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금관공동체 7

浮萍草 2014. 2. 26. 06:00
    현풍도굴사건과 삼성의 금관
    한국 유물을 흡입해간 오구라 다케노스케 세 점이나 전해지는 가야 금관
    세상을 놀라게 한 현풍도굴사건 일당들이 경북 고령에서 도굴로 출토했다고 자백한 가야 금관.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가야 금관으로서는 우리가
    확보한 최초의 금관이기에 국보로 지정돼 있다.얼핏 보면 전편에서 소개한 경주의 교동금관과 비슷한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굽은옥(곡옥)이 댤개장식으로 달려
    있는 등 다른 점이 있다.그러나 신라의 다섯 개 금관에 달려 있는 드리개(금관 아래로 늘어뜨리는 장식)는 없다(출처 리움미술관).
    복 후 우리가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하게 된 것은,일제가 발굴한 신라 고분에서 세 개의 금관이 출토된 것과 함께 도굴로 세상에 나온 교동금관 사건, 그리고 1963년에 터져나온 ‘현풍도굴사건’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현풍도굴사건은 가야 금관을 세상에 나오게 했으니 조금 설명해보기로 한다. 삼성그룹이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가야 금관도 정말 소설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타났다.
    ㆍ5.16과 현풍 도굴사건
    지금은 도굴이 쉽지 않지만, 4·19가 일어난 1960년과 5·16이 일어난 1961년 어간에는 덜 그랬던 것 같다. 문화재에 대한 국민 인식이 약한 탓인지 도굴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때문에 생계형 도굴, 기업형 도굴범들이 등장했다. 그 시기 6편에 설렴한 교동 금관도 도굴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치적인 격변이 일어나 사정(司正)이 강화되면 도굴은 일시에 된서리를 맞는다. 1963년 2월은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하며 빠르게 한국을 변혁시키려 하던 때였다 (박정희 대장은 1963년 8월 30일 전역했다). 주체세력은 부정부패를 엄단했다. 박정희 장군의 대통령 출마가 거론됐으니 정치적 긴장감도 매우 높아졌다. 박정희 장군은 1963년 2월 27일 정치를 하지 않고 군인으로 남는다는 원대복귀 선언을 했다가 4월8일 군정 연장 조치를 밝혔다. 그리고 그해 8월 30일 대장으로 예편하고 10월15일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새로 등장한 정권은 국민 지지를 받기 위해서 기강을 다잡는 경향이 있다. 시대가 긴박해지면 수사 및 사정기관들도 깐깐하게 움직인다. 그러한 조짐이 강하던 1963년 2월8일 대구경찰이 무려 2년 동안 경북 달성군 현풍면을 중심으로 경북 남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고분을 파고 들어가 상습적 으로 부장품을 꺼내 판매하던 도굴꾼 일당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대구 경찰은 이들이 1961년 4월부터 검거될 때까지의 2년 동안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고분을 ‘대놓고’ 도굴해 400여점을 중개업자에게 넘겼다고 밝혔다. 경찰이 밝힌 도굴꾼 중에는 현풍면 지역 농민도 있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 2년 동안 대놓고 도굴을 했다는 것에 어의가 없어 언론은 이를 ‘현풍도굴’사건으로 명명하고 큰 관심을 보였다. 경찰은 이들의 배후에는 대구지역의 골동품 중개업자들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언론은 그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쏟았다. 경찰이 이 중개업자들로부터 도굴꾼들이 팔아달라고 갖다 준 많은 ‘명품’을 압수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이 삼국시대의 ‘금동(金銅)말안장‘이었다. 일본인들의 주문으로 제법 많은 고분이 발굴된 대일항쟁기 때도 금동말안장은 출토된 적이 없기에 이 사건에 대한 세인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도굴꾼들은 1961년 10월 경북 안동군 일직면의 한 무덤을 도굴해 이 말안장 등을 꺼냈다고 자백했다.
    ㆍ경찰과 검찰이 밝히지 않은 가야금관의 매수자
    경찰에 따르면 이들이 처음 도굴한 것은 현풍면 하동의 고려 고분이었다. 그곳에서 50여점의 고려자기를 반출해 대구에 있는 중개상인들에게 넘겼다. 고려자기를 넘겨받은 중개상인들은 그중 30여 점을 대구 J모직에 와 있던 일본인 하야시에게 판매하는 등 여러 사람에게 매매했다. 그런 식으로 도굴꾼들이 갖다 주면 중개상인들은 비밀리에 수요자를 찾아내 밀매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경찰이 압수하지 못한 명품은 무엇이고 그 명품은 누가 사갔는지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그 부분은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이 압수하지 못한 물품은 여러 단계를 거치는 거래가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소문은 무성했다. 소문은 남기고 수사는 종결됐다. 경찰의 조사를 받은 도굴꾼과 중개업자들은 1963년 3월 검찰로 송치돼 다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중개업자보다는 도굴꾼들이 순진했던 모양이다. 검찰 조사에서 한 도굴꾼이 1961년 가을 경북 고령의 한 고분을 도굴해 금관을 꺼내 중개상인에게 넘겼다고 자백했다. 도굴은 컴컴한 땅 속에 들어가서 하니 촉감이 예민해진다. 그는 그 유물을 보는 순간 금관임을 알았다고 한다. 금은 금동과 달리 녹이 슬지 않으니 금방 느낌을 잡는다. 그는 얼른 품속에 넣고 아무 일도 아닌 척하고 밖으로 나와 근처 수풀에 그 금관을 숨기고 다시 들어가 일당들과 유물 수습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일과가 끝난 뒤 다시 현장에 가서 그 금관을 수습해 혼자 팔아보려고 했다. 그러한 자백을 한 것이다. 그때는 천마총 발굴을 하기 훨씬 전이었다. 교동금관을 제외하고는 광복 후 처음 금관을 꺼냈다는 이야기인지라 검찰과 언론은 이 금관을 누가 사갔는지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검찰은 그 금관의 향방을 추적하지 않았다. 그 사이 여러 차례 매매가 이뤄져 추적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금관은 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가야 금관 출토는 소문만 나돌다 사그러들었다. 이 금관을 최종적으로 구입한 이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었다. 10년여 년이 지난 1971년, 이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의 호를 딴 ‘호암컬렉션’을 하면서 이 금관을 최초로 공개했다. 당연히 세인들의 관심이 쏠렸다. 문화재관리국은 이 금관을 진짜 가야 금관으로 판단하고 ‘국보 138호’로 지정해주었다.
    ㆍ호암 컬렉션으로 등장한 가야 금관
    국보 138호인 가야금관(리움금관)은 도굴품이고,고(故) 이병철
    회장이 편법으로 소유했다는 이경희 전 가야대 총장의 주장을
    실은 한겨레신문 1999년 1월28일자 기사.이에 대해 호암미술관
    (지금은 삼성미술관리움) 측은 이 총장이 소문만 믿고 무책임한 글을 썼다고
    반박했다.
    이 금관은 신라의'교동금관'과는 전혀 다른 운을 만나게 된 것이다. 가야 금관으로는 최초로 확보했다는 것이 국보로 지정된 첫째 원인인 듯 했다. 교동금관은 최초로 확보한 신라금관이 아니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 가야금관의 세움장식은 출(出)자형인 신라금관의 세움장식과 달랐다. 새싻이 솓는 모습 같았다. 그리고 굽은 옥(곡옥·曲玉)과 작은 원형의 금판을 신라금관처럼 달개장식으로 쓰고 있었다. 도굴꾼들에 따르면 이 금관은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고분군(群)에서 발굴돼다. 고령 지역에는 과거 고령가야 또는 대가야로 불리던 가야가 있었다. 때문에 지금 지산리에는 이 금관 모양으로 입구를 장식한 대가야왕릉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가야 금관 모조품이 전시돼 있다.
    ㆍ한국 유물을 흡입한 오구라 다케노스케
    일본 동경박물관 오구라 컬렉션에 전시돼 있는 가야금관. 일명 '오구라금관'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일항쟁기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을 하며 도굴로
    나온 많은 우리 유물을 수집해갔다.그중 하나가 바로 이 가야 금관이다.

    또 하나의 가야금관도 역시 도굴로 나왔다. 이 금관은 리움미술관이 가야금관을 확보하기 훨씬 전에 세상으로 나왔다. 이 금관은 대일항쟁기 때 대구에서 남선합동전기(南鮮合同電氣) 사장을 한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매입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라 ‘오구라 금관’으로 부를 수 있겠다. 오구라는 1870년 치바(千葉)현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을 나왔다. 첫 직장으로 ‘일본우선(日本郵船-배로 우편을 배달해주는 회사.일본은 섬나라이니 그 시절에는 우선회사가 있었다. 지금의 KT나 SKT 같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통신회사로 보면 되겠다)’이라는 회사에 들어갔다가 1903년 조선으로 건너와 대구전기(그후 남선합동전기로 바뀜)와 조선전력의 사장,대구상공은행장(대일항쟁기 때는 은행장을 頭取로 표기했다)을 지내며 조선에서 나온 문화재를 다량 수집했다. 6편에서 1933년 경주박물관 초대 관장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금관총 유물 8점을 빼돌린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고 밝혔는데 이 유물을 매입한 이도 오구가 다케노스케로 추정된다. 오구라는 대일항쟁기는 물론이고 6·25전쟁이 한창인 1950년까지 한국에서 나온 유물을 흡입했다. 대단한 문화재 애호가였던 것. 흔히 하는 말로 ‘일본인들은 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일본에 가보면 도처에 신사가 있다. 그런데 신사마다 모시는 신이 다르다. 개중에는 한국계가 분명한 인물도 신사에 모신다. 고구려인을 모시는 고마신사,백제인을 모시는 ‘백제왕신사’ 신라인을 모신 ‘가라쿠니신사’ 등이 남아 있다. 일본도 계국신화가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우리말로는 천조대신(天照大神)으로 읽어야 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최고의 신으로 친다. 그러나 아마테라스는 일본 왕실이 모시는 신일 뿐이다(그를 모신 곳이 이세신궁이다). 일본 전체가 아닌 왕실의 신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신, 모시는 신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적잖은 사람들은 “일본은 지진과 태풍 등 자연재해가 많고 섬이기에 빠져나갈 데가 없어 자신을 가장 잘 보호해주는 이를 신으로 모시게 됐다. 그 신이 한국계라도 잘 지켜주면 모신다”라고 말한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는 수많은 신이 존재하게 되었다. 신에 의지하는 습성이 강하다 보니 신기한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 물품도 숭배한다. 신물(神物)이나 신기(神器)를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무덤에서 1500여년 만에 나온 금관을 신물-신기로 여긴다. 그러한 물건을 갖고 있으면 일이 잘 되고 집안이 보호받을 것으로 믿는다. 물론 금전적인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1500여년이 넘은 금관은 수십 억원의 가치가 있다. 아니 경매장에서 거래된 적이 없으니 값을 모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구라도 그런 생각으로 조선에서 나온 신기를 적극적으로 수집해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문화재를 수탈당한 것이 된다. 때문에 지금도 한국은 오구라가 가져간 우리 유물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반복하고 있다. 자기 역사를 자신 있게 끌고 나가지 못한 민족은 이렇게 뒷북을 치게 된다.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지금의 우리나라를 똑 바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다시 문화재를 뺏기는 역사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1903년 조선통감을 하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숨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91~1909)도 대표적인 조선 유물 수집가로 꼽힌다. 그는 고려청자를 다량으로 밀매입해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루베 지온(軽部慈恩,1897~ 1970 )이라는 일본 고고학자는 조선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백제 유물을 다수 가져갔다. 이 세 사람은 대일항쟁기 우리 유물을 가장 많이 가져간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러한 오구라가 죽자 그의 아들이 1981년 이 금관을 비롯해 아버지가 모은 유물 1040여 점을 도쿄(東京)박물관에 기증했다. 때문에 이 금관은 도쿄박물관 ‘오구라(小倉) 컬렉션’에서 볼 수가 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갖고 간 한국 유물을 기증 받아 전시하고 있는 일본 도쿄박물관 정문(사진 이정훈)

    궁금한 것은 이 금관의 출토지이다. 오쿠라는 경남 창녕시에서 도굴로 나온 유물을 주로 수집했기에 이 금관은 창녕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는 지금의 창년 지역에 후기 6가야 중의 하나인 비화가야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금관에서는 풀잎이 양쪽으로 갈라져 솟은 듯한 세움장식이 눈길을 끈다. 도굴과 관련해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전고령금관(리움금관)을 매입해준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가 매입해주지 않았다면 현풍도굴범들이 일부 유물을 일본인에게 넘긴데서 알 수있듯 이 금관도 일본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실력자들은 신물을 원하고 한국의 거간꾼은 거액을 원하니 ‘있어서는 안 되는 거래’가 이뤄지게 된다.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일 때 우리의 부호들이 유물을 확보해준 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것을 지켜야 하니까.
    ㆍ호림박물관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가야 금관
    가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가락국)이다. 이름대로라면 금관가야에서도 금관이 나와야 하는데 금관가야가 있었던 경남 김해 일대에서는 아직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다. 금동관만 여러 개 나왔다. 금관가야에서는 금동관만 나오고 다른 가야에서 금관이 출토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윤장섭 선생이 수집해 자신의 호를 따서 만든 호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가야 시대 금관. 일명 '호림 금관'이다.상당히 단순한 모습이다.역시 도굴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한국에는 리움금관과 호림금관 두 개의 가야 금관이 남아 있다.리움금관과 달리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다.(출처 호림박물관)

    우리나라의 3대 사립 박물관으로는 삼성미술관리움과 고 전형필 선생의 유물을 모은 간송미술관 그리고 수집가로 유명한 윤장섭 선생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세운 ‘호림박물관’이 꼽힌다. 호림박물관도 가야시대 것으로 주장하는 금관을 하나 갖고 있다. ‘호림금관’으로 불리는 이 금관은 가장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장식 없는 관테에 앞에는 나무줄기 형상의 세움장식 하나 뒤에는 더 작은 세움장식 하나를 세워놓았다. 호림박물관 측은 이 금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가야 금관임을 증명할 증언이나 자료 없이 가야 금관이라고 주장만 한다.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도 설명을 하지 않았다. 윤장섭 선생 자녀를 포함한 박물관 측에 수차례 연락해봤지만 응답이 없거나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호림박물관은 문화재청에 평가나 감정을 요구한 적이 없기에 이 금관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을 받으려면 소장자가 신청을 해야 한다. 소장자의 신청이 있어야 문화재청은 위원회를 열어 감정을 한 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호림 박물관은 아직은 이러한 신청을 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 같았다. 이는 삼성의 이병철가(家)와는 다른 태도라 주목된다. 호림금관은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야금관보다 더 고졸하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국내에 두 개, 일본에 한 개의 가야 금관을 갖게 되었다. 총 아홉 개의 금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씨가 조부 때 입수해 집안에 비전(秘傳)해온 전강서금관을 내놓았다. 리움금관이 도굴로 나왔으나 국보로 지정된 것은 도굴 여부가 국보나 보물 같은 국가 지정문화재가 되는데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는 청자나 백자의 99%는 도굴로 무덤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시대의 청자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현실세계를 통해 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랫동안 무덤에 있었기에 숱한 자연재해와 전란, 그리고 사고를 피해 지금에 전달되게 되었다. 때문에 청자와 백자는 정확히 출토지를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어느 시대에 제작한 것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의 도자기도 많이 본 전문가들은 청자와 백자의 제작시기를 어느 정도 추정해줄 수 있다. 진품과 위조품고 판별해 낸다. 그러나 그러한 판별에는 가끔 시비가 붙는다. 어떻게 판정하느냐에 따라 유물 가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KBS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보았듯이 그러한 판단을 근거로 청자와 백자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됐다.
    ㆍ모두 도굴로 나온 가야 금관, 드리개가 없다는 공통점도 있다
    가야의 금관은 모두 도굴로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라금관은 교동금관을 제외하고는 전부 정식발굴(금관총 금관도 경찰이 했지만 정식 발굴로 보자)로 나왔는데 가야 금관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어느 것 하나도 출토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 동반유물도 없다. 동반유물이 있어야 시대 측정이 용이한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가야 금관이 6편에서 소개한 신라 교동곰관과 함께 드리개가 없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드리개는 한자로 어렵게 ‘수식(垂飾)이나 ‘수하식(垂下飾)’으로 적던 것이다. 한자 뜻 그대로 밑으로 늘어뜨리는 장식이다. 신라의 다섯 개 금관을 보면 관테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장식이 있는데 그것이 드리개다. 적잖은 사람들은 금관을 죽은 자를 위한 관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박선희 교수의 판단은 다르다. 그는 “드리개는 금관의 중심을 잡아준다.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금관을 써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드르개가 있다는 것은 신라 금관을 산 사람들이 썼다는 증거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 쓴 것은 아니고 제사를 지내는 등 의례를 할 때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면 무덤에 함께 넣어주었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드리개가 가야 금관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가야금관이 신라금관보다 발달 정도가 더디다는 뜻일 수 있다. 이른 시기에 제작됐다는 의미다. 드리개가 있다는 것은 금관을 많이 써본 다음에 추가한 장식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드리개가 전강서금관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전강서금관도 신라금관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전강서금관에는 드리개가 있었는데 떨어진 것일까? “`알 수가 없다. 무덤에서 나오는 금관 금동관은 납짝한 형태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죽은 자에게 씌워 놓았기 때문이다. 산 사람은 직립 보행을 하니 금관이 머리에 똑 바로 올라간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뉘어져 있으니 금관도 옆으로 놓이게 된다. 그리고 무덤 안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시신이 사라지므로 금관은 자체 무게만으로도 서서히 밑으로 눌려 납작한 모양이 된다. 무덤에서 나오는 금관은 관테를 밑으로 해서 바로 놓인 게 아니라 납짝하게 눌려서 옆에서 보는 모습으로 나온다. 5편 사진으로 보여준 서봉총 금관의 출토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금관 금동관을 꺼내 손을 대야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은 금관 금동관이 된다. 도굴로 나온 것이 분명한 전강서금관은 리움 금관처럼 국보나 보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는가. 김씨는 그 스스로가 문화재 전문가이기에 강한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금관이 1500여년 전에 제작됐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니시하라에 대해 추적하지 못했는데 기자는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 그가 종로구 명륜정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라면 1943년에서 1945년 사이 이 금관을 김씨 조부 에게 팔았을 것이다라는 추정까지 해놓았다. 그는 이 금관의 진품 여부를 제대로 평가받아보겠느냐는 질문에 어떤 사람들이 이 금관을 감정하는지를 보고 판정 받을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Blog Donga   이정훈 동아일보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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