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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수식어 가장 많은… SM이 30억 들여 트레이닝, 日 휩쓴 첫 ‘K-팝’ 스타 보아

浮萍草 2015. 7. 23. 10:14
    美 빌보드 한국인 첫 127위… 후배들 진출 가교 역할
    아는‘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장 많이 가진 K-팝 가수다. J-팝이 한국으로 범람하던 시기를 지나 K-팝이 일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사례였다. ‘K-팝’이란 표현 역시 보아를 통해 보편화됐다. 보아의 행보에 우연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1998년 가수 지망생이었던 오빠를 따라 SM기획(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에 갔다가 발탁된 그는 2년 반 동안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았다. 춤과 노래보다 그가 먼저 접한 것은 외국어. 일본 활동을 위해 NHK 아나운서의 집에 머물며 일본어 발음을 익혔고 영어 회화를 위해 한국켄트외국어 학교에 진학했다. 데뷔도 하지 않은 신인 1명을 위해 당시 SM기획이 쏟아부은 투자금만 30억 원. 그렇게 보아는 현지화 전략을 염두에 두고 철저히 교육받았다. SM이 ‘엔터계의 삼성’이라 불리는 이유다.
    2000년 8월 ‘ID:Peace B’를 들고 데뷔한 보아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고난도 춤과 노래를 소화하며 관심을받았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너무 이른 데뷔와 HOT의 성공으로 일군 성과를 모두 보아에게 쏟아부었다는 소문이 돌며 안티팬도 북적였다. 이런 반응을 뒤로하고 보아는 이듬해 3월 일본 굴지의 음반 제작·유통업체인 에이벡스와 레이블 계약을 맺으며 일본 진출을 선언했다. 이후 7장의 싱글을 발표한 보아는 2002년 일본 첫 정규 앨범‘리슨 투 마이 하트’로 한국 가수 최초 오리콘 일간,주간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앨범은 100만 장 이상 판매돼 밀리언셀러 반열에도 올랐다. 보아의 명성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역수출됐다. 보아는 한국에서 두 번째 정규 앨범 ‘넘버원(No.1)’을 발표했다. 지금껏 보아의 대표곡으로 손꼽히는 이 곡이 담긴 앨범은 가요 시장이 붕괴하고 있던 시점임에도 54만 장이 팔렸다. 게다가 2002년은 한일월드컵으로 인해 모든 이슈가 증발되던 시기. 하지만 보아는 월드컵 열풍을 뚫고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여자 가수로 우뚝 서게 됐다. 이후 보아의 행보는 탄탄대로였다. 음반 시장이 여전히 활성화된 일본에서 보아의 누적 앨범 판매량은 1000만 장에 육박하고,일본 최고의 스타들만 출연한다는 연말 ‘홍백가합전’에 2002년부터 2007년 까지 6년 연속 초청받았다. 한·일 양국 가요계 정상을 밟은 보아는 미국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2009년 미국 데뷔 앨범을 발표해 발매 첫 주 8000장을 팔아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200 127위에 올랐다. 이후 미국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지만 훗날 그의 소속사 후배인 소녀시대,동방신기 등의 미국 진출을 위한 노하우를 쌓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아가 순수하게 ‘만들어진’ 가수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의 아버지는 TBC 방송사의 사운드 엔지니어였고 퇴사 후에도 음향 장비 관련 일을 했다. 두 오빠 중 큰 오빠 권순훤은 서울대 음대 졸업 후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둘째 오빠 역시 뮤직비디오 감독이다. 이미 음악적으로 남다른 유전자를 물려받은 셈이다. 여기에 노력과 끈기가 더해졌다. 여전히 보아는 아이돌 공화국인 SM엔터테인먼트에서 역대 가장 연습량이 많고 성실한 연습생으로 꼽힌다. 1998년 SM과 손잡은 이후 17년째 이곳에 몸담고 있는 것도 보아의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Munhw ☜     김구철 문화일보 문화부장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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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 “소속사에 ‘내가 곡 다 쓰겠다’ 큰소리…”
    ▲  올해 데뷔 15주년을 맞은 가수 보아는 오는 8월 아이돌 여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앞두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ㆍ아이돌 여가수 첫 세종문화회관 공연보아 인터뷰 털 사이트 네이버에서‘가수 보아’를 검색해보면 2000년 9월 6일자 기사에 그가 처음 등장한다. ‘가요계, 이젠 1316 가수 시대’라는 제목으로 어린 나이에 데뷔한 가수들을 다룬 이 기사에서 보아는“노래하고 춤추는 게 그냥 너무 좋아요, 잠 못 자는 것만 빼면”이라고 말하는,유난히 어려서 눈에 띄는 13세 소녀였다. 그때는 몰랐다. 보아가 일본에서 앨범 1000만 장을 팔며 K-팝의 물꼬를 트고, 아이돌 여가수 최초로 오는 8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게 될지. 2000년 인터뷰에서 보아는“서태지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해 자생적 아이돌의 원조 격인 서태지는 실험적 성격을 지닌 6집 ‘울트라맨이야’를 발표하며 ‘아티스트’의 영역에 다가갔고,해외시장을 겨냥한 기획형 아이돌의 선두주자인 보아는 ‘ID:Peace B’로 대중 앞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보아는 분명 ‘서태지 같은 가수’는 아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고, ‘제2의 OOO’이 아니라 ‘제1의 보아’가 됐다. ―데뷔 15년 차 가수 보아가 데뷔 연도와 비교해 가장 달라진 점은. “음악적 깊이다. 가수로서 음악을 대하며 고민이 깊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데뷔 초와 비교해 음악을 통해서 어떤 모습을 보여드릴지,어떻게 다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는 고민의 깊이나 크기만큼은 훨씬 깊고 커졌다. 아무래도 데뷔 1년 차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경험과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 아닐까.” ―‘오리콘(일본의 대표적 음악 순위 차트)의 신성’에서 ‘한국 가요계의 대들보’가 된 지금의 보아를 있게 만든 원동력은. “오리콘의 성적도 물론 중요하다. 일본 회사와 직접 계약을 맺고 현지화 전략을 구사한 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오리콘의 성적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성적 자체보다 나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기대감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들의 기대치에 닿아야 한다는 자기 다짐이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가수로서 보아는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동의하나. “쉽게 답하기 어렵다. ‘정점을 찍었다’고 말씀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완성되어버린 느낌이라 살짝 피하고 싶은 평가이기도 하다.(웃음) 어딜 가나 많은 이들이 내게 묻는다. ‘다음 목표가 뭐냐’고. 가수로서 보아의 목표는 당연히 더 좋은 음악을 들고 무대에 서는 것이다. 가수로서, 나를 찾는 이들이 있어 계속 춤추면서 노래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지난 5월 발표한 앨범은 전곡을 직접 만들었다. 이제 프로듀서 보아로 나서는 것인가. “‘키스 마이 립스’는 2년 9개월 만에 발표한 앨범이다. 공백이 길었다는 것은 그만큼 앨범 준비 기간이 길었고,고민이 깊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총 12곡이 담겼는데 전곡의 작사, 작곡, 프로듀싱에 참여했다. 그만큼 나의 의도와 색깔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스무 곡 정도를 쉬지 않고 썼고 그중 12곡을 골랐다. 마음에 들 때까지 고르고 또 녹음했다. ‘키스 마이 립스’의 믹싱만 26번 정도 했다.” ―전곡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하게 됐나. “솔직히 말해서, 나도 ‘전곡을 쓰겠다’고 해놓고 후회했다. 지난해 4월쯤 회의를 했는데 ‘저 내년에 앨범 낼게요’라고 하고 ‘곡을 한번 다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그걸 잊지 않고 압박을 주더라.(웃음) 집에서 이불을 차면서 ‘내가 왜 그랬지’라고 자책했다. 결론적으로는 정말 힘들고 큰 도전이었지만 매 순간 재미있었고 뿌듯했다. 이제는 가수뿐만 아니라 작곡가, 편곡자 등 프로듀서들의 마음도 헤아리게 돼 앞으로 음악 활동에 큰 자양분이 될 것 같다.”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오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녀’가 이제 ‘숙녀’가 된 것인가. “사실 데뷔 후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단 한 번도 치마를 입은 적이 없다. ‘배기바지’(통이 넉넉하지만 발목 부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바지)를 버리고 치마를 입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하이힐도 굉장히 신고 싶었다. 외형적으로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려 해도,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가 있어야 자연스럽게 퍼포먼스를 녹일 수 있지 않나. 여성스러운 의상을 입기 위해 일부러 몽환적인 노래도 만들었다.” ―올해는 20대 보아를 마치고, 30대 보아를 시작하는 변곡점이다. 보아의 30대는 어떨까. “길진 않았지만 인생의 반을 가수로 살아왔다. 그래서 남들이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지만, 가수로서 남들이 알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며 살았다. 이런 경험이 30대 보아의 삶을 만들어가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더 많은 일을 해보고 싶다.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후배 양성에 도전해보고 싶다.” ―SM엔터테인먼트에는 쟁쟁한 후배 가수들이 많다. 이 중 직접 프로듀싱 해보고 싶은 가수는 누구인가. “회사 후배들은 다들 개성이 뚜렷해서 내가 프로듀싱하기 부담스럽다. 회사에서는 신인인 SM루키즈의 곡을 써달라고 했다. 그들의 콘셉트에 맞춘 곡을 만들어주려 한다. 무대에 선 가수가 자신의 끼를 마음껏 뽐낼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프로듀서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현역 가수로서 그런 부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좋은 프로듀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해 KBS 드라마 ‘연애를 부탁해’와 영화 ‘빅매치’에서는 연기하는 보아를 만날 수 있었다. 연기 활동은 계속 병행할 계획인가. “언제든 환영이다. 좋은 배역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배우로서의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다. 배우로서는 아직 ‘신인’이기 때문에 아마도 앨범을 준비할 때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긴장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일본 시장이 위축되며 한류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원조 한류스타로서 보아가 바라보는 한류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을 말해달라. “한류의 영향력이 줄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외시장을 공략하던 초창기와 비교해 오히려 더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해외 진출이 이뤄지고 있다. 워낙 많은 스타들이 함께 활동하며 한류를 키워나가고 있기 때문에 특정 그룹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 좋은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홍보성으로 단순히 ‘해외 진출’을 외치거나, 돈을 벌 목적을 앞세워 해외시장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국가와 인종이 달라도 결국 문화는 ‘교감의 산물’이다. 함께 공유하고 즐긴다는 의미다. 국경선을 허물고 사람과 사람이 교감할 수 있는 한류 콘텐츠가 꾸준히 공급된다면 한류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끝으로 아이돌 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게 됐다. 소감을 말해달라. “가수로서 의미 있는 무대에 선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서기 어려운 무대에 설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대관을 승낙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무대를 꾸미기 위한 고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15년 차 가수 보아에 대한 대중의 기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대 역시 배신하면 안 된다. 지금껏 준비해왔던 모든 공연과 마찬가지로 부끄럽지 않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챙기며 준비하고 있다. 평가는 공연 당일 나를 보러 와주신 분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Munhw ☜     안진용 문화일보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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