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He 스토리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의 '軍생활'

浮萍草 2015. 2. 25. 10:44
    "내 인생 최고의 이력? 20代 중반의 陸軍 복무죠"
    軍복무, 인생에 도움되는 디딤돌 졸병 생활, 밑바닥부터 시작… 좌절 겪을 땐 그 시절이 떠올라 軍복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임했으면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군 생활 34개월 동안 보안사
    ·수도군단 등 일곱 부대를 거치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밑거름을 얻었다”며“지금도 힘들 때면 군 시절을 떠
    올리며 ‘이까짓 것쯤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잡곤
    한다”고 말했다.은행회관 집무실에서. /김지호 기자
    는 바퀴 18개 달린 초대형 트레일러를 한 번에 후진 주차할 수 있다. 근 40년 전 수도군단 수송부 운전병 하영구가 갈고닦은 기술이다. 그 시절 군대는 훈련도 힘들었지만'얼차려'라고 불렸던 가혹 행위와 구타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거의 매일 '엎드려뻗쳐'를 하고 고무 호스로 엉덩이를 맞았다. 대형 트럭에 주유할 때 쓰는 지름 20㎝짜리 굵은 호스였다. 한번 맞으면 엉덩이와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어느 날 밤에는 침상에서 자고 있는데 얼굴에 뭔가 뜨거운 게 쏟아져 잠이 깼다. 술 마시고 들어온 고참이 침상에 누운 내 얼굴에 대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지금 군대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땐 참아야 했고 "남자답게 버티는 거다"며 이겨냈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운전병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통신 장비를 싣고 다니는 트럭을 주로 운전했는데 산과 들 안 가본 데가 없었다. 버스까지 온갖 차량을 다 몰아봤다. 수송부에 배치될 때까지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넷에 군에 입대했다. 뒤늦은 입대였다. 주변에서 장교에 지원하라고 했지만 난 '짧고 굵게 군 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는 네댓 살 어린 동기들과 훈련을 받았다. 무릎이 안 좋아 신체검사에서 2급 판정을 받았던 터라 훈련을 따라가기가 고역이었다. 훈련을 마친 뒤 부대 배치를 받았는데 무려 일곱 부대를 거쳤다. 행정병으로 출발해 운전병,통신병,통역병 등을 거치면서 34개월 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나와 처음 보안사령부에 배치됐다. 행정병으로 번역 일을 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 취급 인가증 발급을 거부당해 다른 부대로 옮겨야 했다. 학생운동이 문제 된 것 같았다. 보안교육대와 103보충대를 거쳐 서울 문래동의 수도군단에 재배치됐다. 군단 사령부에서도 비밀 취급 인가증이 없으면 웬만한 보직은 얻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수송부 운전병으로 배치됐다. 1977년 봄 경기도 김포 청룡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주한 미군 병장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일부 미군 병사가 부대 한편에 몰래 대마초를 키우고 있었는데 한국군 병사들이 일부러 제초 작업을 핑계로 대마초를 모조리 뽑아버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것 이다. 당시 해병 청룡부대에서는 육군과 주한 미군이 합류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전년도인 1976년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데프콘(전투 준비 태세) 3단계가 발령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육군 통신 차량 수송병으로 복무하다가 청룡부대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병사들 가운데 영어를 잘하는 편이어서 통역 역할도 했다. 대마초 사건이 난 그날 우리 쪽 병사들은 "잡초를 제거했는데 왜 시비냐"며 맞섰다. 양국 병사들은 육탄전 직전까지 갔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는 영어 좀 한다는 죄(?)로 해병대와 미군 사이에 끼어서 싸움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하영구(오른쪽) 은행연합회장이 1977년 운전병으로
    군 복무하던 시절 동료와 함께 수송 차량 앞에서 웃고
    있다.
    제대한 후 나는 힘들 때마다 군 복무 시절을 떠올린다. 그러곤 늘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마음으로 버티곤 했다. 외국 생활에서도 군 경험은 큰 도움이 됐다. 미국 대학 MBA에 지원할 때 청룡부대에서 미군과 함께 근무한 얘기를 지원서에 썼더니 면접관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정말 북한군을 봤느냐"며 큰 관심을 보였다. 외국계 은행에 입사해보니 미국 조직은 군 복무를 한 사람이 우대받는 분위기였다. 미군 출신 임원들과는 군대 얘기를 하며 친해졌다. 2001년 내가 20년 근무한 씨티은행을 떠나 한미은행장으로 갈 때 스티븐 롱 씨티은행 아시아본부장이 섭섭 하다며 나를 홍콩 사무실로 불렀다. 미 해병대 출신인 그에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구호를 떠올리며"한번 씨티는 영원한 씨티"라고 말하면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2004년 씨티가 한미은행을 인수한 뒤 내가 한국씨티은행장이 될 때 나를 적극 밀어준 사람이 바로 롱 본부장 이었다. 내 이력서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서울대를 나와 외국계 은행을 다녔고 은행장 재직 기간만 14년이나 되는 출세한 직장인의 전형적인 모습만 담겨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경험은 20대 중반의 군 복무 시절이다. 졸병 생활의 고생 고참이 돼서 후임병들을 이끌었던 경험은 사회 생활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도 좌절을 겪을 때면 군 시절을 상기하며 '이까짓 것쯤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많은 사람이 군대를 공백 기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녀와 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군 복무는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훌륭한 디딤돌이다. 아들이 있다면 내 군 생활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난 딸만 셋이라 이런 말을 아직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 군대는 평생 먹을 수 있는 보약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장병이 될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군 복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말이다. 하영구 회장은 누구인가?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직업이 은행장"이란 얘기를 들을 정도로 오랜 기간 은행장을 역임한 정통 '뱅커'다. 지난해 12월 은행연합회장에 취임하기 직전까지 14년간 은행장이었다.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은행장으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2001년 한미은행장에 취임해 국내 금융권 처음으로 40대 은행장 시대를 열었다. 2004년 씨티은행이 한미은행을 인수할 당시 통합 한국씨티은행장에 선임됐다. 1981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 입행해 자금부 수석딜러,자금 담당 총괄이사,투자금융그룹 대표,기업금융그룹 대표 및 아시아·라틴아메리카 지역본부 임원,소비자금융 그룹 대표를 지냈다. 1953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경기고 서울대 상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Premium Chosun ☜      박승혁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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