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4] 구로공단과 '공순이 누나' 고선미

浮萍草 2015. 5. 22. 15:00
    열일곱부터 실밥 뜯던 나… 大韓民國 수출은 우리 '공순이' 몫이었다
    중학교도 못나온 어린 소녀들, 작업대서 키가 자라고 생리도 시작 "오빠 대학 보내고 약값 벌어야 해" 그땐 그런 희생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힘든데 월급이 너무 적구나… 뭐가 잘못됐는지 모른 채 일만 해… 변신한 구로 IT단지 놀러가면 말한다 "아들아, 엄마 여기 공순이였어"<
    ㆍ서울 가던 날 "집 구하고 돈 좀 쌓이면 너랑 동생도 부를게.” 엄마는 짐 보따리를 지고서 열차에 올랐다. 1979년 여름이었다. 열여섯 살 된 소녀 고선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울 가면 공부 열심히 해서 외국 여행 하면서 살아야지.’ 예쁘장한 선미는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다. 나이 비슷한 막내 이모, 외사촌 언니와 함께 미스코리아를 흉내 내며 놀던 소녀였다. 동네 언니한테서 옷 만드는 기술도 배우던 차에 서울로 간다니, 이 시골 소녀는 이미 태평양과 대서양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선미는 충남 조치원에 살았다. 아버지·엄마,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열차 상인에게 계란이며 오징어를 대주던 아버지 덕에 유복하진 않아도 남부러울 일 없이 살았다. 책보자기 대신에 책가방도 있었고 레이스 달린 자주색 원피스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하늘로 갔다. 선미네는 가난 구덩이에 빠졌다. 돈 벌러 간 엄마는 이듬해 선미와 남동생을 서울로 불렀다. 엄마는 구로공단의 의류 공장 대우어패럴 구내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엄마는 남매를 가리봉오거리에 있는 집으로 데려갔다. 현관 뒤로 부엌이 나왔다. 연탄가스 냄새가 났다. 아궁이 위 미닫이문을 여니 방이 있었다. 한 사람 눕기 딱 좋았다. "…." 말이 없는 선미에게 엄마가 말했다. "내일 따라오너라." 며칠 뒤 선미는 엄마가 일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의상 기술을 보더니 공장 사람은 선미를 완성반으로 보냈다. 완성된 옷에 단추를 달고 마무리를 하는 팀이었다. 천을 다리고 실밥을 솎아내 미싱사들에게 넘기는 '시다'보다는 편했다. 완성된 옷을 상자에 담을 때마다 스튜어디스가 되겠다는 꿈도 꾸깃꾸깃 구겨서 집어넣었다. 선미는 '공순이'였다
    ㆍ구로공단, 기적의 시작
    바닥이 없는 구덩이를 무저갱(無底坑)이라고 한다. 그 끝은 지옥이다.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무저갱이었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남아돌았다. 아니, 일자리가 부족했다. 해마다 ' 을축년 홍수'를 들먹여야 할 정도로 대홍수가 몰아닥쳤다. 홍수에 흉년까지 겹친 농촌 사람들은 무작정 도시로 올라왔다. 농촌은 비어갔고 도시에는 가난이 가득했다.
    1973년 7월 21일 구로공단 퇴근길 풍경이다. 앳된 소녀들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걸음을 옮긴다.그 누구도 사진기자를 눈여겨볼 여유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 공순이 누나들은 그렇게 살았다.

    먹고살 길은 수출뿐이었다. 가진 것은 노동력밖에 없었다. 1964년 5월 20일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 공단을 열었다. 청계천에서 이주한 판자촌과 야산, 그리고 미8군 탄약 창고 터였던 벌판에 섬유와 봉제,전기 제품 같은 노동 집약적인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1967년 구로공단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그해 3억2000만달러였던 대한민국 수출액은 10년 뒤인 1977년 100억달러가 됐다. 수출 품목 1~3등은 섬유·의류·봉제, 전기·전자조립, 가발과 잡화였다. 1970년대 구로공단 주력 업종들이다. 1971년 대한민국이 수출한 10억달러어치 상품 가운데 1억달러가 구로공단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5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 발전은 구로공단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기적 뒤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근로자도 노동자도 아닌, 그냥 공순이라고 하는 여자들이었다.
    ㆍ벌집, 그리고 긴 머리 소녀들
    수출액이 늘수록 여공들의 삶은 고단해져갔다. 근로자 절대다수가 어린 여자였다.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아이가 많았다. 많은 여자아이가 공단에서 생리를 시작했고 작업대 앞에서 키가 자랐다. 아이들은 주·야간 교대 근무자 서너 명이 월급을 쪼개서 벌집에 세 들어 살았다. 벌집은 겉은 단독주택인데 들어가 보면 복도 양편으로 부엌 딸린 단칸방 수십 개가 붙어 있는 집단 자취 집이다. 여자들은 비키니 옷장, 경대와 앉은뱅이 상을 함께 썼다. 화장실은 수십 명이 같이 썼다. 한집이지만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어쩌다 만나는 날이면 아이들은 함께 라보때를 먹었다. '라면으로 보통 때운다'는 뜻이었다. 1973년 추석을 앞두고 벌집에 살던 세 자매가 죽었다. 미닫이문 틈으로 부엌 연탄가스가 스며든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올라와 전기 제품 공장과 완구 공장에서 일한 지 1년 된 여자들이었다. 열일곱, 열아홉, 스무 살 된 꽃들이 허망하게 졌다. 1975년 포크 듀엣 둘다섯이 '긴 머리 소녀'를 히트시켰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중략) 개울 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 눈 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그해 대한민국 주부와 여대생과 여공들은 너나없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길렀다. 많은 사람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윤 초시네 증손녀를 떠올렸고 가족을 위해 공단으로 떠나는 시골 소녀들을 떠올렸다. 이 노래 가사는 서울 명동에 있던 음악주점 태평양에서 멤버 오세복이 지은 곡에 희극배우 손철이 즉석에서 썼다. 시인이요 화가이기도 한 손철은 충남 청양 칠갑산자락 마을 풍경을 떠올리며 가사를 썼다. 둘다섯은 구로공단을 자주 찾아와 공연을 했다. 마지막 곡으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무대 아래에는 깊은 울음바다가 열렸다.
    ㆍ타이밍으로 버틴 철야
    선미는 사정이 나았다. 엄마가 있었고 동생이 있었으니까. 낮에는 공순이지만 밤에는 야간고 학생이었으니까. 아침 8시에 출근하면 조회를 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줄지어 서서 사가(社歌)를 합창하고 국민체조를 했다. 사가는 '우리는 대서양을 건너서~'로 시작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나라에서는 수출 역군(役軍)이라고 했고, 아침마다 대서양을 건너는 일을 한다고 하니 선미는 자기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쭐했다.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교를 다녔다. 선미가 치마와 블라우스 두 벌씩과 구두 두 켤레로 사는 동안 남동생은 교복을 입고 청바지를 입었고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었다. 가끔 선미는 생각했다. '왜 나는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할까.' 하지만 남동생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다. 한 집의 기둥인 남자아이는 공부를 해야 하고, 계집아이는 그 남자를 지원해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본봉이며 잔업수당이 깨알같이 적힌 노란 월급봉투는 뜯지도 않고 엄마한테 줬다. '힘든데, 월급이 참 적다'고 느꼈지만 이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받았으니까. "너는 어디서 왔니?" 어느 날 새로 온 어린 동료에게 물었다. "정읍." 얘도 쟤도, 건너편 아이도 대답이 똑같았다. 고향도 똑같고 나이도 똑같고 입사일도 같았다. 아이들은"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한꺼번에 버스를 타고 왔다고 했다. 꿈도 똑같았다. "우리 오빠 대학 보내고 우리 아버지 약값 벌려고." 그 아이들 눈동자에서도 '내 희생 하나로' 같은 비장함은 보이지 않았다. 희생은 그저, 당연했다. 그래서 그 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눈물을 찍다가 '나도 그랬잖아?' 하고 웃는다.
    구로공단의 과거와 현재. 위 사진은 1967년 4월 1일 구로공단 준공식 풍경, 아래는 21세기를 맞아 변신한 구로디지털단지 야경이다. /박종인 기자

    가끔 야근을 마치면 가오리로 놀러 다녔다. 가오리는 가리봉오거리를 줄인 말이다. 가오리에는 쫄면집도 있었고 디스코텍도 있었고 음악다방도 있었다. 500원이면 커피 한 잔에 좋아하는 팝송을 신청해 들을 수 있었다. "다음 곡은 가리봉동에서 오신 고선미양이 신청한 노래입니다." 음악다방에서만큼은 공순이가 아니었다. 고선미였다. 아이들은 여대생 흉내를 냈다. 책을 매는 책 밴드에 두꺼운 책을 묶어 들고 다녔다. 높은 구두를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서 이대 앞과 여의도광장을 걸어 다녔다. 가끔씩 남자 대학생들이 와서 말을 걸었다. "우리 만날래요?" 아이들은 도망치듯 벌집으로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묻곤 했다. 지금도 공단 출신들은 공부에 한이 맺혀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체력이었다. 철야를 하고 잔업을 해내야 했다. 실을 만드는 방적 공장에서는 면접시험이 달리기였다. 기다란 방적기 수십 대 사이를 뛰어다니며 실을 고르는 체력이 필요했다. 철야에 지친 여공은 '타이밍'을 먹었다. 타이밍은 카페인이 가득 든 각성제였다. 여공들은 멍한 정신 상태로 날밤을 새고 집으로 돌아갔다. 졸다가 미싱 바늘에 손톱 사이를 찔리고 다림질 기계 사이로 손을 납작하게 눌린 사람도 많았다.
    ㆍ선명한 기억들
    공단 가로등은 희미했다. 선미의 삶도 희미했다. 정읍에서 온 계집아이들도 어두웠다. 저임금을 기반으로 노동 집약형 상품을 저가(低價)로 수출해 달러를 벌던 시대였다. 근본은 저임금이었으니, 수출 역군들은 저임금을 감내하며 작업을 했다. 돈을 벌어도 고향집에 보내고 적금을 붓고 나면 쫄면 하나 사 먹기도 버거웠다. 도대체 돈은 어디로 간 걸까.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나이도 어린 아이들이었다. 뭐가 잘못됐는지도 잘 몰랐다. 퇴근할 때면 좁은 수위실에서 온몸을 '센타 까이며(수색당하며)' 공장 물품 도둑으로 몰려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일했다. 그러다 1985년 마침내 닥칠 게 닥쳤다. 공단에 있는 근로자들이 일제히 파업을 한 것이다. '구로공단 동맹파업'이었다. "선미야, 노조가 생기면 월급이 올라." 1984년 어느 날 이웃 공장에 다니던 아는 언니가 말했다. 자기네 공장에서는 노조원들이 관리직에게 더 이상 굽신거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월급이 오른다고? 그해 선미가 다니던 대우어패럴에 노조가 설립됐다. 선미도 가입했다. 공단에 노조가 속속 설립됐다. 30년 동안 저임금 저가 제품에 익숙하던 공단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엇갈린 현실 인식과 불만은 결국 1985년 6월 전체 구로공단의 연대 파업으로 이어졌다. 공단과 대한민국은 오래도록 후유증을 앓았다. 어떤 이는 이를 '과격한 폭력 투쟁'이라고 불렀고, 어떤 이는 '산업화의 기적과 함께 구로공단이 민주화의 기적을 이룬 사건'이라고 불렀다. 선미는 지금도 기억한다. 어둠 속에 갇혀서 각목으로 맞아 입원했던 병실, "똑바로 자백하지 않으면 엄마까지 구속한다"던 덩치 큰 형사,"너 때문에 나까지 잘렸으니 뭘 먹고사느냐"며 화를 내던 엄마 얼굴까지. 첫 월급도 첫 출근도 새카맣게 잊었지만 너무나도 날카로운 그 기억들.
    ㆍ결혼, 그리고 구로디지털단지
    해고당한 선미는 하도급 업체를 전전했다. 조합원 이력서로 대기업 취직은 불가능했다. 그러다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착하고 믿음직한 공장 동료였다. 1994년까지 공장을 떠돌다 미싱을 들여다 놓고 공장을 차렸다. 미싱사와 시다가 퇴근하면 남편이랑 둘이서 잔업을 했다. 두 아들은 작업판 위에 재우며 일했다. 못 배운 게 서러워서 회초리로 손바닥 때리며 가르쳐 아이들을 대학 보내고 대학원도 보냈다. 집도 샀다. 그러다 IMF 외환 위기를 만나서 공장을 들어먹었다. 지금은 화장품 방문 판매사다. 구로공단 봉제 공장들은 저임금을 찾아 동남아로 떠났다. 21세기 대한민국이 그러하듯 구로공단은 첨단 IT 단지로 변신했다. 가오리는 디지털단지오거리로 개명됐다. 다니던 공장은 아웃렛으로 변했다. 선미네 가족은 거기에서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한다. 가끔 어른이 된 아들들에게 말한다. "나, 여기 공순이였어." 고객이 된 공단 사모님들에게도 말한다. 여공들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사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쉰두 살이 된 선미는 경기도 광명시에 산다. 소녀 가장, 처녀 가장으로 살았던 구로공단까지 전철역 하나 거리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앞에 선 고선미. /박종인 기자

    ㆍ고선미가 말합니다
    엄마한테 원망을 했더랬습니다. '그때 나는 미성년자였는데 감당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 내가 그래서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민망해서 한 소리라는 거 잘 압니다. 당신도 고생만 하다 늙었으니까요. 더 배우지 못한 거 후회가 됩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서러워서 아이들한테 모질게 굴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한테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배우지 못해서 너희를 이렇게밖에 못 길러 미안하다'고요. 아들들이 효잡니다. '조금도 서운한 적 없었으니 전혀 그러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평생 가지고 있던 짐을 벗었습니다. 행복과 거리가 멀었는데 지금은 행복합니다.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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