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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융성하는 대청국

浮萍草 2014. 8. 5. 09:26
    ㆍ10. 융성하는 대청국 희대제는 광개토대제 이후 최고의 영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배달민족의 자랑으로서 그는 광개토대제의 모든 장점을 구비한 이외에도 60여년 간이나 황제로서의 지난한 임무를 거의 완벽하게 수행하며 장수를 누리기까지 했다. 실로 대청국은 강희대제가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세계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희대제 자신의 표현을 빌면, "15인의 힘이 필요한 활을 가지고 평생동안 호랑이를 135마리,곰을 20마리 표범을 25마리 이리를 96마리 잡았다."고 하는 출중한 무예와 용기를 지니고서 60여년 재위 기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문에 골몰 하는 열성을 끝까지 견지했다. 한족(漢族) 출신의 어느 왕들이 그와 같은 지혜와 용맹을 지녔었단 말인가? 대제는 진실로 배달민족의 정기가 결집된, 배달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대청국의 황제들은 한족들의 탐욕스런 왕들과는 달리 배달민족 전래의 홍익인간적 이념과 천손(天孫)의식이 강했다. 강희대제는 입버릇처럼"짐은 하늘의 종복(從僕)이다."라고 되뇌이며 탐욕에 기울기 쉬운 천박한 인간적인 심성을 잡으려 애썼고 다음 황제인 옹정(雍正)황제도 "하늘에 따라 나를 버린다(즉 나의 편안을 추구하지 않고 천하를 편안케 하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한다)." 는 신념으로 일체의 사리사욕을 배제하고, 공평무사하고도 대의에 어긋남이 없는 문명인류다운 바른 정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한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강희대제는 당시 서양에서 쉴 새 없는 전쟁을 통하여 약간의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던 과학지식의 실용적 측면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연구에 힘썼다. 강희대제 당시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출입이 잦았는데 대제는 예수회 신부들로부터 천문학·수학·통계학 등 서양에서 다소 진전을 보이고 있던 학문들도 열의를 가지고 배우기도 했다. 대제는 벨기에 출신의 페르비스트 신부를 천문대장에 임명하고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을 만주어로 번역하도록 후원해 주기도 했다. 또한 대제는 통일제국의 정확한 판도를 지도로 작성하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이자 지리학자이던 레지(Regis)신부를 시켜 광활한 황국 내의 모든 지역을 실측케 했다. 당시 조선과의 사이에서 간도지방을 둘러 싼 경계문제가 가끔 발생했으므로 대제는 특별히 만주지방의 강계확정에 주의를 기울여 공정하게 측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측량을 근거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서 두 동족국가 간에 충돌의 여지가 없게 했다. 30여년 간에 걸친 레지신부의 상세한 측정 결과 작성된 지도(皇輿全覽圖)는 황제를 만족시켰고 프랑스로도 보내진 지도는 프랑스의 지리학자 당빌(D'Anville)이 편찬한'지나지도(L'Atlas de la Chine)'에도 기재되었다. 지도에 의하면 조선의 지명이 꺼우리(KOULI 즉 고려)로 표시되어 있는데 그러한 사실은 조선 민중이 여전히 고구려(=고려=꺼우리)의 후손으로 자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편이기도 하다. 강희대제는 말초적이고 지엽적인 서양의 과학에만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아니라 파괴되고 일그러져서 본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되어 버린 중원지방의 문명을 복구하는 데도 노력하여 고대학문에 대한 연구와 정리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 당시에 고전 연구가 왕성해진 데 대하여 이백여년 후의 계몽적 지식인 양계초는 이 시기를 '중국의 르네쌍스'라고 얼토당토 않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의 르네쌍스라는 게 '야만에의 복귀' 또는'야만시대의 재생'을 뜻하는 데 비하여 강희대제의 고전부흥사업은 '문명에의 복귀'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제는 동양문화권 인류문명의 집대성을 의미하는'강희자전(康熙字典)' 편찬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고금의 도서를 총정리하여 일만여권에 이르는'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을 편찬토록 하기도 했다. 역사연구에 있어서도 민족이나 종족적 감정에 좌우되어 온 예전의 중원지방 학풍인 편협한 화이관(華夷觀)을 일소하고 어디까지나 실록(實錄) 등의 정확한 문헌을 기본 자료로 하는 객관적이고도 인류 보편적인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창시했다. 주자학자들에게 있어서의 역사란'한족'들만의 역사만을 뜻할 뿐이었던 것으로 중원지방 중심으로 꾸며진 매우 오만하고도 편파적인'소설류(小說類)'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강희대제의 모든 시책들은 인류문명의 대도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으며 비뚤어진 주자학에 젖어 있던 조선의 고루한 학자들에게도 점차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어서 조선에서도 소위'실학'이 왕성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온갖 학문연구와 황국의 평화정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던 성군(聖君) 강희대제가 입고 다니던 옷은 질이 낮은 비단옷에 불과했고 궁귈의 경비(經費)는 명 나라 시대의 1/40에 불과한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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