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캐나다 소설가 앨리스 먼로. 단편에 대한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 노벨재단 제공
"한사람이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것은 언제나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에 불과한 것일까요? 라고 우리에게 묻는 듯 한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는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 소설가 조경란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
- 2009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선정 경위 중에서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지난 수십 년 간 대중의 관심을 받았던 피터 힉스가 수상했음에도 뜻밖에 조용하다.
지난해 힉스입자가 발견되면서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기 때문일까.
대신 올해는 노벨 문학상이 화제다.
국내에도 수많은 팬이 있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받은 것도 아닌데 별일이다 싶었다.
그런데 수상자인 캐나다의 작가 앨리스 먼로에 대한 기사를 보니 화제가 될 만하다.
1931년 태어난 먼로는 올해 82세로 작년에 단편집‘Dear Life(친애하는 삶에게)’를 출간한 뒤 지병(암)으로 60여년의 작가 생활을 접었다
고 한다.
먼로는 단편 전문 작가로 1968년 출간한 첫 단편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시작으로 총 14권의 단편집을 냈고 ‘맨 부커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먼로는 단편소설가로는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경우라고 한다.
먼로는 수상소감을 묻는 질문에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여성이 고작 열세 명 뿐”이라고 말해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먼로 단편집 가운데 네 권이 번역됐는데(현재 한 권은 절판) 지난 토요일 필자는 점심을 먹은 뒤 단골카페에서 케냐AA 핸드드립 커피를
홀짝이며‘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펼쳤다.
먼로가 작가생활을 시작한 1950~1960년대 작품들이 수록돼 있는데 두 세대 전에 썼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모던했다.
앞의 ‘맨 부커상’ 선정 경위 코멘트처럼 단편 하나를 읽을 때마다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ㆍ실험에 먼로 단편 포함돼
그런데 문득 며칠 전 학술지 ‘사이언스’에 소설을 읽으면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났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10월 3일 온라인에 미리 공개된 논문으로‘문학소설을 읽으면 마음의 이론이 향상된다(Reading Literary Fiction Improves Theory of
Mind)’라는 제목이다.
미국의‘사회 연구를 위한 뉴스쿨’의 데이비드 키드와 에마누엘 카스타노는 소설 가운데서도 스릴러나 로맨스 같은 대중소설이 아닌 문학성이 높은 소설을 읽으면
마음의 이론 즉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을 높일 수 있다고 가정하고 실험을 설계했다.
저자들은 5가지 실험을 했는데 첫 번째 실험은 문학성이 높은 단편 세 편과 비소설 세 편 가운데 피험자들이 임의로 한 편을 읽게 하고 공감 능력을 테스트했다.
혹시나 하고 단편 목록을 봤는데 먼로의 작품은 없고 단편의 거장 안톤 체홉의 작품 ‘카멜레온’이 포함돼 있다.
두 번째 실험은 문학성이 높은 소설과 대중소설을 비교했는데 전자는 최근 ‘전미도서상’후보 가운데 세 작품을,후자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최근 베스트셀러에서
세 작품을 골랐다.
역시 먼로의 작품은 없다.
세 번째 실험은 문학성 높은 소설과 대중소설을 비교했는데 전자는 2012년'오 헨리 상’수상 단편에서 세 작품을 후자는 1998년 펴낸 ‘대중소설집’에서 세 편을 골랐다.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목록을 훑어봤는데 전율이 느껴졌다.
'오 헨리 상’수상작 가운데 앨리스 먼로의 작품 ‘Corrie’가 포함돼 있는 게 아닌가! 26년 전 대학 합격자 명단에서 필자 이름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 신났다.
‘코리’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실험에서도 쓰였다.
▲ 문학소설을 읽으면 타인에 공감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는 최근‘사이언스’에 발표된 연구에는 앨리스 먼로의 단편 ‘Corrie’가 텍스트 가운데 하나로 쓰였다. ‘코리’는 2012년 출간된 단편집 ‘Dear Life’에 수록돼 있다. - 강석기 제공
‘코리’는 2010년 잡지 ‘뉴요커’에 발표됐고 단편집 ‘Dear Life’에 수록됐다.
아직 번역이 안 돼 아마존에서 이북을 구매해 보던 논문은 던져두고‘코리’를 읽었다.
필자의 영어실력으로 제대로 독해했는지 의심스럽지만 잔잔히 흘러가던 이야기가 놀라운 반전으로 끝맺음
하면서 마음이 짠했다.
‘오 헨리 상’을 받은 이유를 알겠다. 다음은 ‘코리’의 줄거리다.
부유한 사업가 칼턴의 무남독녀인 코리는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다소 억세게 생긴 26세 처녀로 아버지와
둘이 시골 저택에 살고 있다.
오지랖이 넓은 칼턴씨는 성공회 신자도 아니면서 동네 명소인 성공회 교회를 자비를 들여 보수하는데 젊은
건축가 하워드 리치가 공사를 맡았다.
하워드는 칼턴씨의 집에 드나들게 되고 유부남이었지만 마음이 통하는 코리와 관계를 갖게 된다.
수년이 지나 칼턴씨는 사망했고 혼자 남은 코리는 소일거리삼아 동네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하워드는 자신의 사무실로 둘의 관계를 언급한 편지가 왔다며 코리를 찾아온다.
도대체 누가 협박편지를 보냈을까 고민하던 코리는 예전에 가정부로 일하던 릴리언 울프를 지목하고 결국
그녀에게 매년 두 차례씩 돈을 건네기로 한다.
코리가 하워드에게 수표를 주면 하워드가 릴리언의 우편함에 넣는 방식이다.
그 뒤 더 이상 협박편지는 오지 않았다.
이렇게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코리는 우연히 릴리언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장례식 날 도서관 근무를 핑계로 참석하지 않기로 한 코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장례식이 열린 교회로 간다.
그런데 한 여성이 그녀를 알아보고 왜 이제야 왔냐며 반긴다.
그녀는 릴리언에 대해 아주 좋게 말하는데다 생전에 릴리언에게서 코리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코리는 릴리언이 받은 돈 대부분을 이 교회에 기부했다고 생각한다.
집에 돌아온 코리는 가족과 함께 2주간 여행을 떠나있는 하워드에게 릴리언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늘 가슴 한구석 불안감을 갖게 했던 존재인 릴리언이 사라진 것에 대한 홀가분함에 기분이 들뜬 코리는
편지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날 잠이 깬 코리는 문득 모든 걸 깨닫는다.
릴리언은 자신과 하워드 사이의 일에서 아무 관계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릴리언이 20여 년 전 가정부로 일할 때 코리는 그녀의 재능이 아깝다며 공부하라며 재정적 지원을 해줬고,
이 일에 감동한 릴리언이 주위사람들에게 코리에 대한 덕담을 했을 것이다.
결국 하워드는 부유한 상속녀인 코리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가족들과 이 나라 저 나라 여행을 하며 풍족하게
살았던 것이다.
물론 코리에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코리는 릴리언의 죽음을 알리는 한 줄짜리 편지를 하워드의 사무실로 보낸다.
“Lillian is dead, buried yesterday.(릴리언이 죽었어요. 어제 장례식을 치렀고요.)”
곧 답장이 왔다. 역시 한 줄이다.
“All well now, be glad. Soon.(이제 다 해결 됐군요. 기뻐요. 곧 봅시다.)”
물론 둘 사이는 이걸로 끝이었다.
ㆍ문학소설 vs 대중소설
다시 논문으로 돌아와서 저자들은 공감의 능력을 평가하는 여러 방법을 써서 문학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비소설이나 대중소설을 읽을 사람들보다 공감 능력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뒤의 두 그룹은 아무 것도 읽지 않은 사람들과도 차이가 없었다.
이들이 사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인 ‘눈으로 마음 읽기 시험(RMET)’를 소개한다.
▲ 연구자들은 ‘눈으로 마음 읽기 시험’ 등의 방법으로 독서가 공감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눈으로 마음 읽기 시험은 피험자가 눈 부분이 클로 우즈업된 사진 36장을 보고 각각의 감성 상태를 맞추게 한다.점수가 높을 수록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큼을 의미한다. - Glenn Rowe 제공
피험자들은 눈 부분만 클로우즈업된 얼굴사진 36장을 보고 각각에 대해 어떤 감정상태인
지를 추측하면 된다.
물론 주관식이면 피험자가 견디지 못할 것이므로 사진 오른쪽 옆에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 네 개가 있다.
즉 이 가운데 하나를 고르면 된다.
따라서 다 맞추면 36점이다.
첫 번째 실험결과를 보면 문학소설을 읽은 그룹은 평균 25.9점인데 논픽션을 읽은 그룹은
23.47점이었다.
세 번째 실험결과에서도 문학소설을 읽은 그룹은 평균 25.92점인 반면 대중소설을 읽은
그룹은 23.22점이었다.
구글에서 ‘RMET’로 검색해보면 직접 테스트해볼 수 있는 사이트
(http://glennrowe.net/baroncohen/faces/eyestest.aspx)가 나오는데 필자는 25점을
받았다.
영어 형용사의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2, 3점은 더 높게 나오지 않았을까.
한편 텍스트의 재미를 묻은 질문에 피험자들은 예상대로 문학소설은 3.54점을 준 반면
대중소설은 4.07점을 줬다.
반면 문학성은 전자를 4.84점으로 후자의 4.43점보다 높게 평가했다.
문학평론가가 아닌 피험자들도 문학소설이 재미는 덜 하지만 작품성은 높다는 걸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같은 소설인데 문학성이 높은 작품은 공감력을 높여주고 대중소설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저자들은 논문에서“문학소설은 음운적, 문법적, 의미적으로 참신한 장치를 써서 독자들
에게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며“독자의 예상을 뒤엎고 독자의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문학
소설의 힘이 독자들 역시 작가처럼 창조적으로 만들어준다”고 설명했다.
반면 대중소설은 상황이나 인물을 일관성있고 예측가능하게 기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의 예상에 부응할 뿐 마음의 이론을 향상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는 것.
저자들은 문학소설뿐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공감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끈덕진 더위도 이제 물러가고 정말 가을이 온 것 같다. 하루에 두 편씩 먼로의 단편을 읽으며, 모처럼만에 진정 ‘독서의 계절’을 보내야겠다.
☞ Dongascience ☜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