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북미주 식민지의 인종차별 학대
운좋게(?) 살아 남아서 낮선 미주대륙에 도착한 흑인들은 처음에는 주로 라틴아메리카 지방에
만들어진 대농장이나 탄광 등지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서기 1661년경에는 북미주 버지니아지방
에도 흑인노예제도가 성립되었다.
이미'흰 악마'들이 서인도제도 등에서 저지른 흉폭한 죄악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있던 북미주의
인디언들은 아무도 백인들의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북미주에서도 흑인들이 백인
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게 되었다.
흑인들은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고용'되었으나 언제나 잔혹한 노예적 생활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흑인에게는 살인적인 구타와 손·
발을 자르는 등의 악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흑인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노예소유자들은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가공할 사태에 대비하여 더욱 더 노예에 대한 폭력적인 제도를 강화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그 누구도 자유민이 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과 반발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흑인노예들을 효과적으로 부려먹으려고 경건한 기독교도들이자 악마같기도 한 백색 노예주들은 흑인들에 대한'노예교육'을 주입시키기도 했고 신앙을 통해서 달래
보려고도 했다.
이래도 저래도 안될 때는 태형과 단근질과 수족절단과 사형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기 1775년에 버지니아에서는 수족절단을'법전'에 규정해 버렸고 메릴랜드에서는 백인을 구타한 흑인의 두 귀를 자르고,중대한 범죄에는 교수형을 시행한 후에
시체를 4등분하여 전시하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1712년에 뉴욕에서는 대규모 흑인 노예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에 대한 처벌은,
"일부는 화형에 처하고, 일부는 교수형에 처했으며 하나는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고 어떤 사람은 여덟 내지 열시간동안 약한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다."
는 등으로, 그 어디에도 '사랑'스러운 구석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처형방식은 어디에서든지 별로 낯설지 않았다.
흑인들보다는 썩 나은 편이었으나 백인들 중 일부는 매우 가난했고 흑인이나 마찬가지로 조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유럽지방에서도 사회경제적으로 최하층에 속해 있던 그들은 단지 좀 더 잘 살아 보려는 희망 하나만 지닌 채 대서양을 건너가서 계약 노동자로서 힘든 일에 종사
했다.
그들은 노예는 아니었으나 노예나 다름없는 혹독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 속에서,대서양을 건너온 것을 후회하면서 막막하게 살아갔다.
심지어는 노동력의 감소를 우려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결혼이나 성생활까지도 금했으며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다.
폭력은 사소한 이유에 의해서도 행해졌고 여성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강간당하는 예는 드물지 않았다.
백인노동자들은 흑인노예들과 거의 비슷한 이유에서 가끔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가혹한 처벌뿐이었다.
'자유의 땅'이라는 곳에서 노예와 가난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자유도 없었던 것이다.
미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북미주로 몰려 온 이주민의 반 이상은 그러한 노동자들이었는데,서기 17세기에는 대부분 영국섬으로부터 왔고, 서기
18세기에는 주로 아일란드와 독일지방에서 왔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아예 그들이 꿈에나 그리던 자유를 찾아서 멀리 달아나 버리기도 했으며 유럽지방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계속 급증해 가는 백인종의 존재는 원주민들에게는 항상 재앙의 원천이 되었을 뿐이다.
서기 1700년경에 이미 25만 명에 이르렀던 식민지의 인구는 서기 1760년에는 160만여 명으로 팽창했다.
그에 따라서 상공업도 점차 활발해졌으나 대부분의 이득을 상류계급이 독점하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갔다.
서기 1770년에는 보스턴의 재산소유자 중에서 상층인구 1%가 보스턴 전 재산의 40%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로 계층간의 갈등은 극히 심각해져서 가난한 자들에 의한 계급투쟁적인 반란사건들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또한 저열한 생존환경에 놓여 있던 소작인들도 사회의 지속적인 불안요인으로 잠재해 있었다.
백인지주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백인 빈민들과 흑인노예들이 연합전선을 이루는 사태였다.
이처럼 근대 유럽지방의 어떤 사회와도 다를 바 없이 사회적 모순과 계급적 분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가는 가운데 일단의 상류계급 부르조아들은 점차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갔다.
그들은 흑인노예·백인노동자·인디언 등을 '인민'의 범위에서 제외한 채 서기 1760년대와 1770년대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놀라울만한 이율배반적 논리를 지배방침
으로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
실제로는 존재할 수도 없는 이 막연한 논리는 처음부터 절대적 자유도 절대적 평등도 기약할 수 없는 성질의 물과 불과도 같은 이질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광신자들이나 다름없는 미합중국의 지배자들이 내어놓은 자유와 평등은 간단히 풀이하자면 무한정한 탐욕추구의 자유와 자본에 의하여 지배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사회 정치판에서는 애초에 있을 수도 없는 정치적 평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주만물의 조화라는 올바른 동양적 사고방식에 근거를 두는 이상적인 대동사회 건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던 자본가들은 그대신 달콤한 사탕에 정신
팔리듯이'자유와 평등'을 그들의 생활방침으로 받아 들였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상호모순되는 개념을 착취에 시달리던 자신들의 염원대로'모든 양심적인 행동에 있어서의 자유'와'사회경제적 계급이 없는 이상적인
평등'정도의 뜻으로 받아들인 흑인노예들과 백인노동자 등 하층민들에게까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구호로 빠르게 인식되어 가면서 엉뚱하게도 식민지의 독립
운동에 기여해 주는 가장 큰 이념적 요소가 되기도 했다.
7. 프렌치·인디언전쟁과 북미주의 식민지 독립운동
프랑스 해적들은 영국섬의 세력을 애팔래치아 산줄기 동쪽 해안지대에 묶어 두고 그 서쪽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미시시피강 전 유역을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빠른 배를 수백 척이나 만들었고 오하이오 지방을
거쳐서 캐나다 지방까지 이르는 전 지역을 장악하고자 했다.
서기 1740년대에 프랑스 해적들은 아예 그 지역들에 저들의 영토임을 표시하는 금속판들을 깔아놓기도
했다.
그러나 7년 후에 영국섬의 왕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영국섬의 식민지 개발회사(즉,국제적 해적조직)가
오하이오 지방까지 침범해 오자 두 해적 집단은 필연적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세력의 경계지역에는 숱한 요새지가 만들어졌고 상호간 침략이 되풀이되었다.
당시 21세의 젊은 지휘관으로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아 생포되었던 죠지·워싱턴은 프랑스군의 호의로
요행히 처형을 면하고 생환했으나 그 후로도 6년간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에 계속 참여했다.
프랑스 해적들도 영국섬 해적들이나 마찬가지로 음흉한 침략자들이었으나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그때
까지도 영국섬 출신자들의 횡포만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나라간의 싸움에서 프랑스 편을 들었다.
그것은 인디언들이 그동안 영국 해적들의 파렴치한 침략행위에 매우 격분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6∼7년간에 걸친 치열한 쟁패전 끝에 영국섬과 식민지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압도해 버렸고 캐나다의 퀘벡과 몬트리올에서 영국군에 항복한 것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가장 운이 나빴던 것은 인디언들로서, 이제 미주대륙에서 인디언을 명색으로나마 보호해 줄 수 있는 동맹세력은 그나마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파렴치하고 속 좁은
섬나라 영국의 침략자들은 인디언을 더욱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남의 땅에서 저희들 멋대로 싸우는 그런 못 된 전쟁방식은 모든 해적들에게 공통된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전쟁통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자들은 항상 선량한 원주민들이었다는 점도 불길하게 공통되는 점이었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미주 식민지의 지위를 영국섬의 동맹국 정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식민지군이 유럽지방의 군사력보다도 오히려 실전에서 유용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반면에 영국섬으로서는 식민지를 통제하는 데 큰 불안이 생겨
났다.
13주로 나누어 통치했던 식민지가 전쟁을 통해서 연합세력을 형성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영국섬의 속 좁은 통치배들에게 남은 방법은 식민지를 더욱 강력하게 억누르는 것뿐이었다.
오랜 전쟁때문에 영국섬의 재정은 크게 곤핍했으므로, 전쟁 후 그 재정을 다시 충족시키려는 정책을 강행한 것은 식민지인들에게 큰 불안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를 방어할 경비부담 문제로 서기 1765년에 영국섬의 의회에서 인지세법을 통과시키자 식민지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인지세법 및 인지판매인에 대한 반발과 폭동이 벌집 쑤셔 놓은 듯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그에 놀란 영국섬 통치배들은 당황해서 인지세법을 폐지시켰으므로. 당분간은 다시 평온을 찾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섬 왕인 죠지 3세는 똑똑하지 못한 재무장관들을 차례로 임명했고 그로 인하여 가식된 평온은 다시 쉽게 깨지고 말았다.
그들은 식민지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없었던 차세(茶稅)를 굳이 고집하여 큰 반발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기 1770년에 영국섬의회는 식민지에서의 반발을 우려하여 차세 이외의 모든 새로운 세금을 폐지했으나 조세저항은 오히려 더 거세어져 갔다.
마침내 같은 해 3월 보스톤의 세관을 경비하던 보초들과 몇몇 식민지인 사이에서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흑인 1명이 포함된 식민지인
3명이 사살된 소위 '보스톤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크게 확대되어 다음날 밤 뉴잉글랜드의 올드사우스교회에서는 대규모 궐기 집회가 열렸고 식민지인들의 연락을 원활히 하기 위한'통신연락위원회'가 즉석
에서 결성되었다.
그 위원회를 조직한 자는 영국정부의 관세 대리인이었던 오티스였다.
그의 제자인 사뮤엘 아담스는 효과적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가였고 마침내 영국섬에 반대하는 전 식민지 대표들로 구성된 대륙회의를 소집하는 데 앞장섰다.
한번 빗나가기 시작한 영국섬과 식민지의 관계는 계속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토마스 제퍼슨·패트릭 헨리 등의 변호사들이 식민지 분리운동에 정열을 불태웠고 각 주간의 긴밀한 연락망에 의하여 식민지의 결속은 더욱 강고해져 갔다.
그리고 드디어 서기 1775년 4월에 식민지군의 군수품 저장고를 급습한 영국군과의 교전을 개시로 독립전쟁의 막은 올랐다.
유럽지방 최강을 자랑하는 영국군은 잘 훈련된 독일의 용병부대와 함께 전투에 투입됐으나,식민지의 민병은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생존의 절박한 필요성 때문에 모두가 능숙한 사격솜씨를 지니고 있는 데다가 명중률이 높게 개량된 라이플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 후 6년간의 독립전쟁은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혼전이 계속되었다.
그런 중에도 현지의 지형에 익숙하고 게릴라식 전법에 능숙한 식민지군의 우세는 점차 확고해져 갔다.
마침내 영국섬의 파견군은 '고대 로마 왕국의 군세가 미개한 게르만족과의 전쟁말기에 패망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인하여 패배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휘자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돈 많은 과부와 결혼했던'정직한 워싱턴'이었다.
그는 과부의 재산이었던 수익성 높은 포토맥 강변의 광대한 부동산과 150여명의 노예도 함께 소유하게 되었는데 유복한 지주로서 틀이 잡혀있던 43세때 식민지회의
(소위 '대륙회의')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대단히 계급의식이 강했던 매부리코 워싱턴은 결코 인간미가 풍부할 수 없는 종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면회인이 그의 앞에서 차렷자세를 취하도록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남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 그는 대통령 취임식때도 그 누구와도 악수조차 하지 않는 심각한 결벽증적인 정신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임감·통찰력 등이 뛰어났으므로 자신의 직무만은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워싱턴은 당시 인구의 25%나 되던 흑인들이 자유를 찾기 위하여 식민지해방군이 되기를 원하자 그들의 요구를 거절해 버리기도 했다.
그것은 패트릭·헨리가,'자유를 달라,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을 때의 자유가 누구를 위한 자유를 뜻하는가를 암시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민(People)'에 인디언이나 흑인노예·백인출신 노동자 같은 사람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처음에는 무시할 수 없이 막강해 보이던 식민지군도 영국군의 반격에 점점 곤해지기 시작했다.
기아와 전염병의 창궐로 곤경에 처해 있던 워싱턴의 식민지군이 한숨 돌리게 된 것은 영국과 앙숙 관계에 있던 프랑스가 대거 원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싱턴은 그 특유의 탁월한 통찰력으로 그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잘 이용했다.
프랑스는 무기·탄약·자금·병력 등 식민지군에게 필요했던 모든 것을 자신의 국력을 기울이다시피하여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는 열망에 차 있던 식민지군이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되었다.
루이14세 이래로 소위 중상정책을 취해 오면서 일단의'부르조아출신 재무담당관들'을 기용해 왔던 프랑스는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했는데,
그로 인하여 재정적 파탄에 직면한 루이 16세의 부르봉 왕가가 이 또한 부르조아들에 의한 반란인 소위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세기적인 광란 과정을 통해서 몰락해간
사실은 뭔가 꺼림직한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하여튼 그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수수께끼의 나라 미합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미합중국의 탄생은 영국섬 통치배들에게 큰 손실과 패배감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식민지와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 왕실에도 큰 타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큰 타격에 직면한 것은 다름 아닌 인디언들이었다.
미합중국 독립선언이 나오기 약 20여년 전인 서기 1755년에 이미,
"인디언 남자의 머리 가죽을 가져 오면 40파운드 인디언 여자나 12세이하의 인디언 남자의 머리가죽에 대해서는 20파운드를 제공한다."
는 현상금을 내 걸었던 식민지의회는 보다 더 많은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기 1763년에 영국섬의 통치배들은 애팔래치아 산줄기 너머를 인디언 땅으로 선언했었으나 이제는 그런 낯 간지러운 약속조차도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식민지인들은 영국섬의 결정조차 무시한 채 애팔래치아 산줄기를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인디언들은 '식민지가 독립하는 불행한 사태'가 빨리 일어
나지 않도록 오히려 영국군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식민지 통치배들을 더욱 자극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합중국 독립선언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은 인디언의 머리가죽뿐만 아니라 인디언땅의 가죽까지도 다 긁어 모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더욱 부채질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수난의 시대가 선량하기만한 인디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들은 여전히 학대받는 짐승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식민지의 독립이란 13주의 '부유한 백인들을 위한 축제'였을 뿐이었다.
☞ Pluskorea ☜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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