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2] 소년 구자관과 청계천 [下]

浮萍草 2015. 5. 16. 08:00
    멀건 수제비 씹으며 빌딩 변기부터 닦았다… 밑바닥 人生이 움텄다
    발버둥친 청춘의 나날들 美軍왁스 쓰다 세관 끌려가고 직접 왁스 만들다 폭발 火傷 유서쓰고 잠수교 돌진도 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통밀가루 수제비 건더기 모두 주고 소금국물만 드셔… 그러니 혈압 오죽하셨을까 일흔한 살 지금 눈물이 난다

    논픽션 스토리'大韓國人,우리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45년 광복부터 2015년 현재까지 우리들은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고, 역사의 회오리 속을 헤쳐 나오기도 했습니다. 격동의 세월 70년을 지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계집아이 하나가 토굴에 앉아 사진기자를 바라보았다.첫눈 내린 다음날인 1963년 11월 11일,다른 곳도 아닌 대한민국 수도 서울 남산에서 찍은 사진이다.그 날
    조선일보는 “남대문에서 남산공원으로 오르다 보면 토관이 즐비하게 누워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DB

    1963년 11월에 열린 앙드레김의 세 번째
    패션쇼
    1963년 11월 30일 구파발에서 온 남자가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피부가 하얀 이 스물여덟 먹은 사내는"스포티한 디자인보다는‘에레간트’한 선을 더 아낀다"고 했다. '웨스터나이즈 되어 있어 귀에 거슬리는'말씨와 억양을 가진 사내 이름은 앙드레김이라고 했다. 본명은 김성진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스타가 되고 싶다"는 염원이 담긴 청일점(靑一點) 디자이너 김봉남의 예명 (藝名)임이 밝혀졌다. 패션쇼가 열리던 날은 무척 추웠다. 벌써 20일 전 오후 3시 10분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예년보다 열하루가 빠른 첫눈에다 기온도 8.3도나 낮은 영상 2.8도였다. 12분 동안 떨어진 눈에 아이들은 즐거워 했지만 어른들에겐 불길한 강설(降雪)이었다. '철갑을 두른 듯한 낙락장송'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남산의 버려진 하수도관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그랬다. "머라꼬, 이것들이!" 1962년 11월 1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부산직할시 승격안이 부결됐다. 12대 시장 김현옥은 야간열차로 서울로 달려왔다. 5·16에 참가한 육군 제3항만사령관이요 서른여섯 살 된 패기만만한 장군 앞에서 최고회의는 쩔쩔맸다. 이듬해 부산은 직할시로 승격됐다. 앙드레김이 화려하게 각광받던 그해 김현옥은 예편과 함께 13대 시장에 취임했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 소설가 박경리와 이야기 중이다.

    부산은 이면 도로 하나 없고 항구는 큰 배는 붙일 수 없이 들쑥날쑥했다. 김현옥 시장은 이 전시(戰時) 수도를 개조했다. 팔도 피란민이 뒤엉켜 살던 판자촌을 갈아엎고 서민 주택 구역을 만들었다. 부두는 직선화하고 도로도 확장했다. 군인답고 수송 병과 출신다웠다. 구자관이 강원도 원통에서 빡빡 기고 있던 1966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났다. 보릿고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해 3월 초 대통령 박정희가 확 바뀐 부산을 찾았다. 한 달 만에 서울시장이 경질되고 불도저가 입경(入京)했다. 불도저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서울이 온통 판잣집이다. 14만5000채다. 교통도 문제다. 교통난을 광복절까지 31% 완화하도록 하겠다." 서울공화국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독립문과 마포,동쪽으로는 돈암동과 청량리와 왕십리까지였다. 도로는 거기에서 끝났다. 광화문에서 국경을 넘어 갈현동까지 지프차로 반나절이 걸렸다. 전차(電車)는 시속 20㎞로 기어다녔다. 그 좁은 영토에 자동차가 2만대를 넘었고 버스만 3000대에 육박했다. 농촌 사람들이 몰려든 서울에는 350만명이 살았다. 6·25전쟁 때의 두 배가 넘었다. 청계천변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판잣집은 헐어도 헐어도 도깨비처럼 또 생겨났다. 많은 여자가 무작정 상경해 종묘 앞 공터 사창굴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종삼(鐘三)'이라 불렀다. 소설가 이호철이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다. 제목은 '서울은 만원이다'였다. 김현옥의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아들 자관이 군대 간 사이 아버지는 미아리에 청소 솔 공장을 차렸다. 군에서 제대한 자관은 여전히 청소 도구를 만들며 생계를 꾸렸다. 청계천 복개 구간은 광교에서 오간수교를 건너 동쪽으로 급속하게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개천이 사라진 곳에는 도로와 점포가 생겨났다. 자관에게는 청소할 곳이 많아졌다는 뜻이었고 불도저에게는 도로를 놓을 공간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자관은 아예 청소 회사를 차리고 식당과 빌딩 청소에 뛰어들었다. 1968년이었다.
    1969년 삼일고가도로가 개통됐다.개미마을은 사라졌다.
    불도저는 아현동에 고가도로를 만든 뒤 관철동에 31층짜리 빌딩을 짓고 광교에서 마장동까지 고가도로를 세웠다. 3·1빌딩과 3·1고가도로였다. 3·1은 일제 청산과 근대화를 상징했다. 고가도로는 1969년 3월 22일 개통됐다. 17개월 만에 완공된 이 도로를 불신한 미군이 이용 금지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개미마을의 잿빛 영토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철거된 개미마을 사람들은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세종로와 명동 지하도 남대문시장 육교,홍제동 도로 확장 공사는 4월 19일 착공해 10월 3일 개천절에 끝냈다. 육교는 짓기 쉽다고 광복절에 끝냈다. 지하도 6개,육교 16개와 도로 5개의 건설 공사가 한날한시에 시작됐고 거의 동시에 끝났다. 공사판이 돼버린 서울을 두고 불만이 쏟아졌다. 김현옥이 말했다. "나는 모른다. 대통령한테 물어봐라." 아무도 묻지 않았다. 164일 만에 길이 154m,높이 2.66m짜리 세종로 지하도가 완공됐다.
    공약보다 사흘 이른 9월 30일이었다. 배우 김희갑과 최은희가 상량(上樑)을 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었다. 이튿날 국군의날 퍼레이드가 그 위를 지나갔다. 물론 이후 수없이 땜질을 해대야 했지만. 종묘에서 필동까지 개미마을이 사라진 공터에는 세운상가가 올라갔다. 공사가 한창이던 1968년 9월 26일 오후였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골목에서 걸어오더니 현장 점검을 나온 김현옥을 붙들었다. "아저씨, 놀다 가요." 다음 날 공무원과 사복 경찰들이 남자란 남자는 죄다 불러 세우고 검문을 해댔다. 직업이 뭐고 주소는 어디며 왜 왔고 몇 번째냐고. 명단 발표가 열흘을 가자 종삼은 사라졌다. 창녀 853명과 포주 111명, '삐끼' 170명이 종적을 감췄다. 사람들은 "역시 불도저"라고 했다. 두 달 뒤인 11월 30일 전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종 황제 시절인 1899년 5월 17일 처음 종을 울린 지 69년 6개월 13일 만이었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사람들은 더러운 일은 남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아웃소싱, 1960년대 말로는 미화 용역이었다. 구자관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월 6푼짜리 달러빚을 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윤보다 이자가 더 많았다. 물건은 팔면 팔수록 손해였다. 몸을 쓰는 청소 일이 오히려 나았다. 만든 걸레는 아버지가 나가서 팔고 자관은 아줌마들을 고용해 식당 변소와 빌딩 복도를 청소하고 다녔다. 자관은 일하는 곳마다 귀신처럼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면서 변기를 닦았다. 자관이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수제비를 밥상에 올리곤 했다. 통밀가루로 만들고 멸치 몇 마리로 육수를 낸 멀건 수제비에 건더기도 별로 없었다. 자관은 자기 수제비를 다 건져 먹고 옆에 있는 어머니 수제비도 건져 먹었다. 어머니는 국물로 배를 채웠다. 수제비가 떨어지면 어머니는 별미로 인기였던 라면을 끓였다. "왜 또 국물을 드세요?" "수프가 닭고기라잖니 소고기 대신에 이거라도."
    행상으로 가족을 지탱한 우리들의 어머니
    무학(無學)이지만 어깨너머로 글을 배운 여자였다. 한자투성이 신문을 읽을 줄 알았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줄 아는 어머니였다. 노름판에서 돌아온 남편 밥그릇에 밥 대신 화투짝을 넣어 투전판 출입을 끊게 만든 지혜로운 아내였다. 투덜대는 아들에게 건더기를 다 주고 짜디짠 국물로 속을 채우는 현명한 어머니였다. 어느 날 철없는 아들이 집에 와 보니 그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고혈압에 반신불수였다. 노름을 끊고 아내를 간호하던 남편은 1970년 먼저 하늘로 갔다. 어머니는 그해 부엌에서 아들 밥상을 차리다 넘어져 허벅지가 부러졌다. 며칠 뒤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네 공장 아이가 의자를 만들어줘서 변소만큼은 다리 억지로 구부리지 않아도 갈 수 있구나. 고맙다." 어느 비 내리던 밤,자관은 그릇이란 그릇은 다 꺼내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며 멍하게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다리도 구부리지 못하고 낙숫물 틈에서 겨우 몸을 가누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날 밤 이후 자관은 베개에 머리를 뉘며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제발 해가 뜨지 않게 해주세요." 197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그제야 알았다. '소금물만 평생 드신 분이니 뼈는 오죽 약하며 혈압은 오죽 높았을까. 우리 어머니는 내가 죽였다.' 자관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서 홍수가 난다. 그다음 날부터 자관은 함께 일하는 청소부 아줌마를 여사님이라 불렀다. 아저씨들은 선생님이라 불렀다. 밖에서는 천대받지만 집에 가면 모두가 거룩한 어머니고 아버지가 아닌가. 1968년 초 북한에서 김신조 부대가 내려왔다. 가을에는 울진에 무장 공비 떼가 침입했다. 이듬해 대한민국 정부의 구호가 살벌하게 바뀌었다.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 시장 김현옥은 서울을 요새(要塞)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북악스카이웨이 건설로 북쪽은 철통같이 막혔다. 서울 국경은 남쪽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청소 일감도 덩달아 늘어갔다. 어머니가 낙상(落傷)하던 그해,와우 아파트가 무너졌다. 무한질주하던 김현옥은 시장에서 물러났다. 시장 집무실 벽에는 숱한 준공 테이프를 끊은 가위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김현옥은 부산 기장에 있는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떴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29주년 광복절이었다. 기념식이 열리던 남산 국립극장에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가 재일 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았다. 대통령 박정희는 잠시 중단된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갔다. 며칠 동안 라디오에서는 조곡(弔曲)이 흘렀다.
    1974년 광복절,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서거했다.
    구자관은 가정을 꾸렸다. 두 살 어린 박덕희와 결혼해 아들 본훈이와 딸 본아를 낳았다. 미아리 집이 헐리고 가족은 변경을 떠돌았다. 집세를 감당 못하는 가장(家長)을 보고 복덕방 영감님들은 며칠이라도 살라며 빈집을 소개해줬다. 메아리가 울리는 대저택에서 판잣집 단칸방까지 1년에 일곱 번 이사를 했다. 아들 본훈이는 미아리 너머 누나 집에 맡겼고 젖먹이 본아는 이모네에 맡겼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또 한 번 오래도록 조곡이 울려 퍼졌다. 세상이 뒤집혔다. 12월 12일과 이듬해 5월 17일 연이은 충격에 세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관의 밑바닥 인생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 많은 청소 업체는 미군 부대에서 업자들이 빼돌린 군용(軍用) 왁스를 사서 청소했다. 세관이 군수품을 빼돌린 업자들을 족쳤다. 자관은 장물아비로 몰려 서부역 옆에 있는 서울세관으로 끌려갔다. 사흘을 온몸이 시커메지도록 두드려 맞고 벌금 40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자관은 이를 갈았다.
    "다 덤벼라. 하나도 안 무섭다." 자관은 왁스 공장을 차리고 바닥 청소용 왁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장마가 시작됐다. 자관은 왁스 재료를 끓이고 솔벤트를 부었다. 궂은 날이라 솔벤트 가스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연탄아궁이에 닿은 가스가 폭발했다. 눈을 떠 보니 명동에 있는 백병원 12층 병실이었다. 손가락과 팔은 달라붙고 온몸이 녹아 있었다. 사흘에 한 번씩 간호사는 자관을 목욕탕에 데려가 수세미로 상처를 박박 밀어 벗겨냈다. 너무 아파서 죽고 싶었다. 의사한테 물었다. " 퇴원하면 손가락이 펴지기는 하나요?" "지켜봐야죠." '병신이 된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관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갔다. 침대 아래 물통들이 요란하게 굴렀다. 의사들은 아내 덕희에게"왜 환자를 팽개치고 나갔느냐"고 화를 냈다. 한 달 뒤 자관은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끌고 퇴원했다. 공장은 불타고 빚쟁이들이 휩쓸고 간 사무실은 다 뒤집혀 있었다. 장부를 보니 빚만 8000만원이 남아 있었다. 거지였다. "수남아, 보험 좀 들자. 실적 올려줄게." 보험소장을 하고 있던 고등학교 동창 이수남은 신이 나서 첫회 차(次)를 자기 돈으로 내줬다. 사망 보험금은 1억2500만원. 자관은 치밀했다. '빚이 8000만원,옷 행상 하는 마누라가 평화시장에 가게를 얻는 데 2000만원,서른 평짜리 아파트가 2500만원.1억2500만원이면 먹고는 살겠다.' 자관은 유서를 썼다. "이 구덩이에서 꺼내주십시오. 푸른 초원 위를 달리지는 못해도 걷게라도 해주십시오. 제발 숨을 좀 쉬게 해 주십시오."
    1976년 한강 잠수교가 개통됐다. 절망한 구자관은
    이 다리로 차를 몰았다.
    자관은 빨간 포니 픽업을 몰고 장충동으로 갔다. 족발집에서 낮술을 퍼마시고 잠수교로 달려가 교각을 들이받았다. 차는 박살이 났고 자관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으로 튕겨져나갔다. 또 죽지 못한 것이다. 자살이 발각되면 보험금이 없다기에 투신하지도 못했다. 미생(未生)? 산 것도 아니었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초라한 가장은 차를 폐기하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1980년대 초 새로 권력을 잡은 정권은 초대형 행사를 많이 벌였다. 프로 스포츠가 시작됐고'국풍(國風) 81'을 시작으로 많은 이벤트가 열렸다. 1983년 KBS가 주관한 우주과학 전람회가 열렸다. 자관은 변소보다는 낫겠다 생각하고 전람회 청소 용역에 입찰했다. 신기하게도 용역을 따냈다. 첫날 밤 여사님 선생님들과 함께 쓰레기를 모아놓으니 고물업자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 "알루미늄 캔을 모아주면 한 개당 10원씩 쳐주겠다." 훗날 자관이 기적이라 부른 사건이 시작됐다.
    유리병 대신에 알루미늄 캔이 막 나온 때였다. 콜라도 사이다도 맥주도 모두 알루미늄 캔에 담겨 나왔고 박람회 구경꾼들 손에는 누구나 캔 음료가 들려 있었다. 마대 자루에 캔을 모아놓으면 고물업자가 현금을 주고 사갔다. 청 소는 적자였다. 깡통 팔아 번 돈은 그 몇 십 배였다. 박람회는 두 달 동안 수십만 명이 구경했다. 천변을 헤매던 무학 소년에게 40년 만에 코미디 같은 기적이 벌어졌다. KBS는 이후 구자관에게 용역을 계속 맡겼고 대학교와 기업들이 줄을 섰다. 직원 2명으로 시작했던 용역 회사는 자관에게 화상(火傷)을 남기고 매출 5000억 원짜리 회사가 되었다. 여사님을 모시고 선생님을 모시며 이를 악물고 남의 집 청소를 하는 회사 이름은 삼구아이앤씨다. 2015년. 친척 집을 전전했던 아이들은 시집 장가 다 보냈다. 옷가지 행상을 하던 아내는 사모님이 되었다. 자관은 못 배운 게 서러워 예순 넘어 석사까지 땄다. 오십 넘어 스키도 배웠다. 젊은이들처럼 가죽점퍼에 쇠사슬 감고 오토바이도 몰아봤다. 다 이루었는데 가끔 눈물이 난다. 젊은 날 그때는 왜 몰랐을까. 어머니의 타는 가슴속을 왜 몰랐을까. 천변에서 고달픈 청년기를 살아낸 일흔한 살 먹은 이 한국인은 지금도 궁금하다.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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