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대단한 발명품이다.
세종은 몇몇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친히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종은 왜 이 작업을 은밀하게 추진했을까.
정사에 관해서는 늘 함께 의논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한글 창제를 알렸을 때 신하들의 반발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한자를 배운 식자층과 한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과 한자만 존귀한 것으로 여겼던 신료들은 한자로 문자생활의 독점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한글의 가치와 쓸모를 논의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웠다.
세종은 백성들이 문자의 불통으로 인해 억울함을 겪지 않도록 한글을 만들었다.
이로써 알겠다. 문자는 소통의 도구이건만 문자로 인해 불통의 장벽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연암의 편지에 ‘문자나 글월로 쓰이지 않은 문장(不字不書之文)’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 정신과 의태(意態)는 천지 사방에 퍼져 있고, 만물에 흩어져 있다.
이것이 ‘문자나 글월로 쓰이지 않은 문장’이다.”
문자는 우주만물의 모양과 의미를 본뜨고 부호로 만든 것이다.
그러기에 우주만물은 문자의 바탕이요, ‘문자 이전의 책’이다.
<주역> ‘계사전’에 포희씨가 세상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팔괘를 만들어 만물의 정(情)을 그려냈다고 한다.
그래서 연암이 보기에 그만큼 책 읽는 것을 정밀하고 부지런히 한 사람이 없었다.
반면 후세에 독서를 한다는 사람들이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종이책만 들여다보는 것은 술지게미 먹고서 술에 취해 죽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한심했다.
“저 허공에 나는 새가 얼마나 생생한가.
그런데 쓸쓸하게 ‘조(鳥)’ 한 자로 말살해 채색도 없애고 모양과 소리도 내버려둔다.
혹은 늘 하던 말이 싫어서 가볍고 맑게 하고자 ‘금(禽)’자로 바꾼다. 이것이 책 읽고 글을 짓는 자의 잘못이다.”
이로써 알겠다.
문자는 의사와 세상을 표현하고 때와 곳을 넘어 전하는 유용한 도구이건만 또한 자유분방한 사고와 무궁무진한 세상을 가두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연암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푸른 나무로 그늘진 정원에 새가 지저귄다.
그가 부채를 들고 책상을 치며 외쳤다.
“이것이 내가 말한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요, 서로 지저귀며 어울리는 글월이다.
다섯 채색을 문장이라 이른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문장이 어려워지고, 문자에 갇힌다.
반성하는데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쉬운 문장을 위해 우리말 도구인 한글을 잘 가꾸어 쓸 일이다.
바야흐로 좋은 가을날, 따사로운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여 ‘문자 이전의 책’을 읽기 정말 좋은 때다.
☞ Khan ☜ ■ 김태희 실학21네트워크 대표
草浮 印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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