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과학 이야기

16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浮萍草 2014. 7. 10. 09:55
    우리가 동경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

    ㆍ자연에 대한 불편한 진실 양에서의 자연(自然)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서양에서의 해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을 뜻하는 ‘nature’는 ‘본질적인 성질’이나 ‘타고난 기질’을 뜻하는 ‘나투라’(natura)에서 유래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자연을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고향’으로 여기고 묘한 매력에 빠져 그리워한다. 하루 빨리 복잡한 도시에서의 비(非)자연적이고 반(反)자연적인 삶을 정리하고 포근하고 안락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자연 본래의 모습을 되살린다는 이유로 자취를 감췄던 반달곰과 여우와 황새를 복원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자연을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야생(野生)의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고 믿는다.
    ㆍ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
    거칠고 황량한 진짜 자연의 모습

    지구 표면의 70%는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잔잔하고 드넓은 바다가 우리에게 소중한 먹거리와 훌륭한 휴식처를 제공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누구나 여유가 생기면 아름다운 바닷가에 멋진 별장을 짓고 낚시를 하며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바다를 편하게 여기기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태평양의 수온이 조금만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지구 전체의 기후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지구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자부하는 우리가 엘니뇨와 라니냐의 정체와 파괴력은 아직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거대하고 광폭한 태풍이 만들어지는 곳도 바다다.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환상에 젖었던 적도 있지만 바다는 지금도 우리에게 지극히 위험한 곳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 가는 횡포를 부리는 곳이 바로 바다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육지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아마존과 동남아시아의 열대 우림(정글), 시베리아의 툰드라 알래스카의 동토(凍土) 아프리카와 중국 내륙의 사막 오스트레일리아의 황무지, 중국 내륙의 산악, 히말라야와 티베트의 고원 몽골의 초원 남극의 빙하가 모두 인간이 안심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척박한 곳이다. 생존은 고사하고 접근조차 거부하는 곳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다. 실제로 자연 환경이 뛰어난 유럽과 아시아의 태평양 연안과 북아메리카의 해안과 오대호 부근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부 해안을 포함해서 인간이 대규모로 정착해서 살고 있는 지역의 면적은 육지 면적의 14%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 전체 면적의 4%에 지나지 않은 수준이다.
    ㆍ힘들게 시작한 문명 생활
    과도한 농경에 의한 염화(鹽化)의 흔적.

    우리가 처음부터 문명(文明)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600만 년 전 아프리카 남부의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걷기 시작했던 인류는 1만 2천 년 전 지금의 이라크 북부와 터키에 해당하는 ‘초생달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기까지는 다른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수렵채취(狩獵採取) 생활을 했었다. 인간의 탐욕이 미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가족 단위로 떠돌면서 열매를 따먹거나 뿌리를 캐먹고 약한 짐승을 만나면 잡아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맹수의 공격도 피해야 하고 어둠과 추위와 더위와 산불의 위험도 극복해야만 했다.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았던 원시인에게 자연은 아늑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거칠고 위협적인 자연 환경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야생의 다듬어지지 않은 삶은 위태롭고 고달펐다. 생명의 존엄성, 고상한 아름다움, 조화로운 공존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농경목축(農耕牧畜)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다고 언제나 넉넉한 수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연산에서 어렵게 얻어낸 작물의 품종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농약이나 비료도 없었다. 오로지 사람의 노동력에만 의존하는 무공해·유기농의 생산성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7명이 죽을 힘을 다해 농사를 지으면 10명이 입에 풀칠 할 정도를 수확할 수 있었을 뿐이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홍수와 가뭄을 이겨내는 것도 힘들었고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감염성 괴질(怪疾)과 역병(疫病)도 심각한 문제였다. 생산성이 극도로 낮았던 농경목축 시대의 사회적 불평등도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농경목축에 의한 환경 파괴도 심각했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초기 농경에 의해 초래된 염화(鹽化)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자연이 우리에게 편안한 안식처라는 생각은 과거를 잊은 우리의 착각이고 환상이다. 오히려 우리 인간은 위험한 야생(野生)에서 탈출해서 편안하고 안전할 삶을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고 꿈이었던 것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ㆍ자연 복원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산불 덕분에 번성했던 자이언트 세콰이어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가 끝나갈 무렵부터였다.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 과학혁명으로 가능해진 산업혁명 덕분에 우리가 충분한 풍요와 안전을 누리게 된 결과였다. 자연을 보존하는 노력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었다. 1864년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협곡에서 모든 상업적 개발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1872년 옐로스톤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도 링컨의 그런 노력 덕분이었다. 오늘날 요세미티와 옐로스톤은 자연 보존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알려져 있다. 우리도 1968년에 국립공원을 지정했고, 1980년부터는 자연공원법을 제정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보존이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요세미티 공원에서 인디언을 이주시키고, 소방대를 조직해서 산불을 적극적으로 관리했지만 결과는 황당했다. 애써 지키려고 했던 우람한 자이언트 세콰이어가 빠르게 사리지고,그 자리에 산불에 취약하고 볼품도 없는 활엽수들이 번성했다. 낯선 외래 식물도 등장했다. 식물상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갈색곰과 캘리포니아 콘도르도 멸종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다. 순진한 의도에서 시작한 산불 진화 노력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요세미티의 교훈은 명백하다. 자연의 보호나 복원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사실 보호와 복원에는 우리 자신의 자의적인 의도와 욕심이 담겨있고 자연 보호와 복원이 우리의 생각처럼 순진한 시도가 아닐 수도 있다. 자연의 복잡하고 난해한 작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많은 비용과 노력을 투입해서 애써 가꾸고 있는 국립공원이 우리가 정말 원하는 자연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의 어설픈 노력 때문에 요세미티의 산불 진화처럼 생태계가 더욱 망가져 버릴 수도 있다.
    Premium Chosun         이덕환 서강대 교수 duckhwan@sogang.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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