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스케치여행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浮萍草 2013. 4. 12. 07:00
    그 섬세함, 당장이라도 살아 뛰쳐나올 듯…
    촌 동생의 딸아이 돌을 맞이하여 간만에 외가인 원주를 찾았다. 혼자 떠난 길,주말의 영동고속도로는 으례 그래왔듯 이른 시간부터 정체다. 비어 있는 나들목을 보고 충동적으로 핸들을 돌려 국도로 빠져 나왔다. 시간은 충분했다. 지도에서 이왕이면 가보지 않은 길을 검색하다 낯익은 지명을 발견했다. 법천사지가 자리하고 있는 원주 부론면. 법천사지에는 바로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가 있기 때문이다. 지광국사의 승탑과 탑비에 관한 이야기는 경복궁으로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예전에 경복궁에서 궁궐과 맞지 않는 승탑을 보고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그 승탑의 주인공은 바로 지광국사 해린이었다. 원주에서 태어나 법천사에서 출가하여 고려시대의 황금기라 일컫는 고려 초 문종11년 국사(國師)까지 오른 스님이다. 그는 유학(儒學)에 능숙하고 문장과 법문에도 출중하여 고려 불교 법상종 중흥의 주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지광(智光)이라는 시호 역시 문종21년에 그가 입적하자 이를 깊이 애도하는 뜻에서 문종이 내린 것이었다. 입적 후 불교의 화장식인 다비(茶毘) 또한 원주 법천사에서 이루어졌고, 묘탑과 묘비도 그 곳에 마련되었다. 하지만 절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버렸고 급기야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묘탑만 오사카로 밀반출했던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총독부에서 수사하여 회수해왔으나 원위치인 원주가 아닌 지금의 경복궁 경내에 가져다 놓았다. 설상가상으로 광복 후 한국전쟁 때에는 포화에 처참히 부서져 보수를 하기에 이르는데 지금도 다가가 살펴보면 조각들을 다시 접착하여 붙여 놓은 모습이 역사를 견디어 온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 했다. 경복궁 내에는 이 묘탑 말고도 불교의 여러 탑들이 더 있었다. 이는 과거 총독부 시절부터 이 터에 이어져 내려온 박물관의 내력 때문이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신축되면서 주변 친구들은 모두 이사를 갔지만,부상이 극심했던 이 묘탑만은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경복궁내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 이다. 어찌되었든 꼭 한 번 가보려 했던 탑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갑자기 돌잔치 가는 길이 기대 가득한 답사 길이 된 느낌이다. 부론면은 우리나라 12조창(전국에서 조세미를 걷어 모아두는 지방 창고)중 하나인 흥원창이 있던 곳이다. 원주,평창,정선,강릉 등 강원도 일대에서 거둬들인 세미들을 이곳에 모은 후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한양까지 보냈다.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이 북적였을 테고, 많은 말(論)들이 오고가면서 부론(副論)이라는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명 하나의 탄생도 참 흥미롭다. 부론면에서 법천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골 동네이지만, 큰 버스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었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내가 도착하였을 때에는 버스에서 내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한꺼번에 그들이 떠나자 이내 법천사는 폐사된 장소에 딱 어울릴만한 정적만 남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시간이 날 때면 자발적으로 이곳을 들린다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법천사터에서 열심히 주변 청소도 하고, 답사객이 찾아오면 설명도 해준다고 했다. 미리 공부를 하지 않고 불쑥 찾아온 엉성한 답사가 덕분에 윤택해졌다고 할까. 그는 들고 있던 기다란 빗자루를 지휘봉처럼 이용해가며 탑과 절터의 구석구석의 의미들을 말해준다. 강원도 사투리가 구수하게 섞인 그의 설명은 매우 흥미롭고, 진지하기까지 했다. “이 곳에 있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옵니다. 옆에 있다 주섬주섬 주워들은 거죠 뭐.” 탑비의 느낌부터 이야기 하자면, 말이 필요 없다. 한 마디로 최고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묘비 중 최고로 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검은 점판암 비를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렸다. 많은 것들을 새겨 넣었는데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섬세함은 당장이라도 살아 뛰쳐나올 듯 한 강렬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와 명필가, 석공이 모여 만들어낸 걸작이기에 가능했던 걸까. 과연 당시 지광국사의 지위와 업적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산 속에서의 해는 더 빨리 지는 법이다. 우리는 어스름이 낄 무렵 떠날 채비를 하고 각자 차에 올랐다. 그가 물었다. “나무를 좋아하신다고 했죠? 시내로 가는 길에 멋진 느티나무가 하나 있어요.” 나는 그의 차를 따랐다. 차는 산 속의 국도를 구불구불 이어 달리다가 이내 작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거대한 느티나무(원성대안리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279호) 한 그루가 저녁 하늘빛에 검은 가지를 한껏 뻗쳐내고 있었다. “오히려 무성할 때보다 이렇게 잎이 나오기 시작하는 요즘이 더 아름다운 것 같지 않으세요?” 정말 그랬다. 나무의 수형은 식물이라는 생물이 낼 수 있는 가장 근사한 포즈로 저녁의 달빛을 모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우리는 시내로 들어가는 국도의 교차로에서 짧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는 끝까지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또 인연이 된다면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멀어졌다. 돌잔치로 향하는 나는 알 수 없는 풍요로움에 한껏 기분이 들떠 있었다. 한 해를 살아 온 아이를 축복하기 위한 선물로 이 기분을 전달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안았을 때, 방금 받아온 천년을 버티어 온 비석과 오백년을 살아온 나무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느껴질 수 있기만을.
    불교신문 Vol 2820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