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법정 스님의 수필을 읽다가 스님이 11월의 산을 가장 좋아한다는 구절을 보고 ‘나도 그런데’라고
맞장구를 치다가 좋아하는 이유가 전혀 달라 역시 수준 차이가 난다고 깨달은 기억이 난다.
한낮에도 주위를 어둠컴컴하게 했던 무성한 잎들이 떨어지면서 숲이 밝아진 게 스님이 11월을 좋아한 이유
(비움의 깨달음)였던 반면 필자는 그저 벌레들이 사라져 맘 편히 걸어 다닐 수 있어 좋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에는 말벌 같은 위협적인 곤충이 돌아다녀 정신을 사납게 하는데 올 가을은 유난히 많았다.
필자가 아침에 다니는 앞산 산책 코스 가운데는 100미터 정도 말벌들이 상존하는 지점이 있어 아예 ‘말벌
구역’이라고 명명했는데 한창 때인 10월 중순에는 이 구간을 지날 때 말벌 이삼십 마리가 보였다.
따라서 왕복하면 오십여 마리와 마주치는 셈이다.
물론 말벌들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으므로 쏘이지는 않지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벌초를 하거나 밤을 따다가 실수로 말벌집을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
실제로 말벌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고가 생기기도 하는데, 전국적으로는 매년 수십 명이 말벌에 희생
된다고 한다.
필자 생각에 이 가운데 말벌떼의 공격을 받아 벌독의 작용으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대부분은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라는 급성 전신 알레르기 반응으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경우일 것이다.
사실 아나필락시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알레르기에 시달리고 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천식 시도 때도 없는 재치기에 콧물이 줄줄 흐르는 알레르기성 비염 너무 가려워 피가 날 때까지 벅벅 긁는 아토피성 피부염 등
증상도 다양하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 이제 열에 두세 명은 된다는 것.
ㆍ열에 두세 명은 알레르기 증상 보여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멋진(?) 이론이 바로 ‘위생 가설’이다.
현대인들은 위생상태가 너무 좋아 면역계가 할 일이 없어져 예전 같으면 신경도 안 쓸 꽃가루를 적으로 인식해 죽기살기로 달려들어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킨다는 것.
이와 관련한 좀 더 구체적인 이론 하나가 바로‘기생충 가설’이다.
우리 몸에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을 퇴치하기 위한 ‘제1형 면역계’(독감백신은 이 면역계를 활성화한다)와 맨눈에도 보이는 벌레인 기생충을 퇴치하기
위한 ‘제2형 면역계’가 있다.
그런데 기생충을 잡으라고 있는 제2형 면역계의 오작동이 바로 알레르기라는 것이다.
제2형 면역계의 작용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사실 필자도 잘 모르지만).
기생충이 분비하는 특정 단백질이 면역글로불린E(IgE)라는 항체에 달라붙으면 TH2림프구를 자극한다.
그 결과 TH2림프구는 더 많은 IgE를 만들고 여러 신호분자를 분비해 일련의 대응반응이 일으킨다.
즉 호산구라는 면역세포가 기생충을 공격하고 점막에 있는 배상세포가 증식해 점액을 많이 만들어 낸다.
한편 비만세포와 호염구라는 면역세포는 히스타민을 비롯해 여러 물질은 분비해 평활근 수축(기침) 가려움증(긁으면 이 같은 해충을 쫓는 효과가 있다)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오늘날 웬만큼 사는 나라에서는 기생충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반면 미생물에는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제2형 면역계가 할 일이 없어져 알레르기가 만연하게
됐다는 것.
실제로 알레르기성 장염증질환을 고치는 방법으로 기생충을 먹는 요법이 실시돼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토록 광범위한 알레르기가 단지 기생충을 통제하는 면역계의 오작동 결과일 뿐일까. 정말 그렇다면 우리 몸은 너무 엉성하게 진화한 게 아닐까.
▲ 벌독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독성을 중화하는 역할을 해 과도한 양에 노출됐을 때 생존율을 높여준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말벌의 침 끝에 독이 맺혀있다. - 사이언스 제공
학술지 ‘면역학’ 최신호에는 알레르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함을 시사하는 연구결과 두 편이 나란히 실렸다.
꿀벌의 독이 유발하는 알레르기 반응이 결국은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인데 비슷한 내용이므로 그 가운데 하나인 미국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의 루슬란 메디즈
히토브 교수팀의 실험을 소개한다.
연구자들은 먼저 쥐에게 꿀벌 독을 약간 주입했다.
그 결과 벌독에 들어있는 포스포리파아제A2라는 효소가 제2형 면역계를 작동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포스포리파아제A2는 세포막을 이루는 인지질을 녹여내 결과적으로 세포를 파괴시키는 효소로 벌독뿐 아니라 여러 독의 주성분이다.
연구자들은 다음으로 치사량의 독을 위의 한 번 노출된 쥐와 대조군인 그렇지 않은 쥐에 주입했다.
그 결과 처음 독을 접한 쥐는 여럿 죽은 반면 한 번 노출돼 제2형 면역계가 활성화된 쥐는 살아남았다.
알레르기 반응으로 분비된 단백질분해효소가 포스포리파아제A2를 바로 파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아나필락시스라는 치명적인 알레르기 반응 역시 벌독에 대한 제2형 면역반응의 극단적인 형태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ㆍ거부가 존재 이유인 세 가지 현상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마지 프로펫(Margie Profet)의 1991년 논문을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는데 이 논문에서 알레르기를 독소에 대한 면역방어체계로 본 ‘독소 가설
(toxin hypothesis)’이 처음 제안됐기 때문이다.
즉 이번 연구결과는 알레르기 독소 가설을 입증한 셈이다.
1958년생으로 올해 55세인 마지 프로펫은 정말 기이한 인물이다.
그녀 자신 학계의 알레르기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한 프로펫은 졸업 뒤 돌연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물리학과에 입학한다.
이미 죽어버린 뇌의 ‘수학 영역’을 되살리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1985년 졸업을 한 프로펫은 웨이터로 일하면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걸 생각해볼 시간을 갖기로’ 하고 진화생물학을 혼자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날 물리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성학 세미나를 하던 저명한 독성학자인 브루스 에임스는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프로펫의 영민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다 프로펫이 웨이터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에 놀라 그녀를 고용해 논문 편집 일을 맡긴다.
그런데 그 일 가운데 하나가 훗날 ‘에임스 테스트’로 불리는 특정 물질이 암이나 돌연변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방법을 다룬 작업이었다.
에임스 테스트에 관한 문헌을 정리하던 이 팔자 좋은 여인은 1986년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임신 초기 입덧을 하는 건 태아 형성기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물질을 거부하려는 행동이라는 해석이다.
이렇게 시작된 인체의 거부 패러다임은 곧 알레르기로 이어진다.
즉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는 알레르기 역시 우리 몸에 들어온 해로운 물질을 내보내기 위한 거부의 몸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988년 어느 날 프로펫은 월경 역시 성관계 등으로 질내에 있을지 모를 유해한 물질(세균)을 배출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렇게 ‘거부 3부작’의 개념이 완성됐다.
프로펫은 1988년 학술지‘진화이론’에 입덧이 기형유발물질로부터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했다는 가설을 담은 논문을 실었다.
에임스 교수의 작업도 마무리가 되고 돈이 떨어진 프로펫은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대 인류학과 박사과정을 등록하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괴로워한다.
이런 와중에 1991년 알레르기 독성 가설 논문을 ‘계간생물학리뷰’에 실었고 1993년 같은 학술지에 월경이 정자에 딸려온 병원균을 배출하는 방어기작이라는 주장을
담은 논문을 게재했다.
진화생물학 박사학위는커녕 학부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30대 초반의 늦깎이 인류학도의 외도에 많은 생물학자들이 불쾌해했지만 20세기의 다윈이라는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조지 윌리엄스 같은 거장이 프로펫의 편을 들어주면서(월경 가설은 빼고) 프로펫은 맥아더재단이 주는 ‘천재’ 장학금의 수여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 1990년대 초 유해 외부 물질에 대한 인체의 거부반응 이라는 관점에서 입덧과 월경 알레르기의 기능을 제안해 생물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마지 프로펫.생활력이 없는 천재의 삶을 보여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 Psychology Today 제공
이제 의식주 걱정을 덜게 된 프로펫은 박사과정을 때려치우고 시애틀로 가서 워싱턴대에서 수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천문학과의 객원연구원 생활을 몇 년 한다.
1996년 한 잡지와 한 인터뷰를 보면 그녀는 이미 거부 3부작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좋은 이론이 되려면 좋은 실험이 따라야 하는데 자신은“실험에 재능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2000년 여전히 맥아더 장학금으로 생활하고 있던 프로펫은 다시 하버드대로 돌아와 수학을 공부했는데 당시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지인들은 회상했다.
결국 프로펫은 2005년 무렵 홀연히 사라졌고 누구도 그녀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2012년 월간지‘심리학 투데이’5월에 프로펫을 다룬 장문의 기사가 실렸고 얼마 뒤 보스턴에서 가난과
질병에 피폐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5월 16일 프로펫은 가족(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993년 맥아더 천재 장학금 수상자로 선정된 뒤 프로펫은 한 인터뷰에서“역사를 거슬러보면 진짜 뛰어난
과학자들은 다 부적응자였다”며“과학성과가 나오는 한 부적응자로 사는 것도 좋다”고 말한바 있다.
2000년대 들어 프로펫의 방황은 과학성과가 나오지 않은 결과였을까.
아무튼 프로펫의 거부 3부작 가운데 입덧 가설은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고 알레르기 가설도 점점 설득
력을 얻고 있는 분위기다.
ㆍ알레르기 없는 게 다행?
다시 알레르기 얘기로 돌아가서 이번에 벌독 실험 결과를 낸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 루슬란 메디즈히토브
교수는 지난해 학술지 ‘네이처’에 방어체계로서의 알레르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에 따르면 제2형 면역계는 크게 네 가지 유형의 환경 위협으로부터 우리 몸을 방어하기 위해 진화했다.
즉 기생충 독성 비생체성분(xenobiotics) 독과 흡혈체액(모기 타액 같은) 자극유발물질(매연 같은)이다.
이 가운데 기생충을 제외한 나머지 세 유형 즉 제2형 면역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비감염성 환경자극을 뭉뚱그려 알레르기유발물질(allergens)이라고 불러왔던 것.
그런데 우리 몸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이런 물질들이 과연 인체에는 해가 없는 것일까.
새집증후군으로 아토피가 심한 아이들을 시골의 나무집에 보내면 증상이 사라지는데, 새집증후군을 일으키는 휘발성유기화합물이 몸에 유해한 작용을 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알레르기 하면 꽃가루를 생각하고 알레르기가 몸에 무해한 물질에 대한 면역계의 오작동이라고 간주해버리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날 알레르기를 일으
키는 물질의 상당수는 정말 몸에 해로운 것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레르기 독소 가설을 따라가면 평소 알레르기 증상이 없는 사람들은 몸에 독소가 많이 쌓여 그로인한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다.
과연 그럴까.
미국 코넬대의 저명한 신경생물학자 폴 셔먼과 아내인 진화생물학자 자넷 쉘먼-셔먼은 1953년 이후의 논문을 뒤져 알레르기와 암의 관계를 조사했다.
발암물질이야말로 대표적인 독소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놀랍게도 알레르기와 암발생이 서로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인체에서 외부와 닿아있는 즉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나는 부위인 입과 목 대장 피부 폐 등에서 이런 관계가 두드러졌다.
평소 주위에서 알레르기로 시달리는 사람을 보면서 ‘안됐다’라거나 ‘까다롭기는…’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독소도 분별할 줄 모르는 ‘둔감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물론 지금도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코를 훌쩍거리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같은 사람은 자신을 민감하다고 자책할 게 아니라 ‘섬세한’ 사람이라고 위안해도 좋을
것이다.
☞ Dongascience ☜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