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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漢 武帝의 河源탐색과 天馬의 의미 <난주2>

浮萍草 2014. 1. 24. 06:00
    곤륜산과 天馬는 漢 武帝가 만든 작품?
    
    ㆍ양가죽뗏목(羊皮筏子)이 흘러가는 황하
    
    난주는 남북으로 두 개의 산을 마주보고 있다. 
    남쪽은 고란(皐蘭)산 북쪽은 백탑(白塔)산이 다. 
    황하는 두 산 사이에 위치한 난주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서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는 난주에서 황하를 건넌다. 
    하서주랑의 요충지이자 서역으로 향하는 지름길과도 같은 곳이 난주인 것이다.
    난주에 오면 누구나 백탑산을 오른다. 
    산 정상에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황하와 난주시내 그리고 멀리 황토고원까지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탑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탔다. 
    황하를 가로질러 오르는 케이블카는 난주 시내를 흐르는 황하를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백탑산에서 본 난주 전경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황하는 용처럼 꿈틀거리며 흐른다. 그 위에 유람선도 떠 있고, 철교도 있어 사람들이 오고가지만 모두가 작아 보인다. 마치 용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살에 언제라도 휘둘릴 것만 같다. 그런데 그 사이로 관광객을 몇 명 태운 뗏목이 허위허위 거센 물살을 헤집고 나아간다. 자칫 잘못하다간 강물에 빠질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뗏목도 이상하다. “저 사람들이 탄 것은 양피파즈(羊皮筏子)예요. 양가죽에 바람을 넣어서 만든 뗏목인데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이러한 뗏목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황하를 건넜는데 1t까지도 거뜬하다고 한다. 보기보다는 튼실하고 요긴한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피파즈를 타려면 적어도 거센 강물의 흐름을 계산에 넣어야 할 듯하다. 관광객을 태운 양피파즈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황하 물살에 떠내려가다시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가죽 땟목
    “양피파즈로 강을 건너려면 2킬로미터는 내려간다고 생각해야 해요.” 이제는 황하철교가 놓여 편안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지만 양피파즈는 옛날의 기억을 되살리는 관광 상품으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백탑산에 오르니 황하와 난주 시내는 물론 저 멀리 황토고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에는 백탑사를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대다수의 난주 시민들이 자주 찾는 명소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난주는 그야말로 꿈틀대는 황하를 따라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지리적 이점을 한몫 단단히 보고 있는 것이다. 백탑산에서 황하와 난주 시내를 굽어보고 있자니 당나라 때의 시인 고적(高適)이 난주의 누각에 올라 느낀 감회가 절로 이해가 된다.
    백탑산 정상의 백탑

    북루에 올라 서쪽을 보니 맑은 하늘 가득하고 北樓西望滿晴空 휘돌아 흐르는 물과 연이은 산이 그림보다 멋지다. 積水連山勝畵中 우당탕 흐르는 물소리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 같고 湍上急流聲若箭 성 위에 걸려 있는 새벽달은 활과 같구나. 城頭殘月勢如弓
    ㆍ한무제가 ‘곤륜산’을 찾은 이유
    한무제(漢武帝)도 황하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치수보다는 황하의 발원지인 곤륜(崑崙)산을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곤륜산은 일반적인 산이 아니라 하늘과 통하는 곳으로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는 성스러운 산이기 때문이다. 무제는 흉노에게 오랫동안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흉노정벌을 계획하고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대완국(大宛國: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역)과 맹약을 맺고 한혈마를 구해오도록 한다. 장건은 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흉노에 사로잡혀 있다가 13년 만에 귀국한다. 그는 한혈마를 구해오지는 못하였지만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무제에게 제공한다. 그중에는 황하의 발원지인 곤륜산도 포함되어 있다. 장건은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가 안식국(安息國:이란지역)의 서쪽으로 수천 리 지점에 있다는 소문만 가지고 돌아온다. 신화 속의 곤륜산과 서왕모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마가 나왔다는 악와지

    다만, 황하의 발원지가 우전이고 그 남쪽에 옥돌이 많은 산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설명하자 무제는 그 산을 곤륜이라 명명한다.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이 아닌 것을 알면서 무제는 왜 그 산을 곤륜산이라 불렀을까? 황하의 발원지와 곤륜산 그리고 서왕모는 무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흉노는 한(漢)을 괴롭혔다. 한은 제국의 안녕을 위하여 흉노와 굴욕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하였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무제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칼을 갈았고 황제에 오르자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한 법.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내세운 명분이 황하의 발원지 확인과 천마의 획득이었다. 황하는 곤륜산에서 흐르니 중국인의 기원과도 같은 황하의 발원지인 곤륜산을 찾는 것은 중원의 지도자로서 지극히 합당한 결정이다. 흉노에게 쫓겨 간 월지를 찾아 동맹을 맺고 천마를 획득하는 일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업은 모두 흉노의 영토를 지나야만 하였다. 그러니 전쟁은 필연인 것이다. 무제가 흉노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흉노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흉노와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민족정기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무제의 논리에 장수들과 병사들의 의기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ㆍ한무제에게 天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마는 왜 필요했을까? 보병부대가 다수를 차지하던 때에 튼튼한 몸통에 빠르고 오래달리는 말로 구성된 기병부대는 보병부대를 압도하는 최신병기였다. 그런데 그냥 말도 아니고 말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천마로 기병부대를 갖춘다면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확장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될 게 뻔하다. 이는 대완을 정벌하고 획득한 천마를 보고 지은 한무제의 ‘천마가(天馬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천마가 오도다天馬徠 서쪽 끝從西極 사막을 건너서流沙涉 사방 오랑캐가 복종하도다九夷服 천마가 오도다天馬徠 모든 문을 열라開遠門 내 훌쩍 올라타고竦予身 곤륜으로 날아가리니 逝崑崙 천마가 오도다天馬徠 용의 짝이려니龍之媒 온 하늘을 노닐며 遊閶闔 신선이 되어보려네觀玉臺
    한무제는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천마를 얻어야만 하였다. 그리고 천마의 획득은 곧 하늘(天)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를 토벌하는 대임(大任)을 부여받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신선이 되고픈 염원을 밝힌다. ‘천마가’는 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제례가(祭禮歌)인 것이다. 제국의 황제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천하제패다. 이를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또 동원된다. 황하도 신화도 천마가도 천하제패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러한 황제의 뜻을 ‘한서’ ‘무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악와수(渥洼水)에서 말이 출현하여 짐이 곧 그 말을 부렸노라. 전전긍긍, 대임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두렵도다. 하지만 천하를 생각하며 스스로 새롭게 하노라. ‘시경’에도 있지 않은가. “나는 듯한 4마리 수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복종하지 않는 자 토벌하네.”라고.
    ㆍ神仙이 되고픈 무제, ‘天馬’를 만들다
    무제는 천마 획득에 혈안이 되었다. 그 이유는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한 것이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무제 자신이 천마를 타고 곤륜산에 가기 위함이었다. 무제는 신선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길 염원하였다. 흉노를 무찌르고 제국을 확장시킨 그리하여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건설한 영원한 천자(天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방사(方士)들을 가까이 하였다.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가 불사의 약을 가지고 있다고 믿은 것도 신선이 되고픈 무제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무제는 한나라 황제로서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였지만 한편으로 천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을 믿고 있었다. 그는 이 두 세계를 적절하게 연결시키는 통치술로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을 추구하는 동시에 강력한 제국 건설에 매진한 것이다. 한무제가 천마를 얻었다는 악와수는 돈황 지역에 있다. 돈황 시내서 서남쪽으로 70㎞ 정도가면 남호향(南湖鄕)인데 악와수는 이곳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있다. 인근에 수창성(壽昌城)이 있어서 ‘수창해(壽昌海)’ 또는 ‘수창택(壽昌澤)’이라고도 한다. 악와수를 보기 전에 수창성에 들렀다.
    폐허가 된 수창성

    갈대가 어지러운 곳에 ‘수창성고지(壽昌城故址)’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 팻말이 없다면 이곳에 성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다. 갈대를 헤치고 나아가니 모래뿐인 언덕이 나타난다. 언덕을 오르니 그야말로 사막평원이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토성의 흔적이 있어서 예전에 이곳이 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갈까. 모래바람이 서너 번 불어오면 아예 사막 속에 묻혀버릴 것이니 ‘오래도록 번창하라’고 지은 이름도 자연 앞에서는 모래알처럼 짧은 시간인 것이다. 폐허의 고성을 돌아보고 악와지로 향한다. 악와지는 과연 옛 모습이 남아있을까. 마을 골목을 지나 약간의 오르막길을 오른다. 여기저기 늪지대가 보이고 숲이 무성하다. 그야말로 오아시스다. 언덕을 오르니 조잡하게 조각된 천마상 너머로 거대한 호수가 보인다. 호수주변은 그야말로 넓디넓은 초록이다. 한눈에 보아도 천연의 목장이자 경작하기에 비옥한 땅이다. 호수 가에는 오리와 양떼들이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다. 악와수는 이곳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수자원이다. 그래서 지금도 ‘황수파수고(黃水垻水庫)’로 불리며 저수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악와수에서 천마가 나온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악와수에서 천마가 나온 것이 되었을까. ‘한서’에 이르길 하남성 신야현 사람 포리장(暴利長)이 죄를 지어 돈황으로 유배를 와서 둔전을 하였는데 악와수 강변에서 물을 마시는 야생마들 사이에서 아주 기이하게 생긴 말을 발견하고 이를 잡아 길을 들인 후 무제에게 바쳤고 무제는 아주 흡족해하며 ‘천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마에 대한 무제의 집착은 병적이었다. 특히 신선이 되고픈 무제에게 천마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하지만 천마는 일반적인 말과는 달라야하였다. 그런 무제에게 포리장이 바친 말은 천마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악와수에서 나온 ‘신마(神馬)’로 둔갑된 것이다.
    ㆍ黃河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백탑산에서 황하를 굽어보며 내려오니 유명한 중산철교(中山鐵橋) 앞이다. 중산철교는 황하에 건설된 최초의 철교다. 원래 이 자리에는 1372년인 명나라 태조 때부터 부교(浮橋)가 있었다. 그런데 1907년, 청나라 정부가 물산의 수송과 교통의 편리를 위하여 독일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이 철교를 세웠다. 당시 명칭은 ‘난주황하철교’였는데 1942년부터는 중국 혁명의 선도자인 쑨원(孫文)의 호를 따서 중산철교로 바꿔 부른다.
    황하철교인 중산교

    철교는 사람과 자전거만 오갈 수 있게 하여 한껏 여유롭다. 황하의 물살을 내려다보며 철교를 따라 걷자니 갑자기 삼장법사 현장이 떠오른다. 장안을 떠나 인도로 향한 승려들은 모두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야 하는데 현장이 황하를 건넌 곳이 이곳 철교 부근이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물살이 거셌을 텐데 꽤나 고생하지 않았을까? 관광객들이 양가죽뗏목을 타고 래프팅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위로 긴장된 얼굴로 황하를 건넜을 현장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런데 현장은 오히려 나의 그러한 생각이 걱정되었는지 부처님 같은 미소로 시 한 수를 읊어준다. 그 누가 말했나, 황하는 넓다고 誰謂河廣 마음먹으면 갈대 하나로도 건널 수 있는 것을 一葦枯之 그 누가 말했나, 황하는 길다고 誰謂河遠 마음먹으면 발돋움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을 跂予望之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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