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기도도량

16. 소요산 자재암

浮萍草 2013. 4. 6. 07:00
    중생의 천년 속울음을 삼키다
    원효 스님이 창건한 사찰 관음 현신 친견 뒤 조성해 원효굴·원효폭포도 유명
    원효폭포와 원효굴.
    울음이 겨울을 삼켰다. 찬바람은 소요산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눈을 흩뿌렸고 자재암 향하는 걸음을 무겁게 했다. 속리교(俗離橋) 옆 원효폭포는 얼어붙었다. 원효굴 부처님은 얼음장 같은 미소로 중년남성의 맘을 얼렸다. 그는 108 계단을 오르며 108번 참회했다. 가족들 볼 낯이 없었다. 해탈문에 매달린 종이 차갑게 울었다. 도망치듯 자재암 품에 들었다. 그날, 이름 모를 50대 중년남성을 안은 대웅전이 울었다. 그가 흘린 눈물은 비탄을 품었다. 그의 어깨가 흐느꼈다. 이곳을 벗어나면 오갈 데가 없었다. 사채는 눈덩이처럼 불었고 갚을 능력이 없었다. 가족은 거리로 내몰리게 생겼다. 죽고 싶다는 말이 입술을 사이로 새어 나왔다. 노보살은 대웅전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갔다. “죽을 힘 있으면 그 힘으로 참회기도하며 500배를 올려라.” 한 마디였다. 그는 대꾸도 없이 생전 해보지도 않은 절을 했다. 살아가야만 했다. ‘살아간다’는 말에 담긴 절절함을 깨달았다. 그는 울음을 삼켰다. 간절함이 물어다준 인연은 고마웠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갚으라”며 빚을 갚아줬다. 삼켰던 울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500배의 절절함도 희미해져갔다. 열심히 살았다. 빚을 갚고 나자 탐욕이 피어올랐다. 자재암 발길을 끊은 지도 1년 반이 지났다. 속리교 너머 세속 삶에 짙게 물들기 시작했다. 풍요롭던 삶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파산 직전까지 가세가 기울었다. “부지런히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며 하늘을 원망했다. 가을이었다. 지난 겨울 부처님의 차갑던 미소가 떠올랐다. 염치 불구하고 자재암을 찾았다. 부처님은 차갑지 않았다. 자애로운 미소로 그를 마중했다. 평안했다. 한 중년남성 얘기를 전하던 법련화 보살이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가피 받으면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태만해져선 절대 안 된다.” “하루라도 정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 분은 가피를 얻어가더라.” 보살은 10년 동안 소요산 자재암(주지 혜만 스님)서 기도 중이었다. 보살도 심한 우울증으로 힘들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3년 전 뇌출혈로 남편과 사별했다. 약에 기대니 방광, 신장 등 몸 속 장기는 비명으로 아우성이었다. 병원 치료도 소용없었다. 7년간 찾았던 자재암 불보살에게 기댔다. 아픈 몸으로 새벽길 마다않고 다니다 아예 상주했다. 굴법당 옆 원효샘물을 양약 삼아 마셨다. 약이라 굳게 믿었다. “소변이 정말 시원하게 나오더군요. 우울증도 사라졌어요. 위염, 방광염약 다 끊었지만 오히려 멀쩡해요. 불보살이 계신다는 굳건한 믿음이 주신 가피이지요.” 보살은 응어리진 속을 풀 곳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랬다. 그 곳이 부처님 품이라는 게 큰 공덕이라고 했다.
     
    ▲ (좌)원효굴 부처님. ▲ (우)자재암 굴법당 나한전. 금강역사가 문을 지켜 섰고 석가모니불과 16나한, 천불이 기도객을 기다린다.

    원효폭포와 원효굴 부처님을 참배하고 속리교를 건넜던 발걸음을 떠올렸다. 세속 일 다 떨치고 다리를 건넜을까. 원효굴서 불자 촛불 공양에 기대어 웃고 계시던 부처님은 웃음을 보이셨을까. 108 계단 오르며 입으로 마음으로 지었던 악업들을 내려놓았나. 해탈문 종은 노래하지 않았던 기억만 남았다. 법련화 보살의 ‘믿음’ 두 글자가 가슴 속에 맴돌았다. 대웅전은 입을 닫고 있었다. 법복 입은 한 보살의 염불만 대웅전을 독차지했다. 무던히 절하며 외는 보살의 염불은 홀로 청정했다. 기도가 끝나자 다른 보살이 대웅전에 들었다. 굴법당으로 걸음 옮기는 찰나, 대웅전 문틈으로 보이던 합장한 보살의 신심이 눈부셨다. 굴법당은 자재암의 나한전이다. 금강역사가 법당에 들려는 객을 훑는다. 섬뜩한 눈빛은 한 티끌 번뇌도 용서치 않을 태세다. 법당 오른쪽 원효샘이 맑은 물을 머금고 있었다. 원효샘은 자재암의 감로수다. 원효 스님은 차의 달인이라고도 차인들사이에 널리 알려졌단다. 스님이 창건한 절터엔 필연적으로 약수가 나온단다. 찻물로 으뜸인 석간수가 솟는다고 전해 내려온다. 자재암의 원효샘 석간수는 찻물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물이다. 자재암은 신라와 고려때, 조선중기까지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고려시대 시인 백운 이규보는 이 물맛을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했다.
    천년고찰 나한기도도량 굴법당 기도객들 줄이어 ‘반야심경’ 언해본 소장
    굴법당 천 분의 부처님. 뒤로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이 자리했다. 천불 가운데 어느 분이 기도객 마음일까.

    금강역사의 매서운 눈빛을 애써 외면한 채 법당에 마음을 부렸다. 천연동굴에 자리한 굴법당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가섭존자, 아난존자 등 16대 아라한을 봉안했다. 1000분의 부처님이 주불과 나한 앞을 장엄했다. 법당 바닥엔 작은 웅크림 하나 있었다. 카메라 들고 쭈뼛 선 객을 돌아보던 얼굴엔 땀이 흠뻑이다. 다시 무릎 꿇고 이마를 바닥에 맞댔다. 법복 등은 땀으로 흥건했다. 무슨 마음 공양 하시는지 절엔 한 치 흔들림도 없다. 숨소리조차 잠겼다. 법당 바깥서 들리는 말소리는 기도객 주위를 서성이다 사라졌다. 무례하게(?) 말을 붙였다. 700배 남았다고 했다. 3000배를 목표로 아침 7시30분부터 기도를 입재했단다. 묘법심(50) 보살은 취업을 앞둔 자식이 돈이 아닌 진정 원하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며 살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이 자리한 곳에서 주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게다. 그래서 어제 자재암을 올랐다. 수원의 새벽을 열고 자재암 올라, 오늘 3000배로 소요산 새벽을 두드렸다. 천불이었다. 보살은 굴법당 나한전 부처님 앞을 수놓은 천 개의 신심 그 자체였다. 천불 가운데 슬며시 보살의 신심을 올려본다.
    대웅전. 기도하는 이의 합장이 새어 나온다.

    문득, 자재암이 궁금했다. 기도객의 간절함이 그냥 여무는 곳은 아닐 터다.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대사가 중창했다.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했다. 원효대사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머물렀다는 요석공주 궁지와 사자암지,소요사지,현암지,원효사지, 조선 태조 행궁지가 있다고 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단다. 자재암에는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 ‘반야바라밀다심경’ 언해본을 고이 받들어 소장 중이다. 이 경전은 당나라 현장 스님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가 자신이 만든 ‘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주석 서다. 세조 10년(1464)에 ‘금강경’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발간했다.
     
    ▲ (좌) 대웅전서 기도 염불하는 보살님. ▲ (우)해탈문, 문 너머 원효가 뛰어내릴 찰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대가 있다.

    자재암이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도 흥미롭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뒤 오로지 수행 일념으로 인적이 끊긴 깊은 산속을 찾았다. 발길 닿은 곳이 현재 자재암 자리, 이곳에 초막을 짓고 서원했다. “정각을 이루지 못하면 이 자리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원으로 용맹정진했다. 어느 날, 밤은 깊었고 비가 내렸다. 약초를 깨다 길 잃은 여인이 원효에게 하룻밤 신세질 것을 청했다. 원효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런 법문을 남겼다. “마음이 생겨 옳고 그르고, 크고 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고 가지가지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사라진, 즉 상대적 시비 가지가지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 원효에게 자재무애의 참된 수행 힘이 있노라.” 여인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중생구제를 구실 삼아 원효의 심지를 시험한 관세음보살이었다. 다음 날 관음의 진용을 뵌 원효는 환희에 젖어 절을 짓고 자재암(自在庵)이라 이름 붙였다. 원효는 그랬다. 부지런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두려워했다. 크고 작은 온갖 속박을 불같이 태우며 나갔다. 어느 새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결코 물러나는 법이 없으리라. 자재암 경내 초공양 올리는 곳의 글귀가 마음을 붙든다. “모든 시작을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수행하며, 기도로써 성불하라.” 한 중년남성의 속울음과 3000배하는 보살,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건강을 되찾은 보살, 주지소임 1년이 좀 넘은 기간동안 내내 새벽예불과 108참회기도,‘지장경’ 1독에만 전념하는 주지스님……. 천년고찰 자재암이 나한기도도량으로 유명하지만 중생의 신심 모두를 감싸는 듯 하다. 해탈문 앞에 섰다. 기도객, 등산객 모두 종을 치고 웃으며 소요산을 내려갔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고, 죽은 물고기는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산 신심은 세속 거슬러 올라 속리교 건너 해탈문 종을 치고 자재암에 오를 게다. 혹 종소리 들리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꽃은 늘 웃어도 시끄럽지 않고 새는 항상 울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네 신심 조용히 들끓고 있으리라.
    Beopbo Vol 1162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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