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참치이야기

7 대한민국 참치 원양의 역사와 미래 (상 하)

浮萍草 2015. 4. 2. 10:39
    1958년 남태평양, 그들이 낚은 것은 대한민국 참치 원양의 미래였다.
    1958년 사모아로 처음 출어하는 지남호
    한민국 참치 원양의 신화, 지남(指南)호 1958년 1월 22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指南)호가 남태평양 사모아(Samoa)로 참치를 잡으러 출어했다. 이 배는 부산에서 오후 5시쯤 출발해 12시간 남짓을 꼬박 달려 다음날 아침 일본 시모노세키(下関)항에 도착했다. 이 배는 그곳에서 통관 및 검역 작업을 마치고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각종 어구(漁具)와 선용품(船用品)을 구매했다. ‘남쪽을 향하라’는 뜻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이름까지 붙여준 이 배는 사실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수입한 230톤 급의 조그마한 어선이었다. 거기에 연식이 10년도 더 지나 군데군데 녹이 시뻘건데다가, 참치 조업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구조를 지닌 배였다. 이 허름한 어선은 별과 수평선을 더듬으며 장장 1달 만에 태평양을 건너 사모아에 도착했고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적도 남단을 항해한 배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 작은 배가 처음 맞이한 것은 당시 사모아 해역을 주름잡고 있던 일본 원양어선단의 싸늘한 텃세였다. 일본 어선들은 자신들의 독무대를 갑작스레 침범한 작은 배를 환영할 리 없었으며 일체의 어장 정보나 물자 교류를 해주지 않았다. 3월 1일 지남호 선원들은 조촐하게 3·1절 기념식을 가지면서 ‘조국을 위해 참치를 잡아 귀한 외화를 획득하자’고 결의한 뒤 첫 조업에 나섰다. 선원들은 앞서 지난해 108일간 인도양 니코바르(Nicobar) 제도 인근 해역에서 시험조업을 통해 약 10톤의 새치를 어획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남태평양의 험난한 파도는 선원들의 지난 시간들을 비웃는 듯 참치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빈 그물을 끌어올리는 시간들이 반복되며 점차 선원들의 몸과 마음도 지쳐갔다. 그럼에도 지남호 선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며 투망을 했고 마침내 이틀 밤낮을 적도에서 싸운 끝에 사흘 째 되던 날 150㎝ 크기의 날개 다랑어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대한민국 원양어선이 남태평양에서 최초로 참치를 낚는 순간이었다.
    ㆍ경제와 외교의 최선봉, 참치 원양
    1973년 가나 테마(Tema)의 아동병원에 참치를 선물하는 원양선원들

    1년 3개월의 조업 기간 동안 지남호는 눈다랑어, 황다랑어 등 100여톤의 참치를 어획했다. 성공 신화는 국내에 삽시간에 퍼졌다. 참치 원양은 1958년 한 해 수출이 1500만 달러 남짓에 불과했던 당시 국가 최우선 수출 산업이 되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 건조된 배들이 줄줄이 태평양을 향해 나섰다. 또한 부산 남포동의 주점 골목에는 원양어선을 타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게마다 가득 차 있었다. 당시 국민 1인당 연간 소득이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는데, 원양어선의 일반 선원 월급이 한 달에 100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논과 밭까지 팔아 마련한 돈으로 여기저기 연줄을 대는 사람들이 흔했다. 이렇듯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뛰어난 인재들이 주로 선원으로 선발됐다. 참치 수출로 외화 벌이의 선봉장이 됐던 참치 원양은 국가 차원의 자금력과 우수한 인재가 몰린 참치 원양은 삽시간에 그 규모가 커졌다. 1958년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 이후 1977년에는 총 참치 원양 선박수가 무려 850척에 달했고 1964년 대한민국 수출 1억 달러 달성 신화도 참치 원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치 원양은 한국 전쟁 직후 완전히 무너진 대한민국의 경제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자 민간 외교의 최선봉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프리카와 남미 등의 여러 국가와 아직 수교가 맺어지지 않아 대사관은 고사하고 한국인 어느 누구도 발을 디뎌본 적이 없는 나라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 원양어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누비던 원양 어부들은 꼬레아(Corea)를 대표하는 얼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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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차 위축되고 있는 국내 참치 원양
    1968년 사모아 기지를 방문해 참치 원양 근무자들을 격려한 고(故) 박정희 전대통령 일가.
    지만 참치 원양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86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무역 흑자를 기록한 뒤 1989년까지 4년 간 흑자가 지속됐고 이러한 급격한 경제 성장은 서울 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한강의 기적’ 이라 불리며 온 국민을 들뜨게 했다. 국민들의 관심은 점차 수출보다는 사치품을 수입해 삶의 질을 올리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정부의 방침 또한 1차 산업 투자보다는 서비스 산업 육성으로 바뀌었다. 당시 정부의 외화 보유고는 국가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지나친 자신감과 방심으로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결국 부메랑이 돼 날아왔다. 1990년부터 다시 시작된 무역적자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1997년에 이르러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위기인 IMF사태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참치 원양은 점차 규모가 축소됐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참치 원양은 과거 전성기와 비교하면 주어진 환경과 조건 등이 많이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현재 참치는 최대 어장인 태평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어장에서 어획량이 세계적으로 감소하고 있지만 영양과 효능이 알려지며 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어장 연안국들은 늘어나는 참치 수요를 채우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은 앞다퉈 배타적 경제 수역(EEZ)을 선포하며 조업 관리와 규제를 강화해 자국 연안의 참치를 보호하는 등 참치의 ‘자원 자국화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참치의 주요 어장인 태평양 연안국들은 조업 허가를 내 주는 조건으로 투자를 요구하는 등 조업 규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참치 조업국들은 조업권을 확보하고자 연안국들에 경제적 지원과 투자를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대만,일본 등의 주요 조업국들은 태평양에서의 쿼터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물량 공세를 펼쳐 가시적 성과를 거뒀다. 이는 우리나라 참치 조업에 큰 위협이다 최근 태평양 연안국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EEZ를 설정하면서 국내 원양 업체들은 조업권 확보를 위해 1년에 약 1억 달러의 입어료를 내야 하는 실정이 됐다. 이에 따라 동원산업 등 국내 약 5개 업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세 업체인 국내 원양 업계는 실질적으로 조업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 결국 한 때 2위의 어획량을 기록하던 국내 참치 원양의 세계 순위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ㆍ참치 원양, 그 찬란했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엔저에 따라 횟감용 참치의 어가(漁價)가 하락했다. 최근에는 어획량도 부진하다. 국내 참치 원양 업계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사모아,솔로몬 제도 등 태평양 연안국에 외국 기지를 설립하는 등의 노력을 펼치고 있지만 외국 기지 설립은 정부 차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게다가 국내 참치 원양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해양수산부는 5년간 해체돼 있었기에, 업계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대한민국의 경제 구조는 무역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의 주역은 반도체,휴대폰 등의 첨단 산업이지만 과거 6.25 동란 직후 완전히 무너진 대한민국의 경제를 지탱해준 것은 참치 원양 등의 1차 산업 이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국가가 더 높은 이익을 보장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경제의 근간이 되었던 1차 산업을 외면한다면 산업 구조의 불균형을 초래해 과거 IMF 사태와 같은 어두운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참치 원양은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외교적 논리가 작용할 수 밖에 없는 산업이다. 따라서 정부의 외교 정책과 경제 지원이 없다면 세계의 원양 산업 강대국들과 어장 연안국들 사이에서 우리나라의 참치 원양을 지키고 양성해 나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정부 당국은 업계와 협력해 다양한 관련 정책 지원한다면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참치 원양이 다시 한 번 찬란했던 전성기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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