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중년의 性

時代는 變했다. 女姓에 獻身하라!

浮萍草 2015. 8. 22. 08:00
    女姓 性 差別의 歷史
    흔히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성욕을 풀고자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엔 여성은 나이가 들면 성욕이 감퇴하고 장년이나 노년기의 여성은 섹스에 무관심하다는 편견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성 또한 죽을 때까지 性欲을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아내를 위해 오랜 편견의 장막을 걷어내야 합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성적 즐거움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  에곤 실레, 〈포옹〉, 1917년, 캔버스 유채, 오스트리아 빈미술관. 실레는 불안정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 적극 서로를
    끌어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체 세포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난자(卵子)입니다. 정자(精子)는 난자의 10만 분의 1에 불과합니다. 난자에는 태아의 신체를 구성하게 될 난막·난핵·세포질·세포소기관 등이 빠짐없이 들어 있습니다. 반면 정자에는 23개의 염색체를 담은 정핵과 꼬리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세포는 정자의 유전자를 빼고는 모조리 난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섹스할 때 잘 분출되는 옥시토신은 사람 사이의 사회적 교감이나 사랑,모성 본능 등을 자극하는 신경 호르몬입니다. ‘모성 호르몬’ 또는 ‘포옹 호르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출산 전후(前後) 여성에게 급격히 늘어나는 옥시토신은 분만을 촉진시키고,산모와 아기 사이에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사랑의 묘약입니다. 밤낮없이 보채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 짜증내는 아빠들과 달리 아기를 외면하지 않고 달래는 엄마들의 모성애는 옥시토신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이렇듯 여성성과 여성의 모성 본능은 인류 종족 유지, 나아가 문명 진보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유사 이래 남성 중심 사회 구조에서 여성들은 가혹한 성차별은 물론 성적 착취와 성폭행이라는 굴종의 역사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ㆍ육식 문화와 전쟁 문화
    ▲  디에고 벨라스케스,<비너스의 몸단장>1651년경,캔버스에 유채,런던 내셔널미술관.머리를 괴고 모로 누워 있는 여신(女神) 비너스가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옛날의 육식 문화는 유목과 방랑을 전제로 했습니다. 그것은 힘 있는 타 부족과의 경쟁과 투쟁을 유발했지요. 그런 남성 중심의 충돌에서 여성들은 무참하게 짓밟혀 왔습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 본능은 치열한 투쟁과 반목을 가져왔습니다. 전쟁이야말로 끊임없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돼 온 여성 성착취와 성폭행의 악순환 고리입니다.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이어져 온 전쟁에서의 성폭력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느 전쟁이든 마찬가지이지만,20세기 최악의 사례를 든다면 아마도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 작고한 귄터 그라스는 노벨 문학상으로 유명한 독일 작가입니다. 생전에 살아 있는 양심이라 추앙받던 그가 사실은 젊은 시절 나치 친위대 출신이었다고 커밍아웃해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양철북》에는 자기 집에서 점령군 병사들에게 집단 성폭행당하는 엄마와,살기 위해 그 모습을 숨죽이며 바라보다 총 맞아 죽는 아빠 사이에서 갈등 하는 주인공의 시선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며칠 전 국내 언론들은 1919년 3·1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우리의 어린 여성들을 상대로 성고문과 심지어 강간을 일삼았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들이 작성한 보고서에는“젊은 여성과 여학생을 발가벗겨 조사하고 고문·학대 했으며, 강간에 대한 처벌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만주 731부대 등에서 각각 자행된 성폭행과 여성생체 실험은 전쟁으로 인한 성폭력의 최악의 사례입니다. 우리말 중에 ‘화냥년(본래 還鄕女)’이란 말에는 병자호란 중에 외국에 끌려갔다 고향에 돌아온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모멸이 담겨 있습니다. 외국에서의 순결 상실 가능성이 곧 여성으로서의 생명인 정조를 잃었을 거라는 확신으로 발전해 버린 것이지요. 육식과 전쟁은 인류가 생존해 오며 번영을 구가하기 위한 피치 못할 과정이긴 합니다. 그 가운데 남성들 역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참히 짓밟혀지고 무시되어 버린 여성과 여성성의 측면을 이제는 되돌아봐야 합니다.
    ㆍ종교에 내재돼 있는 여성 性차별
    ▲  에곤 실레<누워 있는 여자>1917년,캔버스에 유채,빈 레오폴드미술관.팔베개를 한 채 다리를 벌리고 누운 모습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고대 이집트에는 나일강변에서 다산(多産)의 신에게 여성 생식기를 잘라 바치며 땅에 묻거나 강물에 던지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생겨난 여성 할례는 이슬람 세계가 규정한 일종의 여성 청결 통과 의례입니다. 명목은 외부로 나온 여성 생식기 일부가 필요 이상 덧붙여진 것이므로 이를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슬림 남자들은 클리토리스와 소음순이 더러움의 상징이며 소녀들에게 욕정을 불러일으켜 순결을 상실할 위험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제거하면 결혼 후에도 성욕을 막아주고 오직 남편을 향한 정조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거지요. 동네 노파가 유리 조각으로 마취도 없이 소변 구멍만 빼고 여성 성기의 외부를 다 긁어내기까지 합니다. 클리토리스와 소음순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음순까지 전체가 심하게 잘려나간 여성은 평생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 심한 경우 줄곧 소변도 못 가릴 정도이고, 일부 여성은 극심한 후유증으로 출산 시 태아가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교·천주교·힌두교 등 현대 종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여성 차별 및 여성 비하적 신념입니다. 만인이 곧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해 상대적으로 인간을 존중한다는 불교 역시 여성의 몸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한계를 노출합니다. 여성 성직자나 여성 라마 역시 인정되지 않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남성적 신은 진취적이고 단호하고 절대적인 신관(神觀)을 심어주었고 그러한 신관 아래 점령과 지배와 착취의 역사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우리는 ‘신’ 하면 당연히 남신을 떠올리고,‘하느님(하나님)’ 하면 뒤이어 붙는 말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입니다. 만약 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어머니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였다면 종교 문화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이런 남성 중심적 사고하에서 여성관(女性觀)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 유명한 ‘중세 교황 및 성직자들에 의한 성착취’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중세 유럽은 신권이 각국의 왕권을 훨씬 능가하던 시절입니다. 교황에 대항했던 왕은 파문을 당하거나 무릎 꿇고 빌어야 했고 교황의 한마디에 전 유럽이 여러 차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문제는 절대 권력자가 된 교황과 성직자들이 그 권력의 칼날을 여성 성착취에 남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역대 교황이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고 왕족과 부녀자에 대한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사제와 성직자들 역시 여신도들이나 심지어 수녀들에 대한 폭행과 강간을 자행했습니다. 교회의 뒤뜰과 수도원 안채에는 여신도나 수녀들이 몰래 버린 갓난아기와 낙태 흔적들로 조용할 적이 없었다고 당시 기록문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인본주의’를 내세우며 화려한 문화적 황금기를 구가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도 소녀들에 대한 성적 착취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니콜라스 터프스트라는《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라는 저서에서 155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건립된 ‘피에타의 집(일명 연민의 집)’에서 자행된 하층 계급 소녀들에 대한 노동력과 성착취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합니다. ‘피에타의 집’은 부모를 잃거나 버림받은 소녀들을 위한 보호 시설이었지만, 실상은 저(低)임금의 견직물 제조공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직업에 종사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달리,소녀들은 하루종일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도 형편없는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굽은 자세로 하는 과도한 노동으로 폐결핵과 피부병이 만연했지요.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소녀들은 밥조차 먹을 수 없어 쓰러지기 일쑤였고 실제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의사들이 처녀와 성관계를 맺으면 성병 등이 치유된다고 잘못된 의학을 전파하는 바람에 대부분 소녀가 강간을 당해야 했습니다. 피에타 소녀 줄리아는 메디치 가문의 맏딸과 결혼을 앞둔 태자(太子) 곤차가의 생식 능력 검증이라는 미명 아래 겁탈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정치적·종교적 지도자들의 왜곡된 여성성의 인식이 어린이 강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지요. 종교 문화와 특히 중세는 물론 문화적 황금기라는 르네상스기(期)까지 이어진 성착취의 역사는 현대 남성들이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하는 우울한 역사입니다.
    ㆍ근대와 현대의 性차별
    프랑스 출신인 푸코는《성의 역사》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영국 빅토리아 왕조의 관습이 아직도 서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 합니다. 빅토리아 왕조에서 여성들은 경제적 권리와 법적 행사 권력도 없이 오로지 가정의 천사요, 남자의 장식물이었을 뿐입니다. 그 조장된 이미지로 인해 여성들은 현실에서 어떤 차별에도 불만을 표시하거나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여성 억압의 도구로 사용된 이런 이미지 때문에 남성의 거의 모든 행동은 전적으로 용인되었고 헌신적이지 못한 여성은 철저하게 배척당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경우 삼국시대에서 고려까지는 여성이 그나마 성적으로 덜 억압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유교 문화로 대표되는 조선시대로 넘어오며 전 사회 구조적으로 자행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구속은 극에 달합니다. 남자의 바람기는 눈감아 주거나 나아가 장려하는 왜곡된 성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성의 성적 일탈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금기와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강간에 의해 더럽혀진 여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였습니다. 여성 순결의 상징인 은장도는 겁탈하려는 남자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더럽혀진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성 차별적 사고는 아직도 현대인들의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첫 내각의 유일한 여성 각료였던 임영신 상공부 장관은 출근 며칠 동안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이 앉아서 오줌 누는 여자에게 어떻게 결재를 받느냐’며 아무도 장관실을 찾지 않는 현실에 당황해야 했을 정도입니다. 현대 경제학은 ‘마초 경제학’이라는 야유를 듣고 있습니다. 이제껏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여성은 엘리노어 오스트롬 단 한 명뿐입니다. 세계적인 경제학계의 거물들이 여는 강연회에 패널 토론자로 나서는 인사는 예외 없이 남자 일색입니다. 진보적 경제학자로 기대를 모았던 피케티의 한국 나들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성 경제학자들은 학문적으로 빛나는 공적을 쌓아도 그에 걸맞은 명성을 누리기는커녕 상아탑인 대학에서조차 외면받아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 간 임금격차가 큰데, 남자가 평균 100일 때 여성은 62에 불과합니다. 이 수치는 OECD 회원국 중 남녀 소득 차이 분야에서 10년 넘게 단연 1위입니다. 이런 남녀 임금 격차가 교육 정도와 직업 선택 등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요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남성 경제학자는 55%가 동의한 반면 여성 경제학자는 15%만 동의하고 있습니다. 경제학 교육이 남성 편향적이라는 점에 여성 경제학자들은 대다수가 찬성했지만,남성 대부분은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고용과 승진, 임금의 측면에서 여성들이 받는 불리함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는 유사 이래 제도적으로 여성과 여성성을 억압해 왔으며 나아가 이것을 당연시하는 정신적 세뇌를 기반으로 국가와 사회 근간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 여성 성차별의 악순환을 이제 끊어버리고 남녀 조화를 통한 발전의 선순환 구조를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착취당해 왔던 여성의 성적 측면이 주요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성에게는 ‘행복 추구권’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적 측면에서의 행복추구권’은 현대 여성을 위한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ㆍ페미니즘에 대한 斷想
    ▲  에두아르 마네<올랭피아>1863년,캔버스에 유채,파리 오르세미술관 마네는 기존의 누드화가 인간의 육체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만 집착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객에게서 꽃을 선물받는 고급 매춘부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스웨덴은 여성과 남성의 성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스웨덴에서 상영되는 영화 중에는 ‘A’라는 인증마크가 붙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A마크는 이른바 영화의 성평등 테스트인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에만 붙여주는 인증표시입니다. 벡델 테스트의 평가기준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름을 가진 두 여자가 나온다. 둘째, 둘이서 대화를 한다. 셋째, 대화의 소재나 주제는 남자가 아니다. 언뜻 보면 말도 안 되게 당연해 보이는 이 규준에 부합하는 서양의 영화는 4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흥행영화 ‘탑10’에 이 기준을 적용해 보면<해운대><괴물><광해><도둑들>의 4편만 A마크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명량><국제시장><7번방의 선물><변호인><왕의남자><설국열차>여섯 편은 불합격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인류 사회 구조가 암암리에 남성 위주로 계속 전개되어 왔음을 의미합니다. 페미니즘(Feminism)은 부당하게 왜곡된 여성들의 권리회복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189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성(Gender)에 기인하는 불평등과 억압을 고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은 사회 변화와 학문의 조류에 따라 120여 년 동안 여러 형태의 이론적 근거에 의해 다양하게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성들이 이 단어에 호의적이지 않음은 물론 나아가 몹시 불편해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리의 이면에는 반(反)남성주의라는 오해가 깔려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우려에 대해 “이것은 반남성주의가 아니라 반성차별주의다”라고 항변합니다. 얼마 전 시리아 접경 지역에서 행방을 감춘 10대 남학생은 트위터에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IS를 선택했습니다. 또한 40대 남성 방송인은 ‘이슬람국가(IS)보다 페미니스트가 더 위험하다’는 칼럼을 잡지에 기고해 물의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이 두 사례는 오랜 세월 집단무의식으로 작용한 여성성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것입니다. 배척을 넘어 증오로까지 이어지는 심리의 이면에는 단순한 거부 정도가 아닌 무자비한 공격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논란이 됐던 전직 유명 코미디언 서모씨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일상적 성차별 및 성폭력 심리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19세에 성폭력에 가까운 일을 당하고 강제적으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탤런트 아내의 고백은 처절합니다. 여성이 하나의 숭고한 인격체이기를 거부한 모습은 오랜 세월 우리를 지배해 왔던,‘보쌈 문화’와 ‘폭력 문화’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낯뜨겁습니다.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지나친 남성 중심적 사고가 남성 스스로에게도 오히려 억압의 기제로 작용한 측면이 많습니다. 우리는 은연중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모든 면에서 여자보다 더 우월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스스로는 물론 상대 여성을 압박해 감으로써 매사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이제 시대는 ‘급격히’ 변해가고 있습니다. 굳이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오랜 세월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마초적인 속성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 온유한 모습이 당신의 연인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발적인 애정과 나아가 평온을 이끌어내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수업 목표인 섹스에 있어서도 수많은 세월 답습해 왔던 남성 중심 이기적 자세와 마초적 마인드를 깡그리 버리고 여성과 여성성을 배려하는 진정한 마음 으로 임해야 합니다.
    ㆍ변화하는 여성시대
    ‘30년이 한 세대’라는 기준은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입니다. 5년, 3년이 다르게 급격히 변해가던 사회상이 요즘은 정말 ‘1년이 새롭게’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철통 같던 억압과 인습의 사슬은 매년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여성 지위 상승과 특히 성적인 금기의 해체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놀랍기만 합니다. 요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이른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이미 ‘섹스네트워크서비스(SNS)’가 되었다는 자조섞인 표현이 나올 지경입니다. 매스컴은 SNS가 ‘음란의 바다’가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검색창에 해시태그(단어 앞에 ‘#’을 붙여 특정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로 ‘섹’이라는 한 글자만 입력해도 모든 상황 파악이 끝날 정도입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성기 노출 사진부터 성행위 동영상까지 끝없는 물결의 바다를 이룹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진과 동영상들이 과거와는 달리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성기와 성행위를 찍어 올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0대와 20대가 주축인 현장에서 중·고등학생은 물론 초등학생들까지 가세하는 실정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중생’ 또는 ‘여고생’이 스스로를 찍은 음란사진과 동영상을 무차별적으로 게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부는 실제 교복을 입은 채로 말입니다. 이런 ‘일탈족’ 특히 ‘일탈녀’ 증가의 주된 요인은 ‘팔로어 수 늘리기 위해서’라는 관심욕과 과시욕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음란물 대응팀에 따르면 66명의 모니터링 요원이 삭제하는 여성 관련물만 줄잡아도 하루 평균 1800개 정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이 이미 일본을 넘어선 ‘성진국(선진국을 빗댄 말)’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입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젊은 남성은 60%대이지만 젊은 여성은 40% 초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청소년 10명 중 6명이 ‘결혼하지 않고 동거가 가능하다’에 동의하는데 여성만 따질 경우 그 비율은 훨씬 증가합니다. ‘외국인과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남녀 청소년이 무려 74.2%입니다.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특히 청소년기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반란은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온 ‘권위주의 문화’ 특히‘남성 중심 가부장 문화’에의 저항과 나아가 해체를 의미합니다. 오랜 세월 자행된 철저한 억압이 한순간에 강한 반발의 메아리가 되어 집단적으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지난 100년간 세계 여성들은 급속도로 여성 지위 상승을 실현해 왔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10년의 변화는 눈부실 정도입니다. 현대 여성은 향상된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모든 분야에서 남성들에게 도전하며 반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며칠 전 모든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에게 강간죄가 적용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지난 2013년 형법에서 강간죄의 피해자를 여성에서 ‘사람’으로 넓힌 이래 처음으로 여성이 강간죄의 가해자로 기소된 것입니다. 신장이 18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강간 피해자로 인정받았다는 현실이 무척 생소하기만 합니다. 이달 초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15 서울 모터쇼’에는 남자 모델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자동차 모델은 야한 복장의 여성 일색이었습니다. 모터쇼의 톱 모델 여성은 일당이 몇백만 원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간간이 손에 꼽을 정도로만 미미하던 남성 모델은 작년 부산 모터쇼에 다수가 등장하더니, 금년 들어서는 아예 주류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나마 나온 여성 모델들의 의상도 차분하고 얌전해졌습니다. 남성 관람객들이 ‘왜 이렇게 치마가 길어’라고 불평할 정도로 소비 주체로 급부상한 여성 관람객의 파워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달라진 여성 지위 향상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드라마 〈대장금〉이 이란에서 무려 90%라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심지어 스리랑카에서 99%라는 기적을 창출한 것이 아랍문화권 여성들의 ‘히잡 문화’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장금이가 봉건적 사회 구조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아랍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분석의 이면에는 단순히 장금이의 주체적 개척성을 인정하기 이전에 봉건적 남성 중심 구조의 현실을 용인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도 합니다. 이런 혼돈 속에서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2013년 형법에 숨은 함의(含意)만큼이나 우리가 페미니즘과 여성 권리 회복을 주장하는 현실은 겹겹의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ㆍ여성의 性的 즐거움에 대한 이해
    우리의 수업 목표인 ‘섹스를 통한 여성 행복추구권’이라는 주장 역시 난해한 논제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지속돼 온 여성성 억압과 여성 성착취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여성의 성적 행복을 도모해야만 합니다. 그 출발점은 남성 중심의 이기적 섹스 습관을 벗어던지는 데서 시작합니다. 박칼린 감독의 〈미스터 쇼〉는 작년 3월 국내에서 초연돼 ‘세상말세쇼’ ‘남성모독쇼’라는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1년간 10만 여성 관객이 공연을 봤습니다. 지난 4월 22일 도쿄의 유명 극장에서 막을 올림으로 일본 사회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국 남자 멋져요.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를 연호하는 일본 여인들은 젊은 한국 남자의 맨살과 터프하고도 강렬한 복근에 자지러졌습니다. 유리벽 너머로 마지막 ‘한 장’까지 벗는 샤워신에선 숨 넘어가는 비명으로 왁자했고, 눈앞에서 청바지가 찢겨 날아가자 여기저기서 신음과 탄성이 쏟아졌습니다. 여성 관객 여러 명을 불러 올려 무릎 꿇고 애무하듯 남성 배우들이 현란하게 춤춰대는 ‘랩댄스’에서는 부러움과 충격 섞인 폭소가 터져 나왔고요. 단정하고 지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한 박칼린 감독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여성들 로망과 욕망은 똑같더라. 여성들의 억눌려온 욕망을 분출시키고 행복감을 안겨줬다는 사실이 기쁘다. 셰익스피어는 못 돼도 섹스(sex)피어로는 최고의 공연이다”라고 했습니다. 필자가 사는 경기도의 한 도시에 최근 나타나는 변화 중 하나는 ‘호스트 바’와 ‘성인용품점’의 증가입니다. 이는 점차 개방화돼 가는 성 풍속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특히 인터넷몰과 성인용품점을 통한 여성용 자위기구의 매출액 증가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호스트 바’의 빠른 확산은 여성의 경제력 상승과 변화된 성적 가치관에 따른 성 풍속도의 첨예한 반영입니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실제 미혼의 커리어 우먼들이나 중년 부인들을 인터뷰해 보면 몇 차례씩 은밀한 장소에 들락거렸다는 증언을 의외로 많이 합니다. 상당수의 여성에게 그것은 더 이상 금기의 땅이 아닌 ‘즐거운 쾌락 욕망의 분출구’이기까지 합니다. 앞서 언급한 〈미스터 쇼〉나 방금 말한 ‘호스트 바’는 단지 공연으로 허가받은 양성적 행위인가, 내밀하게 행해지는 음성적 비밀인가의 차이일 뿐, 급변해 가는 여성 욕망 분출과 성적 권리의 표출 양상이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형성합니다. 이미 그녀들은 남성의 권위와 감시망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성적 호기심을 새로운 방식으로 쏟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예들이 건강한 범위 내에서 진정 바람직한 성적 즐거움을 탐색하기 위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접근과 사유는 정당한 도덕과 관습을 추구하는 사회 질서의 힘에 역풍을 맞을 우려가 큽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성 중심 사회 구조에서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일탈의 모습들이 똑같이 여성 반란의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지적을 통해 그동안 아무 반성 없이 당연시됐던 성적 억압과 남성들의 일탈 행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ㆍ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性的 욕망
    흔히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성욕(性欲)을 풀고자 한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엔 여성은 나이가 들면 성욕이 급격히 감퇴하고 장년이나 노년기의 여성은 아예 섹스에 무관심하다는 편견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성 또한 부신(콩팥에 위치한 내분비기관)에서 나오는 DHEA에 의해 죽을 때까지 성욕을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실제 필자가 모니터링한 바에 의하면 칠순이나 팔순의 여성분들 중에도 성생활을 즐기고, 성적 반응이 민감한 사례를 적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아내를 위해, 그 오랜 편견의 장막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성적 쾌락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1인 가구가 점차 늘고 있는 상황에서 섹스는 또 다른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2000년 당시 4인 가구의 비율은 32.1%였습니다. 3인 가구는 21.7%, 2인 가구 17%, 1인 가구 16.3%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 현재, 1인 가구 비율이 27%로 가장 높습니다. 2인 가구는 24.7%, 3인 가구는 22.7%, 4인 가구는 19.6% 순입니다. 14년 만에 역전됐습니다. 여기서 혼자 사는 노인이 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65세 이상 노인 중 남성이 12.3%인 데 반해, 여성은 무려 87.7%에 달합니다. 더구나 이제는 120세 시대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할 때 중년인 여러분은 이제부터라도 더 즐거운 성적 만족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과연 성적 만족을 주는 것이 진정 여자를 위하는 길이냐’고 반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 여성들이 섹스를 원하고, 진심 어린 애무를 받았을 때 그들이 행복해 한다는 데 답이 있습니다. ‘성적 쾌락의 추구가 여자들이 진정 원하는 기쁨인가? 인생에는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많다’라는 식의 반론을 제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돈을 많이 가지는 것이 여자들이 원하는 바인가? 인생에는 그보다 더한 가치가 많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돈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노인 복지의 핵심은 돈과 직결돼 있습니다. 섹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중년이 늘면서 행복한 삶을 위해 섹스도 중요합니다. 시대는 변했습니다. 이제는 의도적으로 숨겨왔던 여성성을 온전하게 회복시킴은 물론,성차별과 성착취가 아닌 정당한 성적 존중의 완전한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남성들은 이기적 섹스에서 벗어나 진정한 이타적 섹스로의 전환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남성 여러분! 이제 이렇게 외칩시다. “내 연인(아내)의 절대 만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겠습니다!”
    Pub. Chosun        글 김진국 《멀티를 선물하는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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