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59) 명 말엽의 혼란과 명-청 교체

浮萍草 2014. 6. 12. 10:25
    ▲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font>
    2. 노쇠국 명나라의 말로 히 수세적인 입장에서나마 간신히 몽골과 왜구 해적들의 노략질을 막아내고 있었던 명나라의 세종왕이 죽고 다음 왕인 목종왕은 간신배들에게 둘러 싸여서 악정이 성행했다. 수년 후 목종왕도 죽고, 9살로 즉위한 신종왕을 보좌했던 재상 장거정은 10년간에 걸쳐서 강력한 독재를 행사하여 국고를 충실케 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신종왕도 인색할 정도로 절약을 하며, 축재 수단으로 뇌물과 세금 등을 닥치는 대로 거두어 들였으나 그 거둔 재물을 유용하게 쓰지 못하고 자신을 위한 궁전건축이나 거창한 능묘건설 또는 막대한 혼례비용 등으로 모두 탕진함으로써 나라 운영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 밑의 관리라는 자들도 자연히 대부분 썩어 터져서 전국적인 사치와 퇴폐풍조가 급속히 만연되어 갔다. 왕과 정부.관료들이 일치단결해도 타개해 나가기 힘든 처지에 셋이 각각 따로 노는 현상이 벌어졌고,퇴폐가 극에 달한 결과로 유흥가와 환락가들만은 흥청거렸다. 아무도 수치를 수치로 알지 못하고 수치스런 일을 자행하는 것을 인간의 당연한 본성처럼 생각하게 될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그래도 선(善)을 외치는 극소수의 사람들마저 위선자로 몰리는 판국이었다. 신종왕 무렵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터지자 스스로 조선을 위하여 원조해 주겠다고 자청했던 누루하치를 조선 에서는 무시해 버렸다. 그대신 조선조정의 일부 얼빠진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신종왕은 거의 대처를 못하다가 왜구들이 만주지방까지 들이닥치려 하자 그제서야 다급해져서 이여송을 파견했다. 조선의 명장 이 순신에 의하여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들은 각지에서 창귈한 의병들과 조선-명 연합군에 밀려 나서 침략 다음 해 4월에는 남해연안에 소수의 전략기지만을 확보한 채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했다. 오랜 비밀교섭 끝에 조선을 나누어 먹자는 등 별의 별 음모가 다 진행되기도 했으나, 그러한 음모를 알아차린 조선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명에서는 왜구 괴수인 히데요시를 왕으로 책봉한 다는 어중간한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쥐새끼같이 왜소하면서도 간덩어리만은 병적으로 부풀었던 히데요시는 고질병인 과대망상이 도져서, 3930년 (서1597)에 다시 왜구 14만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략케 했다(정유재란). 승냥이같은 무리들은 인간의 이름에 부끄러울 정도로 온갖 만행과 노략질을 다한 끝에 결국 쫓겨가긴 했으나, 인류 최고의 문명국인 조선에서 수천년간 보존해 오던 귀중한 옛 기록들과 문화 유산들을 숱하게 훔쳐가는 등,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인류를 위해서는 큰 타격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썩어 빠진 명의 장수들은 왜구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고 왜구들의 노략질과 퇴각을 눈감아 주기도 하는 등,또 하나의 큰 골칫거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성웅 이 순신 장군의 감화를 받아서 정신을 차리기도 했으나,대부분의 명나라 군졸들은 거의 왜구들이나 다름없이 노략질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다. 심지어 명의 군졸들이 평양성에서 조선 민중을 학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나는 등 그 피해가 심했으므로 조선민중은 명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도덕성에 있어서 명의 썩어 빠진'구원병'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이 높았던 동족의 나라 여진국에서 자청했던 구원병 파병을 거절했던 당시의 얼빠진 일부 조선사대부들의 죄업의 결과는 그처럼 엄청나게 전개되었다. 한편 3933년(서1600)에 명나라까지 파견되어 갔던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가 신종왕에게 서양기계를 헌상하는 등 서양선교사들의 첨병적 활동이 두드러져 갔다. 그들 선교사들은 물론 자신의 신앙을 전파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 세계로 파견되어 갔으나 그들의 본의와는 무관하게(때로는 과히 무관하지도 않았지만) 서양의 해적국가들에 의한 침략에 앞장서는 꼴이 되었다. 동남아시아까지 그 불길한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한,종교재판관의 후예들이기도 했던 이들 선교사들은,서양해적들보다 힘이 약해 보이는 지방에서는 서양해적들과 손을 잡고 주민에 대한 선교사업을 ‘무자비하게' 진행하기도 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흔하게 해적들의 노략질이나 식민지 지배정책과 일관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동양의 강대한 문명국들 앞에서는 아직 어린애 정도의 무력밖에 안되었던 서양해적들은 문명세계의 변방에 이르러서부터는 감히 멋대로 할 생각들을 못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도 겉으로는 얌전하기만한 '선량한 학자·종교인'으로 행세했다. 신통치도 않은 몇가지 말초적 지식을 가지고 와서는 가장 유식한 문명인인 양 행세하고 막무가내로 기고만장하던 그들 서양'지식인'들은 오랜 문명국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동방에서는 웃음거리도 안되었지만,그래도 명나라에서는 천문대같은 곳에 관직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썩을대로 썩은 명나라는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되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견되었던 소수의 병력에 대한 군비부담에도 힘이 겨워서 허덕이는 허약체질이었으므로 임진왜란을 통해서 스스로의 약점만 노출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각 지방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비적들은 명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며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3. 명·청의 교체
    일찌기 몽골의 에센·칸이 대정복 사업을 벌였을 때 만주의 여진인들은 몽골족의 야만적 침공을 피하여 이동을 단행했다. 금나라의 후손임을 내세우던 해서여진은 대거 남하하여 요하 중류 개원(開原)지방 동쪽으로 옮겨 갔고 건주여진은 무순 동쪽 백두산 지역으로 옮겨 갔다. 그 모든 여진부족들을 통일하고 후금국을 세운 누루하치의 뒤를 이어 만주지방과 몽골지방을 모두 석권한 청태종은 명나라를 남조(南朝), 자신을 북조(北朝)로 부르고 만주어·몽골어·한어의 세 언어를 공용어로 하는 등 명과의 공존을 도모했다. 청태종은 굳이 명을 공격하려 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한인들의 불화를 거꾸로 이용하여 그들을 제압하는 이한제한(以漢制漢) 방법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았다. 명나라는 이미 자중지란에 빠져들고 있었으므로 청태종으로서는 단지 때가 성숙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명의 마지막 왕인 의종왕 때에 이르러서 환관 출신의 간신 위충현이 득세하여 악랄한 독재를 자행했다. 그는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비리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혀를 뽑고,생살가죽을 벗겨서 죽이는 등 미친 짓을 서슴치않고 자행했으나 기어코 왕의 눈에 벗어나서 유배당한 끝에 자살하였다. 왕은 북쪽에서 흥기하고 있는 대청제국을 두려워해서 군비를 확충하려고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려 했는데,그 조치는 중간 관리들의 탐욕만 더욱 만족시켜 주었을 뿐으로 민중의 원성은 더해 갔다. 또한 의종왕은 간신들의 참언에 넘어가서 명의 마지막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요동사령관 원숭환을 처형하는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방어벽을 스스로 허문 셈이 되고 말았다. 때마침 수년간 계속된 대기근으로 인하여 중세(重稅)에 시달리던 피폐한 중원지방 민중은 자신이 경작하던 땅을 포기하고 거지가 되어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비적으로 변신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도적떼로 들끓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갔다. 심지어는 식량의 부족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지옥과 같은 참상까지 벌어졌다. 처음에는 소규모에 불과했던 도적들은 날이 갈수록 그 규모가 확대되어 마침내 큰 군벌을 형성해 갔다. 그러한 각 지방의 대규모 비적들의 대표 13명이 3967년(서1634)에 하남지방에서 72개의 도둑떼들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한 공동대책을 협의하기 위하여 모였다. 거기서 주도권을 잡은 섬서지방 출신의 이자성은 명나라를 세웠던 주원장처럼 되어 보려고 설치고 다녔으나 명나라의 장군 홍승주에게 쫓겨서 부하 18명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잘 나 보이면 그냥 두고 못 보는 못 된 간신배들은 홍승주마저 모함하여 만주 방면으로 좌천시켜 버렸으므로 이자성 등은 다시 크게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자성이 이끈 비적떼는 얼마후 혁명군으로 자처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며 곳곳에서 명나라 수비군을 격파하여 마침내는 북경마저 함락시켰다. 궁지에 몰린 의종왕은 비관한 끝에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홍건적 도둑떼중에서 몸을 일으켰던 주원장이 세웠던 명나라가 그 파란만장한 운명을 역시 도둑떼에 불과했던 이자성 무리에게 맡기게 된 것은 매우 역설적인 일이었다. 이자성은 나라이름을 대순국(大順國)으로 고치고 황제를 참칭했다. 그러나 당시 산해관을 지키던 명장 오삼계가 이자성과 반목하여 대청제국에 투항해 버렸으므로 대청제국은 뜻밖의 행운을 기뻐하며 마침내 산해관을 넘어서 거침 없이 북경으로 진군했다. 이에 놀란 이자성은 노략질한 금·은 등을 운반하기 쉽게 녹여서 그의 본거지인 섬서지방으로 옮겨 버리고 자금성을 방화해 버림으로써 도적에 불과했던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3977년(서1644) 5월2일, 대청국의 정예 팔기병은 텅 빈 북경에 아무런 저항없이 입성하였다. 이 때 조선에서 심양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제자와 봉림대군도 함께 북경에 입성하여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당시에 조선에서 대청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가상적국'인 대청국의 순박한 풍속을 전했다. "…그들의 정치수완은 만사 분명하고 요령이 있다. 인구·가축 등의 등록에도 누락됨이 없으며 또한 군률은 엄격하고 백성에게는 관대하며 남을 믿고 일을 맡긴다. 명나라나 조선과 같은 번거로운 관료주의나 땅에 떨어진 정령 등에 비하면 천지의 차이가 있다. 그들을 대적할 자는 없으므로 천하는 필히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다…" 또한 서양신부인 마르티니가 거짓없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그들은 모든 지역에서 지나지방의 현인들이 남긴 옛 관습을 묵인하였다. 그들은 또한 독서인(교양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때까지의 과거시험도 허락하였다. 이러한 신중한 고려에 의하여 그들은 몽골인들보다도 한족으로부터 더욱 깊은 충성심을 얻을 수 있었다. 병력은 그들 자신의 수중에 확고히 장악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결코 군권(軍權)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객관적인 관찰을 통하여 대청국이 얼마나 굳건한 도덕성과 우수한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동족인 여진인들에 대하여 결코 좋은 감정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보다 더 객관적인 증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원지방 회복의 대업을 눈 앞에 두고 서거한 청태종의 뒤를 이은 순치제(順治帝)는 겨우 6세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숙부인 실력자 도르곤이 섭정을 맡아서 훌륭한 시책을 펴 나갔다. 스스로는 결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없었던 충성의 화신인 도르곤은 어린 황제를 위하여 모든 힘을 다했다. 그는 썩어 빠진 명나라의 기강을 쇄신하기로 하고 그 첫번째 시책으로서 각종 세금의 대폭적인 경감을 단행했다, 모자라는 국가의 경비는 산서지방의 상인들이 소금장사에서 거두어들인 염세로 충당해 갔다. 사치를 몰랐던 검소한 여진인들은 어차피 많은 수입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또한 관리들의 근무이탈로 인한 행정상의 공백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존의 정치기구와 관리들을 그대로 이용하면서도 부정·부패의 척결만은 엄중하게 시행해 나갔다. 오랜 암흑 끝에 드디어 사람사는 세상답게 되어 가는 대청국을 오히려 마음속으로 성원하고 있었던 것이 중원지방 민중의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제도 등의 관리임용 제도도 그대로 유지해 갔으나, 당분간 만주인식의 변발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도르곤의 훌륭한 민심수습책에 의하여 '청나라가 쳐들어오면 명나라 사람 만 명을 죽여서 제사지낼 것'이라는 등의 뜬소문은 이내 가라앉았고 중원지방 민중은 오래 간만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심이 안정된 것을 확인한 도르곤은 곧 부패한 명나라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의종왕이 북경성에서 자살한 후 남경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대신 사가법(史可法)이 복왕(福王)을 옹립하여 항쟁을 시도했는데 복왕은 난폭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자 였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무력행사를 하지 않으려던 대청국에서는 남경 정부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사가법에게, "우리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서 명을 배반한 이자성을 무찌르고 이자성으로부터 중원지방을 찾아내어 확실히 명을 물려받았다. 당신들은 군부(君父)의 원수도 갚지 않고, 유조(遺詔)도 받들지 못했으니 가짜 정부이다. 그러니 즉시 투항하라." 라는 최후의 통첩을 보내었다. 과연 남경정부는 그 아무 것도 해 내지 못하고 임시로 모여서 멋대로 정부를 구성한 데 불과했으므로 사가법은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입만은 살아서, "우리는 대명국의 뒤를 이은 정통 정부이고 너희들은 북방의 침략자에 불과하니 산해관 이북으로 다시 물러가라." 고 주장했지만 힘없는 넋두리밖에 될 게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가법은 매년 10만냥씩 대청국에 상납하기로 하고 화의를 청했으나 대청국은 동족의 나라 조선에서와 같은 대우를 명나라에 베풀어 줄 생각은 없었으므로 곧 전 중원지방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공세에 들어갔다. 대청국군은 우선 섬서 지방의 이자성이 세운 대순국(大順國)과 사천지방의 장헌충이 세운 대서국(大西國)을 공략하는 한편 남경에 대한 정벌도 함께 추진했다. 이자성과 장헌충은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 보고 토벌되었고 남경정부도 큰소리치던 것과는 달리 변변히 대항해 볼 기회도 없이 수개월만에 무너졌다. 기회주의적으로 사는 데 익숙해진 약아 빠진 남경정부의 관리들은 구차한 목숨을 구걸하고자 스스로 변발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복왕은 수명의 측근들과 도주하다가 청국군에 의하여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화남지방까지 정벌함으로써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신시 이래의 고토회복 대사업을 완성한 배달민족의 한 후예인 대청국은 모든 면에 있어서 야만적으로 퇴폐화 되어 있던 중원지방의 기풍을 쇄신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해 나아갔다. 대청국은 동족의 나라 조선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고 있던 여진식 변발을 중원지방에서는 처음과 달리 강경하게 시행해 나아갔다. 썩어 빠진 정신들을 차리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였던 것이다. 원나라 시절에도 몽골식 변발의 경험이 있던 중원지방에서는 일시적으로 그런 조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곧 순응해 가기 시작했다. 대청국은 승려와 도사와 부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았으므로 한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은 승려로 변신하기도 했다. 변발령이 내리기가 무섭게 하루 아침에 모두가 변발을 한 소주(蘇州) 지방은 한민족(韓民族)의 대삼국시대에 수백년간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으므로 한민족 적인 전통이 온존되어 가고 있던 지방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서 한족(漢族)의 요소가 보다 많이 배어 있던 소주 남방의 절강지방에서는 변발에 대한 저항이 심하여 일년여간에 걸쳐서 별 의미도 없는 항쟁을 벌렸다. 그 항쟁은 절강 및 복건지방의 산악지대나 도서지방에서 특히 심했는데 그러한 반청항쟁에 편승하여 광서지방에서는 명의 먼 친족되는 계(桂)왕이 나라를 수립 하기도 했다. 계왕의 나라라는 것은 묘하게도 포르투갈 선교사등의 포교에 의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 중심이 된 기독교 왕국이었다. 심지어 그들 왕족들이라는 자들은 세례명까지도 가지고 있던 반서양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한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변발은 하지 못하겠다는 자들에게 있어서 서양식으로 이름을 갈게 하는 기독교는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한족의 전통처럼 보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존립의 기본논리가 이처럼 의심스럽던 그 나라는 오삼계와 홍승주 두 장군의 연합작전으로 토벌되기는 했으나 산악밀림지대라는 남방의 지형적 특성과 일종의 종교적 광신집단화한 계왕 무리의 특색같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서 그 토벌전에 무려 20여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왕은 마침내 버어마로 도주하다가 오삼계의 복병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대청국 영도하의 중원지방은 춘추전국시대 이래의 오랜 혼란의 와중에서 벗어 나서, 참으로 오랜간만에 민중생활의 안정을 기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