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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로서적

浮萍草 2013. 6. 3. 00:00
    “시내서 만나자” 하면 한번에 알아듣던 그 곳 ‘종로서적 앞’ 
    
    모임에 조금 늦었다. 홰홰 체머리 인사를 날리며 서둘러 들어가는데 좌중에 한 중년 초입의 여성이 뜬금없는 여고생 갈래머리를 하고 있다. 옷차림까지 파스텔색 원피스였다. “예진이가 납셨구나!” 지각으로 뻘쭘해진 자가 이 정도 가벼운 농담을 날리면 예의상이라도 예서제서 킥킥 웃는 반응이 나와야 정상인데 어 썰렁하다. 둘러보니 대부분 20∼30대 친구들이다. (방송국 작가들과의 회의였다). 곧장 깨달음이 왔다. 이들에게 예진이는 ‘손예진’이었던 거다. 추억의 영화 ‘진짜진짜 좋아해’를 상기할 연배가 아니었다. 양 갈래머리 땋아 내린 소녀풍 여인을 보며 내가 대뜸 떠올린 예진이는 물론 덕화(이덕화)의 여자친구 ‘임예진’을 뜻한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니들은 비누냄새 퐁퐁 풍기는 여고생 하얀 교복 상의의 청순을 모르겠구나….’ 실제 임예진은 애들이 혓바닥이라 부르던 빨간 넥타이 차림의 왕십리 무학여고를 다녔다지만 일단 3대 발 5대 극성 가운데 한 학교를 다니는 걸로 상정하자. 그게 뭐냐고? 에, 또… 1970년대 장안에서 껌 좀 씹는다는 소녀들이 다니는 여학교로 명성이 자자했던 은광 신광 염광여고를 일컬어 3대 발광이요 덕성 계성 명성, 보성 한성여고를 일러 5대 극성이라 하였으니 진짜진짜 멋쟁이는 그 학교들에 다 모여 있었더라, 얼쑤!

    1907년 종로서적 자리에서 문을 연 대한예수교서회(왼쪽 사진)와 1960년대까지 종로서적이 입주했던 대한기독교서회 건물(오른쪽). 기독교서회 건물에는 기독교
    방송(HLKY)도 입주해 있었다. 출처:대한기독교교회사

    2002년 6월 부도로 문을 닫은 종로서적. 문화일보 자료사진
    이 나온 김에 그 시절 예진이의 하교시간을 따라가 보자. 일단 시내로 나가면 첫 번째 코스는 진양 혹은 화신 등의 ‘분식센타’에서 매운 비냉(비빔냉면) 따위를 먹는다. ‘분식센타’에는 반드시 디제이가 있고 돈 매클린의 ‘아메리칸 파이’ 같은 신곡을 줄곧 틀어준다. ‘분식센타’를 나와 종로 2가 태극당이나 고려당 빵집에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다가 ‘어마 깜짝이야!’ 늦었다며 서둘러 뛰어가는 곳은 송성문의 정통종합영어(나중에 성문종합영어)나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을 교재로 쓰는 단과반 학원이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던 그 시절 대부분의 고교생들은 종로통에 즐비한 단과반 학원을 필수코스인 양 다녔다. 그런데 예진이는 발광이거나 극성인 여고생이다. 학원에서 공부만 했겠는가. 덕화도 만나야지! 장담한다. 그 시절 수많은 예진이와 덕화들이 만남을 정했던 장소는 거의 한 군데였다. 그곳은 바로 종로의 아니 서울의 랜드마크이면서 만남의 광장이자 청춘 페스티벌의 현장인 종로서적 앞이었다. 서점 앞에 너른 광장이 있는 것도 특별히 인상적인 표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길거리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도 무슨 까닭인지 사람들은 만날 약속을 정하면 바글바글 종로서적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내에서 만나자 하면 종로 2가 보신각 옆 종로서적 앞에서 보자는 말과 동의어였다. ‘종로서적 앞’을 정확히 말하면 서점이 들어선 건물 1층 로비를 뜻하는데 엄청 비좁았다. 그 손바닥만 한 공간에 너도나도 약속을 정하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격조했던 동창생과 우연히 해후하는 일 못지않게 바로 몇 사람 건너 새초롬히 딴청을 부리는 전(前) 여친의 뒤통수를 목격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난 2002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종로서적의 최후가 안타까워 신문에 기고했던 내 글을 다시 읽어본다. Munhwa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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