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려사 재발견

성종 ① 인재등용

浮萍草 2013. 6. 23. 10:36
    ‘쓴소리 학자’ 최승로 재상 앉혀 국가 틀 잡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에 있는 서희(942~998) 장군 부부의 묘.그가 숨진 998년(목종 1년) 조성됐다.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됐다.조용철기자
    려의 6대 국왕 성종(成宗·981~997년 재위, 960~997년)에 대해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을 성종(1469~1494년)이라 했듯이 고려의 성종 역시 그런 호칭에 걸맞은 군주였다. 그러나 성종은 왕실 안팎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지는 못했다. 전왕 경종에게 아들 ‘송’(誦:성종 사후 목종으로 즉위)이 있어 경종의 사촌인 성종은 왕위 계승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이 숨질 때 아들 송은 두 살에불과해 22세인 성종이 대신 즉위한 것이다. 성종은 전왕 경종과 후왕 목종의 모후의 출신지인 서경세력보다는 광종의 외가인 태조의 3비 충주 유씨 세력의 지원으로 즉위했다. 혼인 경험이 있던 광종의 딸 문덕(文德)왕후와 재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증거다. ㆍ경종의 사촌 … 두 살짜리 조카 제치고 즉위
    경종은 재위 6년 만에 숨졌다.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에 피해를 본 세력이 여전히 조야에 포진하고 있어 광종의 개혁정치는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성종은 광종의 정치를 계승하여 고려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17년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전쟁까지 치렀지만,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치세술(治世術)은 무엇일까?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성종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성종을 비판한 28가지 조항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지고 있다. 시무상소에서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종 즉위 후 8년간의 정치는 깨끗하고 공평하였으며 상벌에서 지나침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쌍기를 등용한 후 그를 지나치게 대우하면서 재주 없는 자들이 함부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선진문물제도)을 존중했으나, 중국의 아름다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사(華士:중국 선비)를 예우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를 얻지 못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경주 출신의 신라계 유학자인 최승로는 광종이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과, 과거를 통해 발탁된 신진세력에 의존해 개혁을 하려다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주도할 만한 인재가 부족해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호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의 유교 정치가들도 광종 개혁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고 익힌 뒤 귀국해 태조 때 중용되어 크게 활동했다. 그런데 광종은 이들을 배제하고 쌍기와 같은 중국계 귀화관료를 중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했다. 최승로는 그러한 광종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의 대표격이다. 즉위 직후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려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이같이 비판적인 인물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광종이 추구한 화풍정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이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인적 청산에 치중한 광종과 달리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최승로 계통의‘화풍파’(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유학자 집단) 관료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ㆍ다양한 스펙트럼의 인재를 적재적소 배치
    서희의 흉상
    성종 재위 중 최대 위기는 993년(성종12) 거란의 고려 침입이다. 조정에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 제기되었다. 학자 출신 관료들이 성종에게 그렇게 건의했다. 그러나 서희(徐熙)는 “적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핀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했다. 이어 서희는 직접 거란 진영을 찾아가 사령관 소손녕과 담판했다. 그는 거란의 고려 침입이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데 있음을 파악하고 관계 단절의 대가로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했다. 서희는 화풍을 강조한 유학자 출신의 관료집단과 달리 고려의 전통문화를 강조한 인물이다. 고려 고유의 전통문화를 당시엔 ‘토풍(土風)’ 혹은 ‘국풍(國風)’이라 했다. 서희는 국풍파의 대표격이다. 성종은 즉위 직후 서희와 같은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을 개혁정치의 또 다른 우군으로 끌어안아 서희에게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어사(兵官御事)의 벼슬을 내렸다. 화풍을 중시한 성종은 이렇게 자신과 성향이 다른 정치인도 받아들였다. 가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훌륭한 재목이라면 발탁하여 미래 정치의 자산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서희와 같이 거란의 침입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국풍파 관료였던 이지백(李知白)은 거란의 침입 앞에서 마치 적전 분열처럼 비칠 정도로 과감하게 할지론과 성종의 화풍정책을 비판했다. “가볍게 토지를 떼어 적국에 주기보다 선왕(先王 태조)이 강조한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본받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보전과 태평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늘에 고한 뒤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임금께서 결단해야 합니다.” 성종은 이지백의 말을 따랐다.
    성종이 화풍을 좋아하고 사모하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지백이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이지백은 팔관회·연등회의 전통 의례를 통해 민심을 결집시키는 것이 거란의 침입을 막는 지름길로 인식했다. 화풍을 추구한 성종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 민심을 등에 업고 나온 발언이었다. 또 다른 국풍파 관료 한언공도 성종이 중국의 화폐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제동을 건다. “고려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해 중단시킨 것이다. 서희·이지백·한언공은 화풍 중심의 일방적 제도 개혁의 속도를 조절할 것을 성종에게 건의하고 고려의 전통문화인 국풍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들이다. 성종은 이들의 건의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종은 이념 성향이 다른 인물들을 써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든 독특한 인재 등용책을 구사한 군주였다. 그렇다고 다양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휘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호족 중심의 낡은 정치와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하려 했던 광종의 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통치의 목표로 삼았다. 화풍정책을 계승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고려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체제를 새롭게 하려 했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는 이런 점에서 달랐다. 위기의 시대에 소외된 정치세력은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종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여 실천했다. 화풍 성향의 유교 관료집단과 국풍 성향의 관료집단을 함께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나라 안팎에 현안이 발생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왕조의 면모를 일신시켜 나갔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Sunday.Joins Vol 328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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