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양비론을다시 본다

浮萍草 2013. 11. 10. 13:15
    한영우가 말하는 율곡의 양비론과 우리 시대의 양비론
    "보수·진보 통합이 곧 우리 시대의 선비정신"
    난 11월 4일 오후 ‘호산제(湖山齊)’. 서울대 후문 인근 관악산 자락의 한 아파트에 마련한 원로 국사학자의 개인 연구실은 책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호산제’ 주인인 한영우(75) 교수는 “‘호산’이 내 고향인 충남 서산의 옛 이름”이라며 “집에 책을 둘 곳이 없어 아파트를 따로 마련했다”고 했다. 벽에 걸린 액자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갑골문자로 쓴 한자가 적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병정(秉貞), 곧 ‘곧게 잡아라’ ‘사필을 바로잡아라’란 글자야. 한문학자 이가원 선생이 퇴계 선생이 쓰던 한지에 직접 써준 글이지. 발음은 별로지만 뜻이 좋아 평생 새기고 있어.” 한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하고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지난 10년간 이화여대 석좌교수도 지냈다. 지금은 후학 양성도 중단하고 일반인 상대 특강만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70㎡(20여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저서들을 쏟아내는 중이다. 올해만 해도 6권의 책을 썼다고 했다. 이 중 4권은 수년간 연구해온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 시리즈다.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한 1만5000명의 신분을 족보를 통해 분석한 역저다. 올해 초 태조부터 선조까지를 다룬 1권이 나왔고, 최근 광해군부터 영조까지를 다룬 2권이 출간됐다. 중조부터 철종까지의 3권과 고종시대를 다룬 4권은 출판사에 원고가 넘어갔다고 한다. “내가 들여다본 건 조선시대 미천한 집안 출신들이 얼마나 급제했느냐는 대목이었어요.
    이른바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이지. 결론이 뭐냐고. 조선은 사회적 이동성이 엄청난 사회였어요. 진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였고 이 힘이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어요. 이 핵심이 탕평이지 당파를 아우르는 정치적 탕평만 아니라 지역적 계급적 탕평 심지어 불교를 끌어안는 사상적 탕평까지 이뤘어요. 일례로 조선시대 각 성씨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과 성씨별 과거 급제자 비율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해요. 성씨만 기준으로 삼아도 인재들을 골고루 썼다는 얘기죠. 조선 후기를 관통한 사상과 제도를 만든 율곡 선생이 강조한 게 이 탕평과 중용이었는데 그 방법론이 조제보합(調劑保合·색다른 것들을 보해서 합치자) 양비양시론 (兩非兩是論)이었습니다. ” 한 교수를 찾은 건 바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양비양시론을 듣기 위해서였다. 과거 기회주의와 동의어로 여겨졌던 양비론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새삼 주목받는 분위기 속에서 전통시대 양비론의 대표적 주창자로 알려진 율곡의 생각을 따라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흔히 양비론은 양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결국 모두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는 무책임하고 한가한 태도로 비쳐온 게 사실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조선시대 황희 정승의 인식구조가 이러한 양비론의 전형으로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요즘의 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모든 사안을 네 편, 내 편으로 구분 짓는 진영논리는 오히려 양비론을 그립게 만들었다. 시인 고은은 10월 26일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불가피하게 양비론자가 됐다”며“우리는 중도가 없다”고 개탄했다. 정치 재개를 선언한 정봉주 전 의원(민주당)도 지난 11월 5일 S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게으른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자”고 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과)는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양비론에는 양쪽의 잘못을 적당한 비율로 지적하는 황희 정승류의 기계적 양비론만 있는 게 아니라 독립적 시민들이 각각의 이슈들을 성찰적으로 판단하면서 자기 언행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유기적 양비론도 있다”며 “사실과 합리성에 입각해 49 대 51을 명료하게 공론장 에서 짚어주는 전문가들과 깨어있는 시민들이 늘어나야 진영논리가 희석된다”고 지적했다. 한영우 교수는 율곡이 양비양시론을 꺼내든 배경과 관련해 “요즘의 진영논리가 당시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율곡이 태어난 무렵 조선조 사회는 극심한 보혁 갈등 이른바 당파 싸움에 휩싸였고 사화(士禍)가 잇따르며 반대파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한 교수는 “지금의 보수파라 할 수 있는 서인은 건국공신 세력과 임금의 외척이 합해진 훈척이었고 진보파로 분류될 수 있는 동인은 사림들이었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년), 명종 때의 을사사화(1545년)를 거치며 진보파가 보수파에 완전히 당했다”며“율곡이 이 두 사화를 거치고 나서 활동했다는 점이 중요 하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율곡은 태생적으로 사각지대에 선 딜레마적 인간, 회색인이었다고 한다. “율곡의 집안인 덕수 이씨는 세종 때의 외척인 청송 심씨와 사돈이 됨으로써 외척의 외척 지위에 오른 보수파였습니다. 특히 율곡의 증조 이의석의 동생 이의무의 두 아들인 이기·이행 형제는 당시 세도가였던 심통원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권력을 휘둘렀죠. 율곡의 부친인 이원수의 경우 이기 덕분에 나이 50에 벼슬을 했습니다. 하지만 율곡은 세도가의 힘을 빌린 남편을 비판한 사임당처럼 아버지 집안을 천성적으로 싫어했습니다. 율곡에게 영향을 끼친 건 어머니 사임당이었고 사림파였던 외할아버지였습니다. 뿌리는 보수파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사림파를 자처한 사람이 율곡이었습니다.” 말에 그친 게 아니라 율곡은 보수파와의 연을 끊어가며 스스로 사각지대로 들어갔다. 율곡은 어머니 사임당이 죽은 지 2년 후인 나이 19세 때 당시 유교사회에서는 엄청난 이단인 중이 되기로 결심하고 금강산에 들어간다. 그러다 자경문(自警文)에서 밝혔듯이 불교 신앙을 버리고 과거시험장으로 향한다. 그를 기다린 것은 유생들의 반감이었다. 당시 유생들은 중이었던 인간과는 과거도 같이 볼 수 없다며 율곡을 요즘말로 왕따시켰다. 이때 율곡을 챙겨준 사람이 당시 세도가였던 심통원이었다. “율곡은 보수파에 붙었으면 쉽게 출세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길을 스스로 끊어버립니다. 벼슬길에 나서자마자 자신을 도와준 세도가 심통원을 내쳐야 한다고 반기를 들죠. 어찌 보면 인간적으로 배신의 길을 걸은 겁니다. 율곡의 양비론은 간단치 않은 얘기이고 율곡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겁니다.” 율곡은 당시 권력을 잡은 보수파도 공격했지만 진보파인 사림에도 비판을 가했다. 기묘사화의 주역인 조광조에 대해 “깨끗하고 존경할 만하다. 계승하겠다”면서도 그의 이상주의가 “너무 조급하다”고 비판했다. “율곡의 조광조 비판은 작사무점(作事無漸), 직전태예(直前太銳)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일을 꾸미는 데 점진성이 없고 너무 날카롭고 예리하다는 뜻입니다. 율곡에 따르면 조광조가 꿈꾼 이상사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겁니다. 대신 율곡은 하루에 하나씩 고쳐나가겠다는 점진주의를 들고나옵니다. 바로 경장(更張)이라는 이념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이 없던 시대에 율곡이 주창한 경장은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보수와 혁신이 충돌한 소용돌이 속에서 선비들이 떼죽음당하는 걸 지켜본 율곡이 택한 길이 곧 점진주의였다. 뿌리는 보수파에, 정신은 진보파에 있으면서 보수와 진보, 서인과 동인을 통합하고자 애썼다. “치열한 당쟁 속에 사람이 죽고 이상 실현도 못하는 걸 율곡은 지켜봤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진보파가 혁명을 하지 않는 이상 극보수파가 칼을 뽑으면 다 죽습니다. 또 급진파가 권력을 잡아도 보수파는 다 죽고 기성질서는 무너집니다. 그래서 기성질서도 살리면서 진보파도 살리고 궁극적으로 백성도 살리는 길을 율곡은 택한 겁니다. 그것이 중용, 중도의 길로서 경장이고 그 방법론으로 얘기한 게 조제보합, 양비양시론입니다. 무조건 너는 나쁘다고 하면 합칠 수가 없으니 나쁘지만 좋은 점도 있다는 양비양시론을 들고나온 거죠.” 한 교수는 “율곡이 내건 경장의 목표는 백성이고 핵심은 민생 문제였다”며 “당시 백성의 원성 대상이었던 공납과 군역 개혁안을 율곡은 들고나왔고 이게 나중에 대동법, 균역법 개혁 등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율곡의 양시양비론은 당시 보수·진보 양쪽 모두로부터 배척당하고 무시당했다. 특히 율곡이 정신적 동지라고 강조한 사림들도 그를 “보수의 찌꺼기”로 몰아붙이며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서애 유성룡까지 율곡의 양병론을 겨냥해 ‘양병(養兵)은 양화(養禍)’, 즉 군대를 키우는 건 화를 키우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율곡 살아생전에 서애는 ‘너는 능력이 없다’며 율곡의 개혁안과 선을 그었죠. 그러다 율곡이 죽은 뒤 8년 후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야 땅을 치면서 율곡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평가합니다.” 당시 서애를 비롯한 동인들이 율곡의 개혁안에 대해 반기를 든 이유는 시대를 정확히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한 교수의 지적이다. 당시 사림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봤고 사서삼경을 외워 과거에 급제한 뒤 녹을 타면 그만이라는 식의 인생관에 젖어 있었다. 유교의 핵심인 수신(修身)을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율곡은 달랐다. “율곡은 토붕와해(土崩瓦解)로 자기 시대를 평가했습니다. 담벼락과 기와가 부서지고 서까래가 내려앉아 솜씨 좋은 목수가 오지 않으면 곧 무너질 집으로 본 거죠. 조선 창업기와 수성기 200년을 거치며 중쇠기(中衰期)에 왔다고 본 겁니다.” 이 대목에서 노 학자는 갑자기 현실로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우리도 중쇠기에 와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지금 우리 역시 창업기의 발랄함도, 수성기의 원숙함도 없는 중쇠기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뚜렷한 의욕도 목표도 없이 서로 싸우기만 하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은 율곡처럼 시대의 흐름을 면밀하게 봐야 합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정확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지금 경장하지 않으면 몇 년 못 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율곡의 예언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율곡의 양시양비론, 보혁 통합의 노력이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했지만 율곡이 이룬 성취는 컸다는 것이 한 교수의 해석이다. 만약 율곡이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율곡이 국방 개혁 등을 관철시키지 못해 결국 임란 때 맥없이 당했지만 율곡의 노력 덕분에 선조 시대에는 사화가 없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율곡이 보혁 한쪽에 섰더라면 다시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겁니다. 이런 율곡의 통합 노력 때문에 율곡 사후 임란이 벌어졌을 때 의병이 일어나고 그나마 통합된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노 교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율곡이 선조에게 건의한 탕평이, 박근혜 대통령의 탕평으로 이어졌다. “율곡은 보혁 통합을 위해 탕평을 주문했습니다. 탕평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결국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선조에게 군사(君師)가 되라고 주문했죠. 율곡이 쓰기 시작한 군사라는 말은 권력자이자 도덕적 성인을 말합니다. 영어로 ‘king(왕) & teacher(교사)’라 할 수 있지요. 군사가 돼야 할 수 있는 게 곧 탕평이고, 탕평하는 사람이 곧 군사입니다. 요순처럼 만민을 골고루 끌어안는 사람, 그게 성인이고 군사라는 겁니다. 율곡은 숙종 때부터 경연(임금에게 유학 경전을 강의하는 것)의 교재가 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만들어 선조에게 읽고 군사가 되라고 충고했지만 선조는 ‘능력이 없다’ ‘자격이 없다’며 이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율곡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게 영조와 정조입니다. 만약 영·정조 때 탕평으로 조선이 기력을 되찾지 못했다면 우리가 고종 때 일본에 그렇게 버틸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때의 에너지가 있어서 일제와 싸울 힘이 생긴 것이고, 그 힘이 살아나 지금 우리가 크고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조상들의 에너지가 축적되고 살아나서 우리가 앞으로 나가는 겁니다. 율곡 선생이 주창한 조제보합과 양비양시론, 그로부터 끌어낸 탕평과 소셜 모빌리티가 그만큼 값집니다.” 한 교수는 “요즘 시대에 탕평을 얘기하면 왕정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비판하지만 아직도 탕평은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의 문제를 돌아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탕평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선거 때 다 끌어안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대로 하면 됩니다. 52%만이 아니라 48%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대통령을 만든 건 국민이지 새누리당이 아니잖습니까. 우리도 서구처럼 정당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우리는 미국과 같은 뿌리 깊은 양당정치가 자리 잡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우리 정당들은 정당사를 쓰기도 힘들 만큼 이합집산을 거듭한 급조 정당들 아닙니까. 결국 대통령은 국민을 바라보며 탕평정치를 해야 합니다.” 한 교수가 탕평을 강조하며 우리 시대를 우려하는 이유는 지금의 이념 대립과 진영 논리가 조선시대의 당파싸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 교수는 “사화는 전쟁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사화 때 사약 받고 죽은 사람들은 전체 비율로 보면 그렇게 많은 게 아닙니다. 대부분은 유배를 간 정도지요. 하지만 우리는 광복 후 좌와 우가 서로 총을 들고 죽였잖습니까. 죽지 않으면 서로 용서가 되지만 죽이고 죽으면 그게 한이 맺혀서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최근 정치사를 보더라도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때 일본에 납치돼 갔지만 결국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를 할 수 있었죠.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이유야 어찌됐든 죽음으로 몰렸기 때문에 지금 친노파들이 그렇게 극성스럽게 된 것 아닙니까. 보수든 진보든 서로 한이 맺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적을 죽게 만드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율곡의 양비양시론, 보혁 통합 노력이 면면히 이어져온 것도 사실이라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좌우 합작, 보수와 진보가 한길을 걸었던 역사가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징검다리처럼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서로 살육만 하지 않으면 예나 지금이나 이념 차이는 그렇게 이를 갈 정도가 아닙니다. 광복 전만 해도 좌우 인사들이 사이좋게 지낸 예가 많습니다. 예컨대 우파인 정인보 선생과 좌파인 백남운 선생은 무척 친했습니다. 백남운 선생이 정인보 선생에게 한문을 배워서 쓴 책이 명저인 ‘조선사회경제사’입니다. 또 좌파인 홍명희 선생은 정인보 선생과 사돈을 맺기도 했습니다.” 현대정치사를 보더라도 좌우 통합은 6·25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큰 흐름이었다고 한다. “중도우파의 대표자가 민세 안재홍 선생인데, 민세는 좌우를 통합하는 중앙당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신간회 운동이 이 일환이었죠. 나중에 이 정신에 입각해 탄생한 국민당의 강령을 보면 요즘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합쳐져 있습니다. 의회주의에다 기간산업의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됐죠. 이러한 국민당 강령은 대한민국 건국 강령으로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좌우 통합의 노력, 중도파의 흐름은 6·25를 계기로 철퇴를 맞았다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6·25의 살육으로 인해 “차이를 인정하던 경쟁자가 적으로 변했고 감정과 한이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6·25가 우리 민족에게 준 상처는 엄청나고 그 상처는 단기간에 치유가 안 된다”며“한 맺힌 사람들이 감정적 평가를 자제해야 다음 세대가 좀더 편안하게 새로운 이념과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한 교수는 요즘의 진영 논리를 잉태한 첨예한 현대사의 이슈들을 율곡의 양비양시론으로 진단해 나갔다. “지금의 진영 논리는 6·25를 겪은 한 맺힌 윗세대만이 아니라 198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양극화를 겪은 젊은이들의 이념화가 만들어낸 측면도 큽니다. 내가 가르친 1980년대 제자들만 해도 시골서 올라와 밥 세 끼도 못 먹는 친구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좌파가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요. 그렇다고 산업화를 주도한 사람들을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만도 없습니다. 경제 발전 없이 국민소득 87달러 시대에는 민주주의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 시대만 해도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만 씌워 있었지 민주주의를 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독재를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독재를 안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한 교수는 “친일파를 어떻게 보느냐도 마찬가지”라며 말을 이었다. “일제 때 협력했다는 사람들도 좋아서 했겠습니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크지요. 성전(聖戰) 독려 강의를 하고 돌아와 ‘내가 왜 더럽게 살아야 하느냐’며 통곡했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기록이 저는 진심이었다고 봅니다. 스스로 참회가 있었던 것이죠. 그 행위 자체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한 교수는 “내가 이렇게 양비양시론으로 얘기하면 누구는 좌로, 누구는 우로 몰아붙이는 게 현실”이라며 “극우와 극좌가 너무 극성을 부리다 보니 시비를 따지면 기회주의로 몰고, 자기와 조금만 색깔이 다르면 우로 좌로 몰아붙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한 교수는 “다들 마음에 여유가 없고 양비양시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며“지금의 좌우 대립을 낳은 역사적 맥락을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인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잘못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계속 감정을 개입해 세상을 바라보면 사방에 적밖에 없습니다. 전부 불신하게 되고 이게 결국 우리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이적(利敵) 행위입니다. 예컨대 나만 애국자라는 인식이 결과적으로 사회 통합을 어렵게 만들고 북한 김정은만 좋게 만드는 겁니다. 주관적 애국과 객관적 애국은 다릅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객관적 애국자가 더 많다고 봅니다.” 한 교수는 “율곡의 통합 노력과 영·정조 시대의 탕평, 광복 이후 중도파의 역사 등은 우리에게는 큰 힘이고 자산”이라며 “그런 언덕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역사의 징검다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도 그걸 놓기가 좋은 겁니다. 그게 역사의 누적된 힘, 잠재된 힘입니다. 그걸 내다보고 희망을 가지면서 깨끗한 사람들이 통합을 해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회가 올 것으로 봅니다. 보수·진보 통합이 곧 우리 시대의 선비정신입니다.”
    Chosun     정장열 조선일보 부장대우 jrchung@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