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달팽이 박사의 생명 이야기

미세기후(좁은 지역 내의 기후 차이)의 위력… 한겨울 노지에서도 죽살이치며 버틴 식물들

浮萍草 2015. 2. 7. 10:22
    동심원 모양으로 자라는 로제트형 식물.
    부터 우리나라 겨울 풍광을 청송백설(靑松白雪)이라고 했다. 휘몰아치는 북풍한설에 짙푸르렀던 나무는 잎사귀가 온통 떨어지고 풀대는 송두리째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소나무·잣나무를 빼곤 죄다 앙상한 알몸으로 본색을 드러내고 혹독한 추위에 사시나무 떨듯 벌벌거리며 황량 하게 웅크렸다. 그런가 하면 정적이 감도는 냉혹한 세한에도 추운 내색 않고 기세당당,거칠 것 없이 세차게 설치는 동물이 있다. 날짐승과 길짐승들이다. 뱀·개구리 같은 냉혈동물은 칼추위에 옴짝달싹 못하고 숨어버렸지만 온혈동물인 조류와 포유류는 아랑곳 않고 기를 쓰고 나댄다. 미세기후(微細氣候·microclimate) 이야기다. 좁은 지역 내의 기후 차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여름에 나무 그림자에 들어가면 서늘하지만 그림자 밖으로 나가면 덥다. 태양열을 고스란히 받는 양달은 지온이 높으나 응달은 낮다. 겨울철 내리 찬바람을 받는 곳과 나무 같은 가림막이 있는 곳의 기후가 다르다. 집을 봐도 앞마당과 뒤뜰의 온도나 습도가 다르니, 이런 차이를 미세기후라 한다. 빌딩으로 뒤덮인 대도시만 해도 구역에 따라 제가끔 기온과 바람,강우·강설량이 다르다. 매서운 추위를 감싸주는 이불 담요 같은 겨울눈이 지천으로 내리는 해엔 보리농사가 풍년이라 한다. 일부러 온도계를 들고 나가 기온과 15cm 눈 무덤 속 온도를 재보았더니만 공중 공기는 영하 15℃인데 눈 밑 땅바닥은 놀랍게도 0℃다.
    두꺼운 눈이 단열재가 되어 찬 공기를 차단한 덕이다. 두두룩한 밭두렁의 눈(雪)은 볕을 받아 이내 풀어져버리지만 두렁에 가려 푹 꺼진 고랑의 것은 여간해서 녹지 않는다. 밭에서도 이랑과 고랑 사이에 이렇게 온도가 다르니 이 또한 미세기후다. 무엇이나 고정불변하지 않고 변함을 빗대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고 한다. 미세기후는 식물 생태에도 영향을 끼친다. 핼쑥하고 시푸르죽죽 검붉게 빛바랜 냉이·민들레·달맞이꽃·애기똥풀이 도래방석처럼 둥글넓적하게 쫙 펼쳐져 땅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또한 아래위의 크고 작은 잎이 번갈아 엇갈려 나면서 동심원(同心圓)으로 켜켜이 포개졌다. 그 매무새가 마치 장미꽃송이 같다 하여 로제트형(rosette形)이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세기후(태양열과 지열)를 모조리 모아 쓰겠다는 심사다. 겨울 노지에서 자라 잎이 널따랗게 퍼진 겉절이용 봄배추(봄동)가 전형적 로제트 꼴이며 겨울 풀은 틀에 찍어 낸 듯 하나같이 그런 모양새다. 자연은 남다른 호기심으로 자기를 대하는 이에게만 비밀의 문을 살며시 열어준다. 식물생태학의 비조(鼻祖)인 덴마크의 라운키에르(C.Raunkiaer)는 겨울철 식물의 생활 모습을 30여 가지로 분류했다. 이를 라운키에르 생활형(Raunkiaer's life forms)이라 한다. 그중에서 움싹이 틀 겨울눈(동아·冬芽)이 있는 자리에 따른 생활형을 지상식물·지표식물·반지중식물·지중식물·1년생 식물로 나눴다. 이 중 1년생 식물은 겨울눈 대신 씨앗을 남긴다. 바짝 마른 야무진 씨알엔 물이 아예 없다시피 해 어지간해선 얼지 않는다. 수천년 전 무덤에서 발굴된 씨앗은 지금도 싹을 틔울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이런 곡식의 종자는 불씨처럼 잘 간수해야 하기에'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했고 신부 집에 보내는 함(函)에도 꼭 오곡을 넣었다. 가끔 삶이 힘들고 지겹다 싶으면 산으로 나가보자. 여기저기 터잡고 죽살이치며 살아가는 검질긴 생명들이 당신을 살갑게 맞을 터이니. 힘내라 겨울 풋나무들이여. 포근하고 소담스러운 봄이 곧 온다.
    Chosun ☜       권오길·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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