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금관공동체 6

浮萍草 2014. 2. 25. 12:56
    우리가 발굴해낸 화려한 천마총 금관
    영국의 엑스칼리버 대 한국의 환두대도 사국시대는 금관 공동체이자 고리자루 큰 칼 공동체이다
    1960년대 경주 교동에 사는 이가 3년 동안 자기 집에서 시작한 땅굴로 파고 들어간 고분에서 꺼냈다고 하는 금관.다른 다섯 개 신라 금관에 비해 가장 고졸한
    모양을 하고 있다(문화재청)

    ㆍ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한 교동금관 복 후 대한민국 사람이 찾아낸 최초의 금관은 무엇일까. 정답은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세칭 ‘교동금관’이다. 경주시 교동에서 나왔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출토지를 확인하는 정식발굴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전교동금관’으로 불러야 하는데 요즘은 전 자를 떼어내고 부르고 있다. 광복 후 최초로 나온 금관이 도굴로 나왔다는 것은 당시의 우리 국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교동금관은 경찰에 압수된 해조차도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1960년대 경찰이 압수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경주에는 고분이 즐비한데 대일항쟁기 그러한 고분에서 금관이 세 점이나 출토됐으니 독립은 했으나 가난하기 그지없는 민초들은 일확천금의 도굴을 꿈꾸게 된다. 과거 경주는 고분을 언덕인 줄 알고 끼고 사는 집이 적지 않았다. 금관총이 그랬다. 고분을 언덕인 줄 알고 흙을 파내다가 편평해져 버렸고, 편평해진 곳을 다른 일을 위해 파다가 금관이 나오기도 했다. 금령총과 서봉총이 그런 경우다. 교동금관도 그렇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에 최씨 성을 가진 어떤 사람(여러 군데 알아봤지만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이 경주 교동의 한 집에 전세로 들어가 3년 동안 땅굴을 파 금관 한 점을 꺼냈다 고 한다. 그는 이 금관을 박물관에 몰래 팔아보려고 하다가 검찰에 걸려 금관을 압수당했다. 이것이 교동금관 출현기의 전부다. 이렇게 해서 광복 후 최초로 나온 신라금관은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 금관은 초기에 제작된 듯 고졸(古拙)한 모습이다. 신라금관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출(出)자가 아닌 그에 가까운 ‘뫼 산(山)’형 ‘세움장식’ 세 개만 삐죽 올라와 있다. 미적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 금관은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사라진 가야 금관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때문에 학자들은 교동금관이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는 금관을 만들기 전에 금동관부터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의 금동관도 대개 ‘날 출 자’ 세움장식을 하고 있다. 때문에 이 금관은 조금은 특이한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 금관의 제작시기를 알려면 이 금관과 함께 나온 다른 유물(일명 동반유물)을 조사해봐야 하는데 도굴로 세상에 나왔으니 이 금관에는 동반유물이 없었다. 때문에 국보나 보물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ㆍ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환두대도 공동체
    5편에서 설명했지만 신라를 비롯한 고대 국가의 무덤에서 금관이 나왔다고 하여 그 무덤을 왕이나 왕비의 것으로 비정하는 것은 단견이다. 금관과 금동관은 왕이나 왕에 준하는 신라의 마립간 등이 쓴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앙의 귀족이나 지방 호족들 무덤에서도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절풍형 속관까지 나온다면 상투를 튼 성년 남성의 무덤일 가능성이 분명해진다. 한때는 환두대도가 나오면 남성 무덤으로 판단했으나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환두대도는 여성 무덤에도 넣은 것으로 보여 환두대도 여부로 남성무덤이냐 여성 무덤이냐는 판단하기는 어렵다
    보물로 지정된 천마총 출토 환두대도. 금관 금동관,환두대도와 실력자의 권세를 보여주는 위세품이다.마립간 같은 지도자 무덩뿐만 아니라 중앙의 귀족과
    지방 호족의 남성 무덤에도 금관(금동관)이나 환두대도가 부장품으로 묻히는 경우가 많다.최고 지도자가 아닌 아닌 무덤에서 나오는 금관(금동관)과 환두
    대도는 최고 지도자가 하사해준 위세품을 가능성이 높다.(문화재청 사진)

    오늘은 칼 이야기 좀 해보자. 환두대도는 칼의 손잡이 끝을 둥근 고리로 처리한 칼이다. 그래서 고리자루큰갈로 옮기기도 한다. 환두대도 중에는 고리 안에 새싻 잎이나 봉황이나 용으로 보이는 동물을 투조로 새겨놓은 것도 있다. 새싹 잎 세 개가 투조돼 있으면 잎파리 엽자를 써서 삼엽형(三葉形) 환두대도라고 부른다. 둥근고리를 세 개 만든 것도 있다. 올림픽 마크처럼 원형의 고리 세를 겹쳐 놓은 모양이다. 한자 품(品)자에서 네모 대샌 원을 넣은 모양으로 생각하면 된다. 품자형(品字形) 고리를 만드는 것인데 이를 ‘삼루형’으로 부른다. 삼루형(三累形) 환두대도인 것이다. 루(累)자의 뜻은 ‘묶다’이다. ‘묶을 루’자이다. 삼루는 고리 세 개를 묶어 놓았다는 뜻이다. 귀한 환두대도는 손잡이 부분에는 금실으나 은실을 감고 칼집에는 금을 상감으로 집어 넣었다. 이런 칼은 녹슬지 않았을 때는 매우 화려하게 보였을 것이다. 지금 장성 진급자에게 하사는 삼정검보다 훨씬 멋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에서는 ‘환수도(環首刀)’가 출토된다. 환수는 칼 손잡이가 둥근 고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환수도와 환두대도는 같은 형의 칼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우리와 일본은 환두대도, 중국은 환수도로 부르는 이해가 많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 환수도에 영향을 받아 우리의 환두대도가 제작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가장 오래된 환두대도의 제작시기는 중국에서 나온 가장 오래된 환수도와 제작시기가 비슷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두대도를 제작하고 중국의 환수도를 만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문화 해석에서의 문제점은 항상 우리는 외부로부터 문화를 받았을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는 것이다. 금관 금동관만 해도 과거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다 중앙아시아 금관과 우리 금관은 연관성이 없고 또 우리가 가장 융성한 금관 문화를 만든 것이 확인되면서 그 해석은 쑥 들어갔다. 요즘은 거꾸로 우리가 그곳으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도 나온다. 문화해석의 식민주의를 우리는 극복해야 한다. 근거도 없이 필요 이상으로 독자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부인부터 하고 보려는 경향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통일신라 말 도선에 의해 중국에서 풍수가 들어왔다고 배웠는데 고구려 무덤에 이미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풍수를 하려면 방향을 알아야 하는데 방향을 고구려 때 이미 중시한 것이다. 중국 풍수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풍수가 있었다. 그래야 우리도 좋은 곳에 성을 쌓고 무덤을 만든다. 우리는 산악이 많아 좌청룡-우백호 식의 풍수를 하기 좋다. 그러나 당나라의 수도인 낙양은 허허벌판에 가깝다. 산을 이용한 풍수를 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유행한 풍수가 신라 말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세를 이뤘다. 이러한 중국 풍수가 유행하기 전 우리는 우리 식의 풍수가 있었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즐비한 고구려 무덤과 경북 경주시에 몰려 있는 신라무덤 서울 풍납동에 있었던 무덤 등 많은 무덤들은 이유가 있어 그곳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무덤은 좌청룡-우백호 식으로 산을 의지하지 않는다. 동아일보의 안영배 기자는 학문으로 풍수를 공부한 전문가다. 그는 중국 풍수가 들어오기 전의 우리 풍수를 ‘기풍수(氣風水)’로 부른다. 우리는 기를 중시했으니 기감(氣感)이 좋은 곳에 무덤을 쓰는 기풍수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본다. 그런데 기감이 좋은 곳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좋은 사람은 드물다. 그러할 때 산을 의지해 좋은 자리를 찾는 중국 풍수가 들어오자 기감으로 찾을 때보다 명당을 찾는 것이 쉬워졌다. 자연지세를 이용해 명당을 찾는 중국 풍수는 기감에 의해 명당을 찾는 우리 풍수보다는 쉽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기에 우리의 기풍수를 누르고 중국 풍수가 유행하게 됐다고 안영배 기자는 말한다. 고대에 우리는 우리 풍수로 지도자를 묻을 명당을 찾아 금관 금동관 은관, 환두대도 등을 시신과 함께 껴묻었다(부장했댜). 고대에는 교류가 원할하지 않았기에 문화적 독창성은 더 강했다. 칼은 쇠로 만들었기에 금관-금동관보다 훨씬 빨리 부식한다. 무덤 속에 있을 때 칼집과 칼이 붙어 하나가 될 정도로 녹이 슬어 있다가 발굴하는 순간 많은 산소를 만나 급속히 부식된다. 때문에 화려한 금관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멋진 손잡이와 칼집을 가진 환두대도를 만드는 기술이 있어야 얇은 금판이나 금동판을 이용한 금관 금동관도 만들 수 있다. 당시 우리의 금속 다루는 기술은 세계적이었다. 환두대도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왕이나 그에 준하는 지도자가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호족 같은 지역 지도자게에 보낸 하사품인 경우가 많다. 그 지역 지배권을 인정하는 물품인 것이다. 지역 지도자로서는 그 지역을 대표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인가장이 되기도 한다. 환두대도는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이것을 가진 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이 된다. 환두대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마한 지역의 무덤에서도 공통으로 출토된다. 우리의 아류인 일본에서도 나오고 있다.


    ㆍ환두대도와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Excalibur)는 서양의 명검을 대표한다. 서기 6세기 영국에서 활약했다는 영웅 아서 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성검(聖劍)이 엑스칼리버다. 영국 웨일스 지방의 전설에 의하면, 아서 왕은 캔터베리 대성당 바위에서 뽑은 칼리번 검을 사용했는데 이 검이 전투 도중에 부러졌다. 아서 왕이 마법사 멀린에게 새 검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멀린이 아서 왕을 어느 호숫가로 데려갔다. 그러자 호수에서 나온 요정이 전해주었다는 것이 바로 엑스칼리버이다. 엑스칼리버는 명검이지만, 칼보다는 칼집이 더 큰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칼집을 가진 주인은 어떤 공격을 받아도 상처가 금세 치유된다. 칼집을 소유한 이는 불사신이 되는 것. 어느 날 멀린은 아서 왕에게 검과 칼집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는가를 물었다. 아서 왕은 당연히 검이라고 대답했다. 멀린은 “적을 베는 검보다는 몸을 지키는 칼집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엑스칼리버로 나라를 지키고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이지 적과 싸우라는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아서 왕은 엑스칼리버의 힘을 빌려 영국을 통일하고 게르만족을 바다 너머로 쫓아냈으며 로마 황제를 자칭하는 침략자를 물리쳤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엑스칼리버를 뽑지 않게 되었다. 그후 복잡한 정치 과정을 거치며 엑스칼리버는 다시 호수로 던져지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내전 상태에 들어가고 색슨족과 게르만족의 공격도 받게 된다. 켈트족의 전설에 의하면 그들이 절실히 원할 때 아서 왕이 다시 엑스칼리버를 들고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영국 전설에 나오는 엑스칼리버가 우리나라에서는 환두대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환두대도란 이름은 일본인들이 지었다. 칼의 모양을 보고 지은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칼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우리 조상들은 이 검을 무엇으로 불렀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금관 금동관은 신라가 당과 강한 동맹을 맺으면서 중국식 관모와 관복을 도입하면서 사라졌다. 통일신라 이후로는 금관과 금동관을 만든 사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환두대도는 계속 제작했다. 환두대도는 칼이 쭉 뻣은 것이 특징이다. 직도(直刀)인 것이다. 고려를 쳐들어온 몽공족은 칼등쪽으로 칼이 휜 곡도(曲刀)를 사용했다. 곡도는 직도에 비해 베는 것이 수월했다. 그 영향으로 우리도 살짝 휜 곡도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 칼은 칼집에 고리가 있어 허리띠에 맬 수가 있었다. 이러한 칼이 조선시대 많이 사용되며 ‘환도(環刀)’로 불리게 되었다. 환두대도는 직도이나 환도는 곡도이다. 이러한 환도의 한 형태가 일본도이다. 환도는 한 손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일본도는 두 손으로 휘두르는 곡도다. 참고로 지금 장성 진급자에게 수여하는 삼정검은 직검이다. 과거에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삼정도를 수여하다 2007년부터 양날이 있는 삼정검 수여로 바꾸었다. 장성 진급자는 삼정검을 받고 그후 진급할 때는 그 검에 새로운 ‘수치’를 단다. 봉건시대 임금은 전쟁에 나가는 군사지휘관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군사통제권을 주는 증거로 도끼인 ‘부월’을 수여했다. 삼정검은 부월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는 지휘검이다. 조선시대에 범 인(寅)자가 들어간 연, 월, 일, 시에 만든 검을 특별히 ‘사인검(四寅劍)’으로 부르며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인검을 모방해 만든 것이 삼정검이다. 삼정도는 약간 칼등쪽으로 휘어진 곡도였으나 삼정검은 직검이 되었다. 도(刀)는 한쪽에 만 날이 있고 반대편에는 칼등이 있어 무겁다. 따라서 내려치는 힘이 가중되는 효과를 낸다. 검(劍)은 양날이 있는 칼이다. 도보다는 가벼우나 양쯕으로 다 칠 수가 있다. 그러나 검으로는 잘 베이지지 않기에, 검은 창처럼 찌르는 용으로 썼다. 찌르기 위해서는 직선인 것이 좋으니 검은 직검이다. 곡도는 있어도 곡검은 보기 힘든 것이다.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할 때 수여하는 삼정검(우). 전두환 대통령 재임 당시 새로 진급한 준장에게 삼정도를 수여한 것이 관례로 정착되었다.종래 외날의
    삼정도(좌) 였던 것을 2007년 조선시대 사인검을 본뜬 양날의 삼정검으로 변경하였다. 동아일보

    ㆍ우리 손으로는 최초로 공식발굴한 천마총 금관
    천마도와 함께 나왔다고 하연 천마총이란 이름을 붙인 고분에서 나온 천마총 금관. 이 금관은 광복 후 우리가 발굴해낸 최초의 금관이고 매우 아름답다.
    세계적으로는 네 번째로 발굴된 금관에 해당한다(문화재청)

    광복 후인 1973년 우리는 우리의 기술로 천마총을 발굴했다. 이 무덤에서 금관 환두대도 등과 함께 하늘을 날아가는 천마(天馬)도가 함께 발굴되었다. 때문에 이 무덤 이름을 천마총으로 정했는데 이는 광복 후 우리가 붙인 최초의 무덤 이름이다. 천마총 금관은 신라 금관 여섯 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천마총이 금관이 아닌 천마도 때문에 구설에 오르게 된다. 천마가 그 당시에 무덤에 그림을 넣을 정도로 귀하고 신령스러운 존재였느냐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개 무덤에는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식으로 신령스러운 동물을 사신도로 그려넣는다. 말이 이러한 동물 수준으로 귀하게 여겨졌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기린도인가? 천마도를 엑스레이로 촬영해보니 머리에 외뿔이 있는 것이 보여,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출처: 경향신문, http://blog.daum.net/caillou/15940423)

    . 이 문제는 2000년 대구 효성가톨릭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이재중씨가 이 무덤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중국 무덤에서 나온 그림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이 그림은 말이 아니 기린이다'라고 주장해 본격화됐다. 말은 뿔이 없지만 기린은 머리에 외뿔이 있다. 말은 그 시절 상상의 동물이 아니었지만 기린은 상상의 동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천마도 논쟁은 2007년 기린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유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이 X선으로 천마도를 촬영했었는데 그때 나온 사진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외뿔이 보이는 것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기린총’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데 계속 ‘천마총’으로 불리고 있다. 무덤 이름을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가란 고민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바르게 만들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ㆍ여성 무덤에도 금관과 고리자루 큰칼을 넣었다
    경주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에서 나왔다고 하여 황남대총 금관
    으로 불리게 된 신라 금관.황남대통은 쌍분인데 북쪽 무덤에 나와
    황남대총 북분 금관으로 불리기도 한다.광복 후 우리가 두 번째로
    발굴해낸 신라 금관이다(문화재청).

    황남대총은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이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이 있는데 북분을 발굴하자 금관이 출토되었다. 한 해 전에 발굴한 남분에서는 은관이 나왔는데 북분에서는 여섯 번째로 신라의 금관이 나온 것이다. 북분에서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 꾸미개가 나왔는데 ‘부인의 허리띠’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한자 ‘부인대(夫人帶)’가 새겨져 있어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반면 먼저 만든 것으로 추정된 남분은 남성의 무덤인 것으로 보였다. 고리자루큰칼도 나왔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은관. 금관에서 보이는 출자 형이 아니라 깃털을 가진 새날개 모양의 세움장식이 있다.보물 631로 지정돼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gajan/120165501708)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은관을 복원한 것. '출' 자형 금관과는 세움장식이 전혀 다르다. (문화재청)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은 표주박 모양으로 연결된 쌍분이다. 남분을 먼저 만들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남분의 자락부분을 걷어내고 북분을 만든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북분에서는 약간의 인골이 나왔는데 60세 전후의 사람으로 판단되었다. 남분에서는 여러 자루의 고리자루자루 큰칼이 나왔다. 그중 하나는 길이가 77.4cm에 달했다. 이렇게 큰 칼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 이는 의식용, 위세용 칼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남성의 무덤을 추정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 '황남대총 유물 특별전' 왜 화제일까 서로 겹치고 포개놓은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청동그릇, 금동판, 구슬 등의 각종 유물.
    <사진 제공 오세윤 씨>

    이 무덤(남분)에서 은관이 나왔다. 그런데 세움장식의 모양이 금관과 전혀 달랐다. 깃털을 가진 새 날개 같은 세움장식이 있었다. 남자 무덤으로 보이는 무덤에서는 은관이 나오고 여성 무덤에서는 금관이 나왔으니 고대에는 금과 은을 똑 같이 중요시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고대에는 금이나 은 구리는 가리지 않고 모두 귀중한 금속으로 보았을 수 있다. 그러다 점차 금으로 귀중도를 높여왔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ㆍ우리로부터 문화를 받은 일본이 우리 역사를 만들다니
    황남대총 금관 발굴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금관을 출토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동관은 계속 출토되었다. 사국시대 왕이나 지역 지도자가 죽으면 그는 금이나 금동으로 만든 관을 쓰고 허리띠를 두르고 금속제 신발을 신고 환두대도를 차고 무덤방으로 들어갔다. 가히 금속인간으로 눕혀지는 것이다. 여성의 시신에는 환두대도를 차게 하지 않고 옆에 놓기만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 시대 지도자에 대한 보편적인 매장법이었다. 이러한 매장법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일본이다
    일본 후지노키 고분에서 나온 금동관 원형(사진 이정훈)

    후지노키 고분에서 나온 금동관(위)과 이 금동관의 녹과 때를 제거해 당시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모조품.후지노키 고분은 우리의 무덤 양식을 그대로 모방
    했다.우리에게 배워간 일본이 1500연년 후 거꾸로 우리에게 문화재 발굴을 가르쳐주고 우리 역사를 만들어주었다.우리는 지금 그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사진 이정훈)

    1985년 일본 나라(奈良)현) 이코마(生駒)군 이카루가쵸(斑鳩町)에 발견된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이 대표적이다. 1988년 일본은 이 무덤안에 있는 석관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금동관과 금동제 허리띠 금동제 신발,환두대도 등 우리 고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유물이 들어 있었다. 문제는 후키노키 고분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중에서 어느 쪽을 따랐느냐는 것인데 정설을 백제 쪽이다. 그렇게 우리로부터 문화를 전해 받은 일본이 1500여년이 지나 우리 땅에 무단으로 들어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역사를 조사하고 그 조사를 통해 대륙을 침략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때 우리는 일본 역사학자들로부터 실증사학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실증사학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그 역사가 있었던 지역을 규정하고 들어간다.

    평양에 고구려 무덤이 있으면 평양을 고구려 지역으로 확정해놓고 다음 사실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학은 평양에 있는 것이 고구려 무덤이 아니라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오랜 옛날 평양이라는 지명은 거듭해서 이동했다. 이는 수많은 사서가 증명한다. 따라서 북한의 평양이 과거의 평양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 북한 평양에서 무덤이 나왔다고 하여 이를 고구려 무덤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는 일본학자들이 만들어준 대로 백제는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갈려나온 백제는 그렇게 먼 곳에서 터 잡았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초기 백제는 요동반도 부근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요즘 학자들의 판단이다. 그리고 지금 북한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했을 수 잇다.
    대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들. 금동관은 금관과 달리 녹이 슨다. 이러한 금동관은 신라 영역 여러 군데에서 발굴되었다.
    이는 금관이나 금동관이 왕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작은 지역의 맹주는 중앙의 왕으로부터 그 지역을 지배하라는 뜻으로 이러한 금동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사진 제공 복기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기메(Guimet) 박물관에도 출(出)자 형 세움장식을 한 신라 금동관이 전시돼 있다.

    요동반도는 해상무역을 하는 최적의 장소이니 백제는 해상강국으로 성장했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에 거점을 두고 그곳을 잇는 무역을 한 것이다. 백제라는 국명도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나왔다고 하니 백제는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국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참 성장할 때인 근초고왕 시절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게 했다(371). 그러한 백제의 중요 거점이 관미성인 것으로 보인다.
    ㆍ이북 평양은 고대에도 평양으로 불렸는가?
    이 관미성을 고구려의 영웅 광개토태왕이 빼앗으면 백제는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백제는 한반도 북부로 줄어들었다가 경기 지역을 거쳐 충청도에 포진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3~5세기 지금의 북한 평양 지역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가 지배했을 수도 있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 뿌리에서 나왔기에 같은 동명왕을 시조로 모시는 등 문화가 비슷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절 이북 평양에서 나오는 것은 낙랑의 유물로 판단한다. 한4군을 설치한 한(漢)나라는 오래 전에 망했는데 한4군의 하나인 낙랑은 유지됐다고 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어디인지 제대로 비정하지 못해 생기는 혼란이다. 때문에 우리 역사학계는 장수태왕 이후 이북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정리했는데 중국 사서인 ‘요사(遼史)’ 등을 분석해보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 요양(遼陽)시 인근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판단을 따르면 이북 평양에 고구려의 지도자급 무덤이 있을 이유는 줄어든다. 그 시기 백제 세력이 이북 평양에 있었다면 이 무덤들은 백제의 것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는 마한의 영역을 한반도 서남쪽으로 좁게 비정해 놓고 있는데 마한은 그보다 훨씬 넓은 강역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지금 한반도 남서부에서 나왔기에 백제 유적으로 보는 것의 상당부분이 마한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한이 남하하는 백제에 밀려 지도권을 빼앗겼을 수도 있다. 고구려는 백제를 밀고 백제는 마한을 밀면서 내려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3국의 지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러한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추적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인하대 대학원 융합고고학과의 복기대 교수다. 고구려에 의해 밀리게 된 세력이 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에는 우리 문화가 전해진다. 금동관과 환두대도 등을 넣은 우리식 무덤이 다수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문화를 만들어준 일본이 1500여년이 지나 거꾸로 우리를 지배하며 일본이 우리를 지배한 것 같은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한 역사를 중국이 이용해 동북공정을 만들고 있다. 과연 초기의 고구려와 백제는 어디에 도읍을 했는가. 사서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 분석을 통해 초기 고구려와 초기 백제의 강역을 찾는 것이 우리 고대사를 바로 세우는 길일 것이다.
    Blog Donga   이정훈 동아일보 편집위원 hoon@donga.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