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려사 재발견

혜종 ① 왕규의 난

浮萍草 2013. 5. 19. 11:09
    외척 반발 빌미로 왕위 빼앗은 고려판 ‘왕자의 난’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3층 및 5층 석탑. 1988년 발굴 결과 10세기에 건립된 2층 높이의 대형 사찰터가 확인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조용철 기자
    번 치세(治世·훌륭한 통치) 뒤엔 난세(亂世)가 온다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은 왕조나 국왕의 교체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태조 왕건의 사후 장남 혜종(惠宗·912~945년, 943~945년 재위) 때도 그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혜종이 병을 앓자 왕규(王規)가 딴 뜻을 품었다. 정종(定宗)이 가만히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변란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평양의 군사로 왕궁을 지키자 왕규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왕식렴은) 왕규와 그 일당 300여 명을 죽였다.”(고려사 권92 왕식렴 열전) 왕규는 지금 경기도 광주(廣州)의 호족이다. 궁예 휘하의 왕건이 899년 이곳을 정벌할 때 협조하면서 왕규는 정계에 등장한다. 그의 두 딸은 태조 왕건의 15ㆍ16번째 부인, 또 다른 딸은 혜종의 부인이 되었다. 왕규와 함께 처단된 무리가 300명이란 사실은 그가 당시 정계의 유력자였고 그 바탕에는 한강의 수운(水運)을 장악해 축적한 그의 정치·경제 기반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위 기록에서 왕규가 품었다는 '딴 뜻'은 태조의 16번째 부인이 낳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를 ‘왕규의 난’이라 했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1287~1367년)은 왕규를‘중국 노나라의 은공(隱公)에게 환공(桓公)을 죽이라고 건의했다가 여의치 않게 되자 도리어 은공을 죽인 우부(羽父)와 같은 인물’로 평가했다. 이 같은 이제현의 견해가『고려사』에 반영되면서‘왕규의 난’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당대 역사의 진실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하는 게 용어다. 현재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왕규의 난’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난’이란 용어가 과연 당시의 진실을 담보하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 ㆍ왕규가 외손을 왕 앉히려 딴 뜻 품었다?
    혜종의 묘인 순릉. 개성시 송악면 자하동에 있다.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약 100년 뒤 이자겸(李資謙)은 왕규와 같은 길을 걷는다. 딸들을 각각 예종과 그의 아들 인종의 비로 들인 왕실 외척 이자겸은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 이를 보다 못한 인종은 1126년 2월 장인이자 외조부인 이자겸을 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모두 불타고 스스로 왕위를 이자겸에게 물려줄 뻔하는 수모를 겪는다. 인종이 먼저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벌어진 사태인데도 그뒤 석 달 만인 1126년 5월 인종의 사주를 받은 측근 척준경에 의해 이자겸이 제거되자 왕실 사가들은 이자겸에게 모든 잘못을 씌워 ‘이자겸의 난’이라 기록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왕규의 난’을 다시 봐야 할 근거는 여기에 있다. 혜종 때 일어난 정변의 진실은 무엇일까? 왕규는 왕(혜종)에게 “왕의 아우인 요(堯·뒤에 고려 3대 왕 정종이 됨)와 소(昭·뒤에 고려 4대 왕 광종이 됨)가 반역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왕은 이를 믿지 않고 배다른 동생인 요와 소를 잘 대우해주면서 자신의 딸을 소에게 시집보내 그들의 세력을 강하게 해줬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규가 혜종을 두 차례나 제거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고려사절요』(권2 혜종 2년·945)의 기록이다. 아버지 왕건을 따라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명성을 쌓아 왕이 된 혜종은 자신을 제거하려 한 왕규는 물론 국왕으로서 당연히 대처 해야 할 배다른 형제들의 반역 조짐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즉위 이듬해부터 병을 앓아 소심해져 그랬을까? 혜종은 실제로 이들을 통제할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태조는 7살짜리 혜종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 어머니 오씨(吳氏·나주 출신 2비)가 미천해 태자로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태조가 낡은 상자에 황제를 상징하는 자줏빛이 나는 황포(황제를 상징)를 담아 오씨에게 주자 오씨는 그것을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였다. 태조의 뜻을 헤아린 박술희가 다시 요청하자 태조는 혜종을 태자로 삼았다. 태조가 임종 때 박술희에게 군국(軍國)의 일을 부탁하고, 태자를 잘 보좌하라고 부탁하자, 박술희는 그대로 따랐다.” (『고려사』권92 박술희 열전) 오씨가 미천하다는 것은 다른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뜻이다. 왕건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즉 태조는 자신의 사후 29명의 부인에게 태어난 34명의 자식(왕자 25명 공주 9명) 사이에 벌어질 권력투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감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오씨가 미천하다는 이유로 임신을 원하지 않았으나 오씨가 억지로 임신해 혜종을 낳았다는 사실(『고려사』권88 장화왕후 열전)도 이를 뒷받침한다. 태조는 비록 외가 세력은 약하지만 장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혜종을 태자로 결정하고, 당진(면천) 출신의 호족 박술희에게 태자의 뒷날을 부탁했던 것이다. 태조의 장인인 왕규는 943년 5월 재상 염상(廉相), 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조 왕건의 임종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중요한 일은 태자 무(武·혜종)와 함께 결정하라’는 유언을 왕규에게 남길 정도로, 왕규 역시 혜종의 후견인이었다. 태조는 29명의 부인 가운데 6명은 왕후로, 나머지 23명은 부인으로 호칭을 붙였다. 그리고 왕후의 자식에게만 왕위계승권을 주었다. 왕규의 두 딸은 태조의 부인들이어서 이들의 자식들은 애당초 왕위 계승의 서열에서 벗어나 있었다. 또 왕규는 혜종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 난을 일으킬 입장도 아니었다. 요(정종)와 소(광종) 형제는 혜종이 즉위한 직후 곧바로 병석에 눕자, 왕위를 노리고 거사를 준비했다. ‘혜종이 병을 앓아 왕규가 딴 뜻을 품자 정종이 몰래 왕식렴과 함께 변란의 대응책을 모색했다’는 사실(『고려사』 권92 왕식렴 열전) 이 그를 뒷받침한다. ㆍ해상 세력 몰락하고 내륙 호족 득세
    요와 소 형제는 각각 왕건의 차남과 3남이지만 제3비인 충주 유씨(劉氏)의 자식으로 혜종과는 배다른 형제다. 이들의 음모를 알고도 혜종이 딸을 소에게 출가시킨 건 강력한 외가 세력을 업고 있던 이들 형제와 관계를 터 왕위를 유지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요와 소의 외가가 있던 충주는 중부 내륙의 요충지로 남부의 영남 지역 북부의 강원도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 거점이다. 충주 출신 호족 유권열(劉權說)의 권유로 궁예 휘하의 강릉 군벌인 왕순식(王順式) 군대가 고려에 귀부했다. 뒷날 후백제의 신검군을 격파한 주력이 왕순식과 충주 지역의 부대였다. 이런 충주 지역 출신인 요와 소 형제에게 혜종의 후견인 박술희와 왕규의 존재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자 왕규를 미워해 다투던 박술희는 군사 100여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정종은 박술희가 딴 뜻이 있음을 의심하여 (강화도) 갑곶에 귀양을 보냈다. 이것을 빌미로 왕규가 왕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고려사』 권88 박술희 열전) 정종이 박술희를 귀양 보내자, 왕규가 거짓으로 왕명을 만들어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규와 박술희가 갈등을 빚자 정종이 그 틈을 이용해 박술희가 딴 뜻이 있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낸 뒤 그를 죽인 것이다. 왕규는 혜종에게 요와 소 형제의 음모를 알렸으나 혜종은 도리어 자신의 딸을 소(광종)에게 혼인시켜 사태를 무마하려는 유화책을 펼쳤다. 이에 반발한 왕규가 혜종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왕규의 반발은 정종 세력에게 정변의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박술희와 왕규의 이탈로 세력을 잃은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한채 배다른 동생에게 허무하게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 (그뒤 혜종은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요컨대 혜종 때 일어난 왕실의 정변은 외척 ‘왕규의 난’이 아니라 정종 형제가 왕위 계승의 욕심을 드러낸 ‘왕자의 난’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내부의 권력게임이 아니었다. 고려 건국 이후 통일전쟁을 위해 왕권과 호족세력이 타협과 공존 조화와 균형 속에 유지해온 정치질서가 이 정변을 계기로 크게 요동치게 됐다. 전쟁 상황에서도 억제됐던 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력이 현실 권력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정치와 역사의 전면에 노출되었다. 힘을 가진 다수가 소수를 누르고 승자가 되는 야만의 정치가 개시된 것이다. 세력이 약한 혜종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품었던 왕건의 우려가 그의 사후에 현실화되었다. 지금 황해도와 평안도의 패서(浿西) 지역은 통일신라 최강의 부대였던 패강진 부대가 주둔한 곳이다. 이곳 출신 호족 또한 그런 군사 전통을 가진 세력으로 이후 고려 지상군의 주력이 된다. 왕식렴은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이 지역 군사력을 관장한 세력가였다. 평양과 충주 두 세력의 결합을 통해 정종과 광종 형제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혜종과 그 후견인 역할을 한 서해 남부 나주의 혜종 외가 한강의 수운(水運)을 관장했던 광주의 왕규와 당진(면천)출신 박술 희의 몰락으로 해상세력은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왕건의 강력한 카리스마 앞에 숨죽였던 정치의 야만성이 혜종 시절 왕자의 난을 계기로 본색을 드러내면서 또 다른 정치질서의 형성과 함께 험난한 격변을 예고하게 된다.
    Sunday.Joins Vol 323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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