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3> 동시상영관

浮萍草 2013. 6. 2. 00:00
    칙칙한 뒷골목…‘할리우드 키드’의 꿈이 자라던 삼류극장
    처음 컴퓨터를 샀을 때가 언제더라.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지 5, 6년 뒤였으니 대략 1990년쯤일 게다. 나를 나이 먹은 아저씨 취급하지 마라. 누구보다 먼저 첨단 컴퓨터를 도입한 혜안과 총기를 지닌 청년의 감수성이 남아 있으니. 당시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를 쓰면 인간의 사고가 마치 걷다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고 선동했다. 당연히 컴퓨터만 있으면 대단한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평소 쓰던 워드프로세서를 대신해 간단한 문서나 작성했을 뿐이다. 복잡한 도스(DOS) 운영체제는 어렵기만 했고 느려터진 인터넷은 짜증을 키웠다. 평소대로 걷는 게 더 낫다는 볼멘소리는 당연했다. 열통 터지는 자잘한 사고도 멈추지 않았다. 월부도 채 갚지 못한 컴퓨터를 제 손으로 박살 낸 심정은 동년배라면 공감할지 모른다. 컴퓨터의 위력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컴퓨터 성능의 비약적 발전을 말로 해서 무엇 하랴. 컴퓨터 하나로 음악과 사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된다. 팽팽 도는 속도를 자랑하는 인터넷은 지금까지의 불만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무엇보다 놀란 일은 멀티태스킹이다. 컴퓨터 한 대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동시에 펼치는 마법은 놀랄 만했다

    서울 변두리와 지방 소도시의 동시상영관은 사춘기 중·고생들의 ‘욕망의 분출구’였다.위 사진은 1960년대 속초의 중앙극장(출처:속초문화원의 ‘옛사진으로 엮은
    속초의 발자취’)

    성인영화를 틀던 서울의 한 동시상영관 문화일보 자료사진
    각해 보니‘멀티태스킹’은 컴퓨터 이전에도 있었다. 한 영화관에서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보여주는 극장 말이다. 동시상영관은 1930년대 미국의 경제공황기를 출발로 한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도 동시상영관이 등장한다. 이유야 뻔하다. 가난했던 백성들에게 같은 돈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보게 해준 호의는 누구라도 반겼을 테니. 팍팍한 살림살이에 대처하는 방식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어떤 극장에서는 영화 한 편을 더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영화관 주인들은 영화가 끝난 다음엔 가수와 무용수를 동원해 쇼를 벌였다. 기막힌 상술은 금방 효과를 보았다. 본전 이상의 충족감을 느낀 관객들은 쇼를 벌이는 날이면 연일 만원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별문제 되지 않았다. 한물간 벌거벗은(지금 보면 벗은 것도 아니지만) 무용수들이 떼로 나와 다리를 쩍쩍 벌리며 춤을 췄다. 올백 머리에 흰 양복, 번쩍거리는 백구두를 신은 뽕짝 가수엔 별 관심도 없었다. 맨 앞줄에 앉은 형님, 아저씨들은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어댔다. 여기저기서 연방 마른침을 삼켜대는 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1970년대 텔레비전 가진 집은 동네에서 몇 되지 않았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값싸게 즐길 최고의 오락거리를 제공해준 영화관의 성업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영화와 쇼를 보여주는 극장으로 몰렸고 열광했다. 신문 사이에 끼워져 배달되는 광고 전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시라! 꿩 먹고 알 먹고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 경미극장으로.” 동시상영관은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다. 1990년대 들어서 전국의 극장들은 점차 UIP(다국적 영화배급사) 직배 영화관으로 바뀌게 된다. 동네의 오래된 재개봉관들과 동시상영관은 이때 사라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극장 미술부의 수준이 파악되는 손으로 그린 커다란 영화 간판도 함께. 이 멋진 거리의 장식품은 빛바랜 흑백사진 안에만 남아 있다. 대신 상가 건물의 지하에 100석 규모 남짓의 소규모 동시상영관들이 많이 들어섰다. 낯설어 하는 관객들을 유인하기 위해 극장주는 요구르트를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영화도 보고 요구르트도 먹고” 멀티태스킹이 별건가? 동시에 여러 일이 벌어지면 되는 것이지. 지금은 없어진 동시상영관은 40대 이후 세대들에게 각별한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학교 훈육주임 선생 몰래 숨어들어간 극장에서 본 영화는 몇 십 년 흘러도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 레오나르도 파비오 감독의 ‘나자리노’(Nazareno Cruz Y El Lobo, 1974년). 사랑을 하면 늑대로 변하는 청년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와 귀에 익은 음악은 생생하다. 영화광인 나의 친구가 있다. 1970년대 후반 중학교 시절에 본 다리오 아르젠트 감독의 호러영화 ‘서스페리아’(Suspiria, 1977년)의 충격은 평생 영화의 길로 들어서게 한 출발이 됐다. 중·고등학생이 영화관에 드나드는 일은 곧 문제아로 추락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개교기념일이나 중간고사가 끝난 후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화를 단체관람 하는 것 빼고서. 청소년 관람가 영화란 얼마나 심심한가. 파격적 내용의 프랑스 영화 ‘세브리느’, 정윤희가 나오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같은 성인물을 섭렵해야 영화 좀 본다고 하는 거다. 지도교사의 눈은 매서웠다. 학교 근처의 영화관에 잠복해 있던 선생에게 걸리면 최소 근신에서 정학 정도를 각오해야 한다. 젠장! 극장 가서 영화 한 편 봤다고 정학 처분이라니. 당사자라면 미치고 팔짝 뛸 억울함은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난 빵집도 못 가게 하고 성인물도 보지 말라는 교칙을 한 번도 지켜본 적 없다. 요리조리 피해 다닌 탓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운이 좋았을 게다. 숨어서 먹은 빵의 개수와 보지 말라는 영화 편수를 더하면 난 열 번도 넘게 정학 처분을 받았을지 모른다. 대신 빵의 양은 사랑을 키워 같이 사는 여자를 만들었다. 몰래 봤던 수많은 성인물과 B급 영화의 스토리는 글감과 사진의 내용으로 바뀌어 먹고사는 밑천이 된다. 어설픈 금기가 내겐 약이 됐다. 1960년대가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는 데엔 별 이견이 없다. 영화 제작사의 넘치는 의욕을 해소시키려면 많은 영화관이 필요했다. 영화관은 늘어나 1971년 전국엔 총 717개가 영업을 벌였다. 통계를 들먹일 것도 없다. 지금도 서울 곳곳에 있었던 많은 극장을 기억한다. 1970∼1980년대엔 서울의 3대 개봉관에 속했던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이 유명했다. 개봉관이 일류라면 재개봉관은 이류 취급을 받았다. 주변 분위기와 환경이 조금 열악했고 시설이 낡았기 때문이다. 개봉관 상영을 마친 필름은 며칠 후 서울 곳곳에 널려 있던 재개봉 극장에 걸렸다. 개봉관이 서울 중심가에 몰려 있다면 재개봉관은 부도심 지역에 자리 잡았다.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던 이유로 재개봉관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재개봉관들은 수많은 할리우드 키드를 키워냈다. 오늘날 세계적 명성의 한국 감독들은 여기서 꿈을 키웠고 공부를 대신했다. 수유리 대지극장, 청량리 대왕극장, 남영동의 금성극장과 성남극장 노량진의 노량진극장 서대문 화양극장 영등포 명화극장…. 서울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이들 극장에서 미래의 명감독들을 한 번쯤 마주쳤을 개연성이 높다. 이류는 삼류가 있어 돋보인다. 동시상영관은 삼류극장 정도로 분류될 것이다. 과연 삼류극장은 뭔가 달랐다. 동네의 광장 역할을 했던 동시상영관 입구였지만 부근엔 예외 없이 싸구려 술집과 여인숙들이 몰려 있다. 문화의 공간치곤 불량스럽고 냄새나며 칙칙한 그림들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좋았다. 영화관 계단은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동네 양아치들의 집합 장소였으며 취객들이 오줌 휘갈기는 화장실로 쓰였기 때문이다. 내부 시설 역시 열악했다. 은막이어야 할 스크린은 누렇게 바랬고 뒤편에 놓인 알텍 스피커에선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붉은 융으로 만든 천 의자의 기름때 찌든 끈적임은 여름이면 엉덩이에 쩍쩍 달라붙었다. 에어컨이 돌아갈 리 없다. 화면 앞에 놓인 대형 선풍기는 폭풍 같은 소리를 내며 영화의 감상을 방해했다. 화면엔 연신 비가 내렸고 자글거리는 소리가 묻어났다. 화면 비율이 맞지 않는 시네마스코프 필름은 팀 버턴 영화의 유령처럼 주인공의 얼굴을 길쭉하게 늘려놓았다. 그나마 중요한 장면에선 예외 없이 화면이 끊겼다. 휘파람을 불며 항의하는 일은 정해진 수순이다. 필름을 잇는 영사기사의 손놀림이 둔해지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쌍욕을 해대며 환불을 요구했다. 킬킬거리며 시간을 죽이던 불량배들은 담배를 꼬나물었다. 제대로 환기가 되지 않는 극장 내부는 연기로 매캐했다. 누군가 씹어대는 오징어 냄새가 더해져 극장 안은 오묘한 악취가 넘실거렸다. 엄마가 포대기로 업고 온 아이들은 때맞춰 수시로 울어댔다. 그래도 영화는 돌아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열광했다. 어둠이 있어 가공과 실재를 혼동했고 냄새와 소리가 섞여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때가 아름다웠다. 영화 말고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었으니 몰입으로 사랑을 키울 수밖에.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 온갖 것을 손에 쥐어본 풍요의 시대가 준 교훈이다. 컴퓨터 한 대면 온갖 영화를 다 볼 수 있는 지금 감동은 왜? 이리 얇아지는지. 과거가 그리워지면 늙는 것이라는 데 나이 탓인가.
    Munhwa         윤광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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