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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충무로 ‘스카라 계곡’

浮萍草 2013. 5. 31. 00:00
    무명가수 애환 달래고 ★로 떴던… 가요계 ‘아지트’
    
    미술사학자 고연희 씨의 새 연재는 옛 그림에서 근현대 문화공간으로 장소이동을 합니다. 
    지금은 안타깝게 사라져 버렸지만 의미로 가득 찬 명소와 거리 등에대한 추억담과 함께 인문학적 비평을 아우를 것입니다. 
    스카라극장과 국제극장, 르네상스음악실 화신백화점, 남산야외음악당 등이 그 예입니다. 
    파워라이터 윤광준 씨 방송작가 김갑수 씨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 씨 등에서부터 공간문화연구가 건축가 무명의 악사에 이르기까지 장소
    별로 각기 다른 필자가 등장해 추억의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붙들어 세우면서 그것의 소중함, 건축적 의미 공간의 철학등을 풀어낼 것
    입니다.
    ‘장안의 전 영화팬이 대망하시는 극장과 영화’라는 문구를 내건 1962년 스카라극장 개관 신문광고(왼쪽)와 스카라극장(옛 수도극장) 전경. 문화일보 자료사진

    2005년 7월 스카라극장 앞에서 포즈를 취한 고 반야월(왼쪽)과 쟈니 리. 최규성씨 제공
    ‘스카라 계곡.’ 이건 상징도, 비유도 아니다. 개발논리에 밀려 2005년 철거돼 사라진 서울 충무로의 스카라극장. 거기 진짜 계곡이 있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중반까지 충무로에 계곡물이 흘렀다. 서울 한복판에 계곡이라니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장마철이면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 계곡을 타고 범람해 온통 물바다를 이루곤 했었다. 스카라 계곡에 흐르던 건 장맛비만은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의 계곡에 가득 고여 출렁였던 것은 다름 아닌 대중음악이었다.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며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할 무렵 우리 대중음악의 전통은 거기서 시작됐다. 1955년쯤 하천복개 작업으로 계곡은 사라졌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스카라극장 일대는 가요 유통의 중심지였다. ‘스카라 계곡’이란 이름도 단순한 지명의 차원을 넘어 ‘가요계’를 뜻하는 대명사가 된 것도 그래서였다. ‘충무로’란 지명이 ‘영화판’을 이르는 뜻이 됐듯이 말이다. 스카라극장 인근은 어린 시절부터 대중음악과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도 각별한 추억의 공간이다. 강원도 강릉에 살았던 촌놈이었던 나는 사업 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서울구경을 했다. 그게 초등학교 3학년인 1970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지금까지도 잘 지워지지 않는 것은 아직 충무로에 건재한 식당 ‘진고개’의 추억이다. 큰 가위로 고기를 토막 내서 먹는 ‘토막고기’를 아버지와 함께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몰랐는데 ‘토막고기’는 아마 소고기 등심이나 안심이었던 것 같다. 식사 후 아버지가 근처 다방에서 어른들과 사업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 무료함을 느꼈던 나는 식당 옆의 스카라극장에서 상영했던 음악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대형 간판에 시선을 빼앗기며 주변을 한동안 배회했었다. 충무로를 흔히 ‘영화인의 거리’로만 알고 있지만 1950∼1960년대에는 대중가요인들의 아지트였다. 영화와 대중가요의 협업시스템이 공고했던 시절의 얘기다. 충무로 중에서도 특히 스카라 계곡이라 불리던 극장 건너편의 인현동 일대는 독자적이면서 배타적인‘가요인의 거리’였다. ‘스카라 계곡’이란 이름은 지난해 타계한 원로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작명 솜씨로 탄생했다. 1955년 마산방송국에서 일하던 그가 서울로 올라왔을 무렵 수도극장 주변 계곡에서 복개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훗날 수도극장이 스카라극장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반야월은 그 일대를 입버릇처럼 ‘스카라 계곡’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지난 2005년 5월 반야월 선생은 90세 생일을 기념해‘스카라 계곡’이란 신곡을 발표했다. 반야월의 가사에다 작곡가 임상찬이 곡을 붙였고 ‘뜨거운 안녕’으로 유명한 쟈니 리가 취입했다. 짐작하다시피‘스타다방의 명배우들’과‘노래에 죽고 살던 가요인들’이 지금은 다 어디 가고 말았냐는 가사가 처연하기도 하고, 통속적이고 한 노래였다. ‘스카라 계곡’ 노래가 발표된 그해 12월 스카라극장은 사적 지정 논란이 불거지면서 급하게 건물 앞부분 일부가 철거되었다. 결국 고층 빌딩이 들어서며 극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국 대중문화의 근현대 중요 순간들이 새겨진 스카라극장은 반원형으로 돌출된 건물 현관과 로비 부분의 독특한 모더니즘 건축양식이 매우 아름다웠다. 1930년대 모습을 원형 그대로 보여준 소중한 극장이었다. 스카라극장이 개발, 경제논리에 의해 허물어짐에 따라 근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문화 공간은 거의 사라졌다. ‘명치좌’란 이름으로 1935년 세워진 명동의 옛 국립극장이 최근 복원되었지만 1930년대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동양극장과 국도극장도 소리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숱한 대중가요계의 별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던 대중음악인들의 마음의 고향인 스카라 계곡. 서울 도심 한복판이어서 개발의 삽날을 피하지 못하고 옛 모습이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골목 구석구석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스카라극장은 한국대중문화의 요람 같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인에 의해 개관된 스카라극장의 첫 이름은 와카쿠사(若草), 즉 약초극장이다. 해방이 되면서 수도극장으로 바뀌어 수많은 국내외 영화와 악극단 무대로 나라 잃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쉼 없이 움직였고 1953년 미8군 가수시대를 연 공식적으로 최초의 여성보컬그룹으로 인정된 김시스터즈가 정식으로 팀명을 정해 일반무대에 데뷔한 의미심장한 역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1962년 9월 28일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오페라극장 ‘라 스칼라’에서 이름을 딴‘스카라’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당시 스카라극장을 중심으로 도로 건너편엔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신카나리아다방 폭포수다방 영산다방 무지개다방 모나미다방 국제다방이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무명가수들의 집합소였다. 스카라 계곡 주변에 있던 수많은 다방은 항상 가요인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해질 무렵이면 인현동 골목의 아리랑집 두꺼비집 초막집 울산집 향원집 고령집 같은 대폿집에 모여 한 잔 술을 마시며 노래와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실제로 전화가 귀했던 그 시절 스카라 계곡 주변 다방들은 가요인들이 온갖 정보를 공유하고 연락을 취하는 사무실 같은 개념으로 이용되었다. 그곳에서 무수한 공연의 캐스팅 작업이 이뤄졌고 심지어 즉석 오디션 장소로도 활용됐다. 한마디로 가요인들에게는 ‘다용도 공간’이었던 셈이다. 작곡가인 고 손목인 씨는 박시춘 반야월, 이명희 씨 등과 귀신집 초막집 등에서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다고 한다. 손목인 씨는“밀주 막걸리를 빨리 숙성시키기 위해 카바이드를 탔는데 이 때문에‘경상도 사나이’의 작사가 월견초‘안개낀 목포항’의 가수 유춘산 등은 건강을 크게 해쳤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스카라 계곡 안에는 유명한 목욕탕이 있었다. 그 건물 2층을 그랜드레코드와 지구레코드가 공동으로 임차해 있었다. 두 레코드사의 판매량과 경기에 따라 1층 목욕탕 손님수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한국 대중가요의 대명사로 추앙받는 이미자는 1960년대 초반까지 노래 잘하는 신인가수로 주목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배고픈 무명시절을 보냈다. 그녀 역시 스카라 계곡에서 일거리를 찾기 위해 다방과 레코드회사를 기웃거렸다. 당시 스카라 계곡 근처엔 음악단체와 음반회사들도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주제가인‘동백아가씨’는 이미자의 대표곡이자 그녀를 한국대중가요의 대명사로 견인시킨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실 이 노래를 부를 주인공은 이미자가 아닌 당대의 인기가수 최숙자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도파레코드에서 막 독립한 신생레이블 지구레코드공사의 임정수 대표는 당시만 해도 보따리 장사 수준으로 자본력이 취약했기에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 으로 최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런티가 저렴한 이미자를 취입가수로 변경한 숨겨진 사연이 있다. 1964년 여름 만삭의 몸이었던 이미자는 찜통더위를 이기기 위해 얼음을 담은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며‘동백아가씨’ 취입을 마쳤다. 이 노래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흥행대박을 기록했다. 이미자를 최고의 인기가수로 급부상시켰고 신생음반회사 지구레코드를 메이저음반사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얘기 한 토막. 이미자가 노래를 녹음한 장소는 모나미 다방 뒤에 있던 미도파레코드 건물에 있던 녹음실이었다. 바로 옆방에서는 역시나 만삭의 현미가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될 영화주제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녹음하고 있었다. 만삭의 두 여가수가 스카라 계곡에서 취입한 노래가 메가톤급 동반 히트를 기록하자 당시 가요계에는 “노래가 히트되려면 임신 중에 녹음을 해야 된다”는 소문이 나돌며 ‘임신녹음’이라는 웃지 못할 유행어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60년대 대중 가요인들이 스카라 계곡으로 모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당대의 메이저 음반사인 미도파레코드와 녹음실이 들어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청계천의 음반 소·도매업자들과 막 태동한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비롯해 한국작가협회 그리고 극장 쇼를 담당했던 각종 공연단체에다 음악학원들까지 몰려들어 밀집했기 때문이다. 생전 반야월의 추억담 한마디. “가난했던 그 시절 대부분의 가요인들은 커피 값이 없어 엽차만 시키다가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담배 한 개비라도 있으면 잘라서 나눠 피웠던 인정 넘쳤던 시절이었다.” 노래‘스카라 계곡’을 부른 가수 쟈니 리 씨도“스카라 계곡에는 가수 악사 작곡가 작사가들이 모여들었는데 너나 없이 배고팠던 시절이라 누가 설렁탕이라도 사준다 하면 저녁까지 해결한다는 생각으로 두 그릇을 먹는 과식을 해 만성 위장병으로 고생했다”고 했다. 한국전쟁 이후 국가 재건과 경제발전이 국가적 모토였던 우리에게‘문화’라는 말은 사실 사치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경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요즘 우리는 한류니 케이팝(K-POP)이니 하며 문화강국인 양 우쭐해하고 있다. 문화란 장구한 세월의 이끼를 거치며 생성되는 법 빛나는 옛 전통과 역사를 보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한 나라의 건강한 문화는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Munhwa         최규성 대중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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