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영하 65도 야쿠티야 이야기

3 혹한의 시베리아에 베트남-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이유?

浮萍草 2015. 5. 1. 08:30
    난 20년 간 순록의 마릿수는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왜? 전염병이 돌았는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수 세기 전 어느 땐가 전염병으로 순록이 거의 전멸한 때가 있었다. 
    에벤족은 서부 오호츠크 해 연안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이들을 “라무트”라고도 불렀다. 
    ‘바닷가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들은 에벤족의 일부이다. 
    에벤족은 대부분 순록 목축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시대에 들어 이들은 부자 농민이 되었다. 
    이들은 소프호즈를 결성하였다. 
    소프호즈는 대기업처럼 운영되었다. 
    순록 목축에서 얻는 모든 제품은 소프호즈를 통해 공동 판매되었다. 
    소프호즈는 순록치기들에게 보호막이 되었다. 
    순록치기들은 순록만 잘 기르면 되었다.
    그러면 월급이 지불되었다. 
    월급은 도시의 어떤 직업보다도 높았다. 
    또 토폴리노예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집은 아파트로 지어졌다. 
    이 아파트가 순록치기에게는 우선으로 배정되었다. 
    가족은 이 아파트에서 따뜻하게 살 수 있었다. 
    마을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도서관, 박물관이 세워졌다. 
    난방은 중앙공급식이어서 개인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순록치기를 하는 에벤족 같은 소수민족에게는 사회적 특권들도 많이 주어졌다. 
    소수민족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군대 복무 의무가 없었다. 
    대학교 입학에서도 가산점이 주어졌다. 
    소비에트 시절 순록치기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였다. 
    그들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80년대 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과거에 겪은 전염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염병은 순록의 목숨을 거두어갔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에벤족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소비에트 시절 에벤족 중에선 부자 농민이 많이 나왔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이미 소비에트 시절 해외여행 경험을 하도록 하였다. 
    시대가 변하자 그들은 도시로 나와 쉽게 변화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대부분 에벤족에게 순록치기는 생각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에게 변화는 재앙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그들에게서 모든 특권을 거두어 갔다. 
    먼저 소프호즈가 해체되었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생산자가 되고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했다. 
    스스로 물류를 책임져야 했다. 
    그들에게 이윤이란 개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의 이윤을 위해 순록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순록은 밤낮없이 먹이를 찾고 배부르면 잠깐 잠드는 생활을 한다./노르웨이 트롬소대 제공

    세상은 에벤족의 순수한 삶을 더는 이해하지 않았다. 순록치기에게 주는 월급은 이제 5천 루블(10만원)에 불과하다. 그들은 순록을 지킬 수가 없다. 순록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그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종족 유지의 한계점에 이른 것이다. 에벤족에게 순록을 버리는 것은 바로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순록을 포기하고 마을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에벤족이 아니라 야쿠트인으로 살아야 한다. 에벤어는 사하공화국의 공용어 중 하나로 인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종이 위의 기록에 불과하다. 토폴리노예 마을에서조차 사람들은 야쿠트어를 더 편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에벤어를 말하면서도 쉽게 러시아어, 야쿠트어가 튀어나왔다. 적어도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에벤어가 필수 과목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이상이 되면 아무도 배우지 않는다. 에벤어 교실을 들어가 보았다. 학생들 성적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유독 한 여자 아이의 성적이 뛰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을 보았다. 성이 “반-티엔-동”이었다. 여기까지 베트남 사람이 들어왔나? 러시아와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가까운 사이이므로 러시아에 베트남 사람들은 꽤 많이 있다. 도시라면 이해가 가는데 추운 시베리아 벽촌에 베트남 사람이 있을 거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베트남 여자아이가 에벤애들 보다 에벤어를 더 잘한다? 이 의문은 마을을 떠나 야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에 풀렸다. 봉고형 버스에서 운전사 옆의 앞좌석에 앉았다. 러시아에서 앞좌석은 제일 상석이다. 운전사가 에벤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서 야쿠트인이냐고 물었다. 바로 중국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3세대였다. 소비에트 시절 할아버지가 사하공화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주로 노동자로 여기저기 떠돌았다. 3대에 와서 에벤족이 떠난 빈자리를 차지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이 중 막내는 연방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에벤 아이들보다 에벤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는 여자 아이는 이 중국인 운전사의 손녀로 5세대에 해당하였다. 이 사람은 800km 떨어진 도시 야쿠츠크에서 농촌 토폴리노예로 야채를 공급해 주는 야채상이었다. 토폴리노예에서 감자를 사려면 야쿠츠크에서 보다 3배 정도 더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에벤 민족 거주지”로 지정된 소수 민족의 땅, 토폴리노예의 현실이다. 토폴리노예에서 32살 된 여자를 인터뷰했다. 전통 옷을 입고 왔다. 얼굴색도 희고 선한 인상이었다. 얼굴 한 편엔 수심이 느껴졌다. 직업은 학교 보모였다. 아이가 셋이었다. 딸 둘, 아들 하나. 에벤족의 평균으로 보면 아직 셋 정도는 애를 더 낳을 것이다. 남편의 직업을 물었다. 운전사였다. 왜 순록치기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월급이 너무 적다고 했다. 그리고 유목 생활로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다고 누가 먼저 직업을 바꾸자고 했느냐고 물었다. 아내가 먼저 권했느냐고 물었다. 남편도 고민했다고 한다. 유목 생활은 에벤족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것이 힘들다고? 그만큼 전통을 지키는 데 지쳐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운전사는 남자가 가족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수입도 훨씬 많다. 순록 썰매 대신 버스나 택시,그들에게 변화된 세상에서 그래도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서 적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이것뿐인 것 같았다. 아직도 순록치기를 하며 에벤족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다. 셋째 날 순록 경주가 있었다. 남녀부로 나뉘어 순록 2마리가 이끄는 썰매를 타고 눈 덮인 강 위를 10km 달리는 것이다. 쟈먀킨이라는 가족의 부부가 각각 남녀부 우승을 차지하였다. 여자부 준우승은 쟈먀킨 부부의 처제였다. 쟈먀킨 부부의 아들은 순록 승마 달리기에서 우승하였다. 대단한 가족이었다. 쟈먀킨 부부는 30대 중반인데 아이가 아직 다섯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순록치기 가족으로 에벤족의 전통을 지켜갈 것이다. 에벤족의 전통 노래를 “님간”이라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토폴리노예에서 할머니 두 사람밖에 없었다. 가락이 우리의 전통 민요와 비슷했다. 이 할머니들과 함께 “님간”도 사라질 것이다. 저녁에 마을 예술제가 열렸다. 마지막 순서로 할머니 십여 분이 나왔다. “에벤 송”을 불렀다. 에벤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애국가 같은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다. 마지막 구절은 “에벤 만둘리”였다. 그 뜻은 “에벤족이여, 강해져라”이다.
    Premium Chosun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kangds@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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