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구려공정 실체 해부

3 모택동과 주은래가 "동북이 원래 조선땅이었다"고 한 이유

浮萍草 2014. 12. 8. 23:04
    3.고구려 공정 질의
    국이 고구려공정에서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이유는 아래의 4가지다. ▲ 고구려 등 동북민족은 중국 고대 지방민족정권에 속한다 ▲ 고구려와 고려정권 사이에는 필연적 내연관계가 없다 ▲ 고구려와 현 남한·북한 정권 사이에는 필연적 내연관계가 없다 ▲ 고구려의 주체는 이미 중화민족에 융합되었고 그의 일부가 현 조선민족에 융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모순의 주요 면이 사물의 성격을 규정지으므로 고구려와 현 조선 민족 간에는 필연적 내연관계가 없다 고구려 공정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이 중국 사학계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에 넣은 이유는 중국 고서에‘고구려’와 ‘고려’ 두 단어를 혼동해 썼기 때문에 개념상의 착각을 빚은 것이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인가 했고, 고려를 이은 나라가 조선이고 조선을 이은 나라가 지금의 조선·한국이므로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취급했다. 지금은 그 오류를 시정하여야 한다….” 하지만 고구려가 망하고 통일신라를 거쳐 250년이 지나 고려가 생겼다는 것을 중국 사학자들이 몰랐을 수 없다. 보통 지식인들도 알며 <설례동정薛禮東征>과 같은 화본·소설 등을 통하여 삼척동자도 안다. 하물며 세계적인 역사학 대가 곽말약, 당란, 전백찬 등이 몰랐으며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중국 권위의 역사책과 역사 교과서를 썼단 말인가? 역사학 고수들이 써준 자료를 가지고 모택동과 주은래가 북한 대표들에게“동북이 원래 조선땅이었는데 우리 선조들이 침략하여 조선땅이 좁아졌다”고 한 말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 모택동과 주은래 그리고 그들에게 발언 내용을 써준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할 줄 몰랐단 말인가?
    작년 27일 오전 열린 국회 동북아역사특위 공청회. 이 자리에서 이덕일 한가람문화연구소장이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에 대해 발표했다./전기병기자

    중국 역사상 같거나 비슷한 국명이 수없이 많다. 이 때문에 중국 사학자들은 이런 나라들을 구분하는데 도사들이다. 그런데 당나라 초기에 망한 고구려를 송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고려와 구분할 줄 몰랐을 수 있나?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할 줄 몰라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취급하였다는 것은 한낱 궤변에 불과하다. 고구려의 주체는 이미 중화민족에 융합되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중국 최초의 국가는 중원 민족이 BC 21세기에 세운 하夏나라이다. BC 16세기에 동이東夷 민족이 중원에 쳐들어가 상商을 세웠고 BC 11세기에 서융西戎 민족이 중원에 쳐들어가 주周를 세웠으며 317~1279년에 북적北狄 민족이 중원에 쳐들어가 원元 등을 세웠다. 1644년에는 만주족의 후금이 중원에 쳐들어가 청淸나라를 세웠다. 상기 민족이나 그들의 나라들이야말로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세히 분석하면, 중화민족에 융합되며 그들이 중화민족에 끼친 정치·경제·문화·풍속·습관과 심지어 언어 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원에 진출하지도 못했고 변방에서 멸망하였다. 당나라로 잡혀간 고구려 유민 20만 명은 포로와 다름 없이 중국의 남방,서방,서북방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으며 간단히 동화되고 말았다. 정치·문화 등 면에서 중국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고구려는 한반도의 신라,백제 등의 국민과 언어도 같은(방언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동일민족이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네트워크의 일원이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그의 다수 인구나 문화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집합체에 흡수되었으면 되었지 중화민족에 융합되지는 않았다. 사실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모든 나라 즉 고구려·신라·백제·고려·조선이 모두 중국의 강한 영향권 내에 있었다. 이런 상황은 1897년에야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남으로써 타개되었다. 중국사냐 아니냐의 구분은 예속 상황이 아니라 현 중국 영토(판도)를 본위로 한다. 중국의 현 판도 안에 있었던 역사상의 모든 나라는 당시에 중국에 속하지 않았어도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고 중국의 현 판도 밖에 있었던 역사상의 모든 나라는 당시에 중국에 속했어도 외국 역사로 취급한다. 이것이 중국이 규정한 국사 서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역사상의 서하·거란·요·금 등 수많은 나라가 당시에 중국에 속하지 않았지만 현 중국 판도 안에 있으므로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에 넣는다. 몽고는 원나라 때부터 줄곧 중국에 속했으며 1948년에야 중공이 독립국가로 인정하였지만 현 중국 판도 밖에 있으므로 외국사에서 취급한다. 백제·신라·고려·조선은 당시 중국에 예속된 측면이 강했지만 현 중국 판도 밖에 있으므로 외국사로 취급한다. 고구려는 현 중국 판도 안에 있는 부분이 절반(어림잡아), 밖에 있는 부분이 절반이다.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불 수 있는가? 2003년 중국 서주徐州에서 열린 인류문화재에 관한 회의에서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벽화와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벽화에 대해 유엔은 양자에게 모두 인증서를 발급했다. 현 중국영토 안에 있는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문화이고 현 한반도 영토 안에 있는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문화라는 뜻이 잠재해 있다. 이것은 당시 중국의 주장과도 어긋나는 유엔의 처사였다. 그러나 중국대표는 그 인증서를 고스란히 받아갔다. 만약 중국의 입장대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소수민족정권이었고 고구려와 현 조선민족 간에 필연적 내연관계가 없다면 중국정부는 유엔의 결정에 항의했어야 한다. 회의장소에서 퇴장하고 인증서를 받지 말았어야 한다. 인증서를 고스란히 받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고 적어도 한국역사에도 속한다는 견해를 인정한 셈이다. 그러고도 고구려의 중국사관을 고집하는 것은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 아닌가! 중국 사학계는 영토본위를 원칙으로 한다면서 어떤 데는 영토본위를 따르고 어떤 데는 영토본위를 따르지 않는 2중 잣대를 쓰고 있다. 몽고 역사를 대할 때는 영토본위이고 고구려역사를 대할 때는 영토본위가 아니다. 영토본위를 국사 서술의 기본 원칙으로 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토본위 외에도 정신·문화적 요소를 소홀히 할 수 없으며 고구려 문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고구려의 주체는 이미 중화민족에 융합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고구려 영토의 약 절반이 현 중국 판도에 있다고 하지만 이는 고작해야 중국의 발가락 정도에 불과하고 한국에는 심장 정도의 지위이다. 청나라 때 중국에 융합된 몽고족과 만주족은 그의 정치·문화·풍속·습관 및 언어 등 많은 면에서 중국 문화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렇지 않다. 고구려의 인구나 문화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국에 계승됐으면 됐지 중국에 계승된 것은 없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1950~1960년 중국 석학들이 고구려를 중국사에 넣지 않고 한국사에 넣었을 것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합병했다고 하지만 물리적 합병이지 정신·문화적 합병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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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갑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한국 한중미래재단 zhengr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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