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려사 재발견

광종 ② 관료제 정비

浮萍草 2013. 6. 9. 09:26
    노비안검법·과거제 도입으로 정치판 물갈이
    광종이 951년(광종 2년)에 어머니 신성황후 유씨를 위해 개경에 사찰 ‘불일사(佛日寺)’를 지으면서 세운 탑이다. 불일사 5층 석탑으로 불리며 장중하면서 웅건한
    느낌을 준다. / 사진 박종기
    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1168~1241년)는 어느 지방 관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을을 다스리는 방법은 관대함과 엄격함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얻는 데 있다(要不過寬猛得中耳). (중략) (지방관이) 엄하기만 하면 힘이 들어 백성이 떠나가게 되고 관대하기만 하면 백성이 윗사람을 얕봐 방자해진다. 두 가지를 함께해야 백성들이 (지방관을) 하늘같이 두려워하고 부모같이 사랑하게 돼 잘 다스려진다.”(『동국이상국집』 권27 ‘어느 書記에게 보낸 편지’) 관대함과 엄격함은 당근채찍과 같은 양면성을 지니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만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를 겸비한 제왕은 흔치 않다. 광종은 그것을 겸비한 군주였다. 외국인 관료를 우대한 건 광종의 관대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반면에 광종이 호족 숙청과 과거제 실시로 정치판과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한 건 채찍과 같은 엄격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당시 지배층 여론은 광종의 외국인 관료 우대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서필(徐弼)은 광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투화인(投化人·귀화인)들이 벼슬과 집을 골라 차지하여 세신(世臣·기존 관료)들은 거처할 곳을 잃을 정도입니다. 재상인 저의 집은 원래 제 소유가 아니니 가져가시고, 저는 녹봉을 아껴 작은 집을 지어 살겠습니다.”(『고려사』 권93 서필 열전) 서필은 재상으로 고려 정계의 원로였다. 뒷날 거란과의 전쟁 때 압록강 동쪽 280리 땅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킨 그의 아들 서희(徐熙)는 광종 때 처음 실시된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됐다. 서필 집안은 광종 정책의 수혜자였지만, 서필은 정계 원로로서 광종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대변해 이같이 말한 것이다. “(광종은) 쌍기를 등용한 뒤 문사(文士)를 지나치게 존중하고 우대했다. 이로 인해 재주 없는 자가 마구 승진해 1년도 되지 않아 재상이 된 자도 있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문물과 제도)을 중하게 여겼으나 중국의 좋은 제도와 법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화사(華士·중국의 선비)를 예우한다고 했으나, 중국의 현명한 인재는 얻지 못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서필에 이어 유학자의 대표 격인 최승로(崔承老)도 광종을 이같이 비판했다. 두 사람의 발언을 통해 쌍기 등 중국인 귀화 관료를 중용한 광종의 인재 등용책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상당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왜 이런 정책을 강행했을까? ㆍ 호족 숙청의 신호탄, 노비안검법
    광종의 형이자 선왕인 정종은 서경(평양) 군벌 왕식렴의 도움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정종은 서경으로 천도해 왕식렴에 의지해 정치를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광종은 호족 세력에 의지한 정종의 정치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痛感)했다. 왕식렴은 숨졌지만 신라 패강진 부대의 전통을 이은 서경 세력은 광종 시대에도 여전히 최대 군벌로서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쌍기 등 중국계 귀화인 관료를 등용시켜 정치판을 물갈이하려 했다.
    충북 청주의'용두사’ 터에 있는 철당간(왼쪽).표면에“준풍(광종의 연호)
    3년( 962년 광종 13년)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사진 문화재청
    광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더욱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956년(광종7)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한 것이다. 호족들을 대상으로 노비 소유의 불법 여부를 가리겠다는 정책이다. “왕조 건국 당시 공신들은 원래 소유한 노비에다 전쟁에서 얻은 포로 노비와 거래를 통해 얻은 매매 노비를 갖고 있었다. 태조는 포로 노비를 해방하려 했으나 공신들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편의에 맡긴 지 약 60년이 되었다. 광종이 처음으로 공신들의 노비를 조사하여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가려내자 공신들은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찼다. 대목왕후(大穆王后·광종비)가 광종에게 그만둘 것을 간절히 말해도 듣지 않았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노비는 호족들에게 토지와 함께 당시 중요한 재산의 일부였다.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노비는 해방시키거나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호족의 군사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조치였다. 요즘의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서경 출신인 대목왕후가 남편 광종에게 노비안검법 시행 중단을 요청한 건 서경 출신 호족 세력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숙청의 화살이 최대 세력인 서경의 호족 세력을 겨냥하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그만큼 이 조치는 충격적이었다. “박수경(朴守卿)이 죽었다. 정종이 즉위한 초기에 내란을 평정한 것은 대부분 박수경의 공이다. 그런데 이때 아들 승위(承位)·승경(承景)·승례(承禮)가 참소를 입어 옥에 갇히자 수경이 근심하고 분노하여 죽었다.”(『고려사절요』 권2 광종 15년(964)) 박수경은 황해도 평산의 호족으로 서경의 왕식렴과 함께 정종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왕식렴이 숨진 뒤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군벌로 떠올랐다. 그의 딸은 태조의 28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이다. 박수경이 분노와 근심으로 스스로 죽었다지만 광종이 그의 아들들을 숙청한 건 바로 당시 최대 군벌이었던 박수경을 겨냥한 것이었다. 박수경의 죽음은 가장 큰 호족 세력이 제거돼 광종의 숙청 작업이 성공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다음 기록은 당시 호족 숙청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일찍이 혜종·정종·광종이 서로 왕위를 이은 (고려 왕조의) 처음에는 모든 일이 편하지 않아 개경과 서경의 문무 관료가 절반이나 살상되었다.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언(讒言)이 일어나 무릇 형장에 끌려간 사람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이었다. 오래된 공신과 장군은 거의 죽음을 당했다. 경종이 즉위할 당시 옛 신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40여 명에 불과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정치권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종은 호족뿐 아니라 왕실까지 숙청했다. ㆍ숙청 피해 살아남은 신하는 40여 명뿐
    “960년(광종11)부터 975년(광종26)의 16년간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상대방을 참소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 군자는 들어설 수 없고 소인이 뜻을 얻었다. (중략) 하물며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도 목숨을 유지하지 못했다. (광종은) 말년에는 자신의 외아들(*경종)까지 의심해 (다음 왕인) 경종은 불안해 하다가 겨우 왕위에 올랐다. 통탄할 일이다.”(최승로 열전) 광종의 조카인 두 형의 아들까지 목숨을 잃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한때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던 것이다. 광종이 처가인 서경 세력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광종 숙청의 주된 표적은 당시 최대 군벌인 서경의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이 960년(광종11)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이름을 고쳐 정종의 서경 우대정책을 버리고 개경 중심의 정치를 천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광종은 같은 해 ‘준풍(峻豊)’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 현재 청주의 용두사(龍頭寺) 터에 쇠로 만든 당간(幢竿)이 있다. “준풍(峻豊) 3년 (962·광종13)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광종의 치세를 독자적인 연호로 표기했음을 알려준다. 광종은 958년(광종9)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중국 귀화인 쌍기와 왕융(王融)이 고시관이 돼 재위 동안 여덟 차례 과거시험을 시행했다. 합격한 인물 가운데 공신과 호족 출신의 자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이나 서희와 같은 중부지역 출신 등의 새로운 인물들이 합격했다. 이런 인물들이 호족 세력을 대신해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등장했다. 숙청이 인위적인 쇄신이라면, 과거제도는 호족 중심의 정치질서를 청산하고 능력과 실력을 갖춘 유교 관료가 지배 엘리트로 충원된 자연스러운 물갈이였다. “이로 인해 남북의 용인(庸人·어리석은 사람)이 다투듯이 몰려왔다. 지혜와 재능을 따지지 않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런 까닭에 ‘후생(後生)’은 앞을 다투며 관리가 되었으나 ‘구덕(舊德·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층)’은 점차 쇠락하였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최승로는 새로운 관료집단의 등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가 언급한 ‘남북 용인’ ‘후생’은 과거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관료집단이며 ‘구덕’은 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집단이다. 하지만 최승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광종의 과거제 실시는 문신이 정치문화를 주도하는 문치주의를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했다.
    Sunday.Joins Vol 326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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