 강수량이 1000~2000mm로 적당한 데다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산림을 적셔 주기 때문이다. 천연의 자연환경 덕분에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알타이산맥에는 다양한 유목민이 발원해 살아왔다. 흉노와 투르크 계열 민족의 일부가 여기서 시작했다. 칭기즈칸도 몽골고원을 통합한 뒤 알타이를 무대로 세력을 확장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알타이를 ‘유목민의 요람’이라 부른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유목민의 생활을 체험하려는 투어는 중국의 카나스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바르나울,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알타이지구는 카자흐인(54.4%)이 가장 많다. 카자흐인은 생김새가 작은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키가 작아 몽골인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서 살았던 투르크 계열 민족으로, 알타이어계의 카자흐어를 쓴다. 지난 천여 년 동안 카자흐인은 실크로드에서 무역거래를 했던 상인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바람을 가로지르는 뛰어난 기마술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뽐내며 상인들을 노략질했기 때문이다.
    ㆍ초원에서 밀려나는 유목민들
    근대 들어 카자흐인은 겨울에는 고도가 낮은 도시에 정착해 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알타이산맥 곳곳을 누비며 유목생활을 해 왔다. 이런 생활방식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카자흐인과 카자크(Kazak)를 동일시한다. 하지만 카자크는 슬라브족으로 러시아어를 쓰는 군사집단이다. 이들은 제정 러시아를 지탱하던 기병부대의 핵심으로서 볼셰비키혁명에 반대했다. 백군에 가담해 5년간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렀으나, 전쟁은 1922년 적군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과 무관했던 카자흐인은 자치공화국을 설립해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이 됐다. 소련이 붕괴되자 1991년 12월 독립을 선언해 지금의 카자흐스탄을 건국했다. 오늘날 카자흐인은 카자흐스탄과 중국 외에도 러시아, 몽골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만의 언어·문화·풍습 등을 유지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또한 16세기경부터 받아들인 이슬람교는 카자흐인이 전통 가치를 이어오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유목민은 목축을 생업으로 풀과 물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종족 집단을 가리킨다. 오랜 옛날부터 이들은 몽골, 중앙아시아, 아라비아 등지의 초원과 건조·사막지대에 넓게 분포해 살아왔다. 한때 스키타이, 흉노, 돌궐, 몽골 등과 같은 대제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오늘날 유목민으로서 정체성과 생활습관을 모두 간직한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현실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55개 소수민족 중 몽골인, 티베트인, 카자흐인, 키르기스(柯爾克孜)인 등 극소수만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목민이었던 몽골인은 금세기 들어 초원에서 쫓겨나고 있다. 중국 내 주요 거주지인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가 빠르게 사막화하면서 황사가 빈번하게 일어나 황폐화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네이멍구 대부분 지역에서의 유목을 금지했고, 몽골인 대다수는 유목생활에서 탈피해 도시의 정주민으로 변신하고 있다. 이에 반해 카자흐인은 알타이산맥과 톈산(天山)산맥의 울창한 산림과 드넓은 고산초원을 무대로 유목민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ㆍ손님 대접을 위해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정성들여 양머리를 굽는 바인무랏의 큰아들

    2007년 9월 필자가 찾았던 카나스진 북부 카잔춈쿠르 초원은 알타이지구의 유목지 중 하나다. 카잔춈쿠르는 평균 해발 1600m로, 카자흐스탄에서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카자흐인은 5월 초 중국정부의 허가 아래 유목에 나선다. 먼저 부얼진현 내 겨울 주거지에서 살림살이를 꾸려서 낙타에 짐을 싣는다. 보통 모든 가족이 친척, 이웃과 함께 무리를 짓는다. 키우던 양, 소, 말 등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4~5일까지 길을 나서서 묵을 곳을 정한다. 그 뒤 온 가족이 생활하고 잘 수 있는 집을 짓는다. 바로 펠트 천으로 만든 둥근 천막 ‘유르트(Yurt)’다. 유르트는 몽골의 ‘게르(Ger)’와 아주 유사하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천막 같지만 안은 따뜻해서 고산의 추위를 막아 준다. 유르트 안은 놀랍게도 문명의 이기가 두루 갖춰져 있다. TV, 전기장판, 전화 등을 완비했고 이동식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까지 돌린다. 필자는 카잔춈쿠르 초원에서 바인무랏 일가족을 만났었다. 바인무랏은 부인,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 등 3대가 함께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키우던 동물은 낙타 6마리, 말 15마리, 소 30마리, 양 200마리 등 넉넉했다. 그 정도면 부얼진에서 중산층에 속한다. 바인무랏은 “옛날에는 유목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겨울 주거지에서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그대로 가져와 쓸 수 있기에 불편함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고산초원에서 몇몇 가정만 어울려 살아야 하는 유목민에게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방객은 반갑고 흥미로운 존재다. 천성이 유쾌한 유목민답게 카자흐인은 어느 민족보다 융숭하고 극진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이들은 보통 손님 대접을 위해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잡는다. 카자흐인은 평소 양고기를 삶거나 구워서 먹는다. 3~4시간 동안 푹 삶는데, 양파와 파를 듬뿍 넣어서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없앤다. 여기에 소금과 카자흐 전통향료를 넣어 요리를 완성한다.
    ㆍ‘예락(醴酪)’이라는 덜 익은 감주(甘酒)가 마유주의 기원인 듯
    ▲  마유주를 만들기 위해 소젖을 짜는 바인무랏의 큰며느리.

    유목민의 일상은 해가 저물어야 끝난다. 이 때문에 밤 8시가 가까워서야 밥상이 차려진다. 먼저 준비한 양고기를 중앙아시아 전통 빵인 난, 채소 등과 함께 밥상 위에 올린다. 식사 전 빼먹지 않고 행하는 의식이 있는데, 알라께 올리는 예배다. 카자흐인은 무슬림이라 끼니마다 코란을 암송하면서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의식이 끝나면 양고기를 상석에 앉은 손님께 바친다. 만약 손님이 여럿이면, 가장 나이가 많거나 존경할 만한 이에게 정성 들여 구워 삶은 양머리를 드린다. 손님은 코나 입술 부위를 조금 베어 먹은 뒤 가장에게 주거나, 다른 부위를 조금씩 잘라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고 주인에게 넘겨 준다. 보통 가장은 손님에게 눈을 베어 바치는데, 이것을 먹지 않으면 주인을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기에 반드시 먹어야 한다. 목젖은 자라서 노래를 잘하라는 의미로 아이들에게 준다. 귀는 집안에서 가장 어린 꼬마에게 잘라 준다. 어른들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듣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을 귀담아 들으라는 뜻이다. 양머리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면 본격적으로 음주를 즐긴다. 카자흐인의 술 ‘크므스(Qimiz)’를 마시는 것이다. 크므스는 말젖, 소젖, 양젖 등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馬乳酒)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술이라기보다 영양음료에 가깝다. 간단하게 양조할 수 있어 신석기시대부터 마유주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에는 ‘예락(醴酪)’이라는 덜 익은 감주(甘酒)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예락이 마유주의 기원일 가능성이 높다. 소는 유순해서 여자가 젖을 짜지만 말은 예민해서 남녀가 함께 일한다. 여자가 말젖을 짜면 남자가 망아지를 붙잡아 옆에 두어 그 젖을 먹게 하는 것처럼 위장한다. 소젖도 마유주를 만들 수 있지만 말젖보다는 질이 떨어진다. 보통 소젖은 한 마리에서 3L를 채취할 수 있으나 말젖은 1L도 못 나온다. 소젖은 한번 끓인 뒤에야 발효할 수 있고, 소가 바닥에 엎드려 생활해 젖병이 날 수 있다. 이에 반해 말젖은 짜서 바로 발효해 신선도가 높고, 말이 서서 지내기에 젖병이 전혀 없다.
    ㆍ마유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
    이런 마유주를 유라시아 전역으로 전파한 민족은 몽골인이었다. 마유주라는 명칭은 몽골어인 ‘아이락(Aikag)’에서 유래했다. 마유주는 한 차례 발효시킨 뒤 젖을 여러 차례 부어 다시 발효시켜야 맛이 좋아진다. 이때 마유주통에 긴 막대를 꽂아 두고 넓은 막대로 쉴 새 없이 저어야 한다. 보통 온 가족이 돌아가며 막대를 젓는다. 젖 속에 있는 지방과 단백질 조직을 깨뜨려 발효를 돕기 위해서다. 숙성이 끝난 마유주는 막걸리처럼 걸쭉한 색감과 3~4도의 알코올을 생성한다. 처음 마실 때는 비린내에 비위가 상하지만, 철 성분에 많이 함유되어 있어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약간 새콤한 맛이 나서 마실수록 알코올이 섞인 요구르트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무슬림인 카자흐인이 알코올이 함유된 마유주를 마시는 이유는 술이 아닌 음료라 여기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마유주를 마시면 몸을 따뜻하게 해서 감기를 이겨내고 식욕을 돋운다고 해서, 아이들에게도 마시도록 한다. 그야말로 초원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에게 딱 알맞은 술인 셈이다. 유목민은 식사하면서 흥이 나면 노래 부르고 춤춘다. 힘이 부치면 다시 음식을 먹고 영양을 보충한다. 이는 손님을 접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방문 첫날 바인무랏 아들·조카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늦게까지 술판을 이어갔다. 담가 놓은 마유주가 동나자 무슬림답지 않게 술꾼인 조카가 주변 마을에서 술을 사 오겠다며 지프를 몰고 나갔다. 한데 금방 온다던 사람이 1시간 반이 지나서야 보드카 2병을 들고 돌아왔다. 놀랍게도 카자흐스탄이 코앞인 국경마을까지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술판을 다시 벌였고 새벽 2시경에 끝났다. 이튿날 오전 잠에서 깬 필자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대경실색했다. 입었던 상의는 누군가 벗겨서 빨아 놓았고 덮고 있던 담요도 빨려져 있었다. 바인무랏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쓰렸지만 “견딜 만하다”고 대답했다. 중국 전역을 누비며 다양한 중국인들과 술을 마셨지만,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카자흐인은 정말이지 손님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대접을 잘하는 민족이었다.
    Pub.Chosun        글 | 모종혁 중국 거주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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