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기도도량

14. 관악산 연주암

浮萍草 2013. 4. 2. 07:00
    벼랑 끝 덩그러니 앉은 가피, 중생을 보듬다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해 국내 유명 나한기도도량 세종 형 효령 영정도 모셔
    빗줄기 거둔 하늘이 흰 구름과 관악산 연주대로 파란
    속살을 가렸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응진전 하나 덩그러
    니 앉았다.
    퍼붓던 비가 멈췄다. 폭우는 4km 남짓한 관악산 깊은 계곡을 풍요롭게 했다. 과천향교에서 연주대로 향하는 마음이 넉넉해졌다. 숲 안까지 안고 왔던 잡다한 걱정들이 사라져서다. 숲 밖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번뇌를 삼켜 버려서다. 연주대까지 3.6km. 산은 초록으로 영글었고,짝 찾는 풀벌레 소리가 지천이었다. 늦여름은 넉넉하게 가을을 준비 중이었다. 세상사에 치어 모나고 각진 마음까지 둥글어졌다. 나무아미타불이 새겨진 바위를 만나자 절로 합장이다. 계곡물 잠시 쉬어가던 곳엔‘불기 2528년 마하반야바라밀’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표지석 밑 평평한 바위에 왠지 부처님이 계셨을 것 같다. 부처님 빈자리 ‘마하반야바라밀’과 계곡물이 차지했다. 1시간 30분 정도 오르자 목탁과 염불소리가 들렸다.
    지쳐있던 심신이 먼저 반겼다. 저 어디쯤 연주암이 있으리라. 계단 왼쪽으로 천수관음전이 보였다. 대웅전 앞엔 3층석탑이 세월을 견디며 섰다.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했단다. 석탑에 사뿐 앉은 작은 동자상과 소불이 정겹다. 대웅전 부처님께 참배한 뒤 그대로 눌러 앉았다. 지장기도 중인 스님과 신도들 모습에 움직일 수 없었다. 등 굽은 백발 할아버지로 향한 시선이 멈춰 버렸다. 세월은 젊음을 앗아갔다. 마른 몸은 검정 반팔 티와 허름한 반바지를 걸쳤다. 무릎 꿇고 머리를 숙였다. 객 마음이 요동쳤다. 3배만 하려거니 했건만 10배 올린 뒤 바닥에 맞댄 이마 아래 입술은 뭔가를 빌고 빌었다. 그렇게 108배를 했다. 세월이 짓눌러버린 몸뚱어리는 문제 되지 않았다. 온 마음 다 바쳤으리라. 부처님 예 있단 생각에 합장하고 대웅전을 나섰다. 연주대로 발길을 옮겼다. 범종각과 효령각 샛길 담장엔 돌탑들이 무수했다. 연주대 향하는 누군가 돌 하나 가만히 올리고 합장했다. 간절한 맘 하나 가만하다. 효령각은 효령대군 영정을 모신 곳이다. 훗날 의상대가 연주대로 이름이 바뀐 유래에도 효령대군이 등장하는데 왕위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주(戀主)’가 됐다는 게다. 꼭 그렇지만 않은 듯하다. 조선 태종 둘째 아들 효령은 조선초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거론되곤 했다. 유학자의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일생 불교 중흥에 이바지 했다고 학자들은 평한다. 승적에 오를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던 인물이라고 한다. 1432년 한강에서 7일 동안 수륙재를 열고 1434년 4월 회암사 중수를 건의해 다음해 불사를 진행했다. 같은 해 5월 흥천사 탑전 수리를 명하고 공사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다. 1452년엔 용문산 상원사에 종을 주조해 봉안했고 1464년엔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개최했다. 1465년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우리글로 풀었다고 한다. 신심은 왕위를 갖지 못한 맘을 달랬던 걸까. 아니면 부처님 향한 마음이 왕위를 미련 없이 놓을 수 있게 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연주암에서 효령각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대군을 기린다는 사실이 고맙다.
    연주암 연주대 응진전 기도객들.
    연주대는 깎아지른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빗줄기 거둔 하늘이 파란 제 살을 뽐냈다. 흰 구름, 연주대로만 속살을 감췄다. 연주대에는 응진전이 덩그러니 서울과 한강, 과천 지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진전 앞 좌복 깐 자리는 기도객 몫이었다. 연신 거만한 마음 내려두고 정갈한 맘 하나 부처님과 나한께 올리려는 정성이었다. 연주대 응진전에는 현세불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로 미래불 미륵불과 과거불 제화갈라보살이 자리했다. 그 뒤편엔 16나한이 모셔져 있었다. 빈두로바라도아, 가락가바리타사, 낙구라, 가리가, 수박가, 나호라, 인게라, 아시다 존자가 부처님 왼쪽 뒤를 호위했다. 오른쪽 뒤엔 가락가벌차, 소빈타, 발타라, 벌사라 불다라, 반탁가, 나가서나, 벌나바사, 주다반탁가 존자가 계셨다. 연주대 응진전 화주로 5년째 살고 있는 보현행(58) 보살 설명이 알찼다. 명호만 부르지 말고 상호를 알고 기도 올리라는 일침이었다. ‘응진(應眞)’이랬다. 기도가 답을 얻으려면 진실로 마음 다해야 한댔다. 연주대가 두른 바위도 상서로웠다. 말, 곰, 코끼리 형상을 한 바위가 부처님과 16나한을 둘러쌓다.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말과 진득하고 포기를 모르는 곰, 한 눈 팔지 않는다는 코끼리가 기도객의 정진을 경책한단다. 연주대 응진전은 새벽, 사시, 오후, 저녁기도가 하루도 빠짐없이 열린다. 연주암서 스님이 올라와 기도에 치성을 드린단다. 사시 마지불공 땐 객들 시주 쌀 공양물로 마지를 준비한다. 시주가 곧 부처님 끼니였다. 영험한 나한기도도량인 연주암 연주대 응진전에 서린 가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한 불자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배가 고프다’고 했단다. 그는 절에 가본지도 오래되고 해서 ‘쌀공양을 올리겠다’고 맘먹었다. 당시엔 삭도도 없어 오롯이 공양물은 신도가 지고 메고 산을 올라야 했다. 그는 공양 뒤 출장 가기 전날 밤 꿈을 꿨다. 법당 앞에 있던 그에게 큰 구렁이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찰나, 뭔가 구렁이를 때려 물러나게 했다. 놀란 그는 잠이 깼다. 꺼림칙한 마음으로 출장길에 올랐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일이 잘 마무리돼 편안했다. 전날 꾼 꿈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때, 마주보며 달려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그가 탄 승용차로 맹렬히 돌진해왔다. 차는 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깨어보니 기사와 자신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고. 이후 그는 연주대 응진전을 제집 드나들 듯 다닌다고 했다.
    연주대 응진전 16나한들.(위) 종각 풍경과 대웅전 앞 하얀 등.(아래)

    보현행은 연주대 역사를 줄줄 꿰고 있었다. 본디 의상대였단다. 문무왕 10년(670)에 환국한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했다. 여기에 기막힌 얘기가 있다. 675년 11월 삼국통일 과업을 완성한 신라 문무왕은 시름이 빠졌다. 넓어진 국토 관리가 걱정이었다. 의상은 왕과 나라의 미래를 논하다 관악산을 떠올렸다. 관악산은 예부터 개성 송악, 가평 화악, 파주 감악, 포천 운악과 함께 경기도 오악으로 불렸다. 빼어난 봉우리와 바위가 많았고 검붉은 바위로 이뤄진 관악산은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 ‘갓 모습의 산’이라고해 ‘갓뫼’ 또는 ‘관악’이라 했다. 발 아래로 과천 지역과 한강 유역,서울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묘안이었다. ‘연주암 중건기’ 등 사찰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 17년(677) 의상은 관악산 꼭대기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관악사를 창건했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의상대를 건립한 이유가 그 뿐이랴. 부처님 가피가 두루두루 온천하를 굽어 살피고 보듬길 바랐을 게다.
    예불 끊이지 않는 응진전 과거·현재·미래불 봉안 연주대 약사여래도 영험
    영험하기로 소문난 약사여래
    말 바위엔 약사여래부처님이 계셨다. 영험하기로 두 말하면 입이 아프다고 했다. 이곳에서 기도하다 허리를 다친 한 보살은 더 이상 연주대 약사여래를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산 아래서 기도를 올렸다. 그 맘이 갸륵했으리라. 생면부지의 흰 옷 입은 남성이 “허리가 아프시냐”며 침을 놓고 사라졌다. 고통이 가신 허리를 만지며 남성을 찾으려 해도 그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고마움을 전하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못찾았다. 그 뒤 보살은 연주대 약사여래를 꼬박꼬박 친견하고 기도한단다. 가피 영험담이야 믿는 사람 몫이지만,좋은 일을 부처님에게 돌리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기도객 맘은 누구나 헤아릴 수 없으리라. 관악사는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연주암’으로 이름이 바뀐다. 고려가 망하자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 유신들이 관악산에 은거하며 의상대에서 고려 왕조를 그리워한데서 유래했단다. 고려왕조나 임금을 그리워해 왕을 뜻하는‘주(主)’를 써서‘임금을 그리워한다’는‘연주(戀主)’를 관악사 새 이름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효령대군 설화보단 그럴듯했다.
    천수관음전 뒤로 우뚝 솟은 12지탑

    연주암으로 내려오는 걸음이 가볍다. 종각에 풍경이 걸렸다. 대웅전 앞엔 하얀 등이 펼쳐졌다. 마음이 멎었다. 숨소리도 몸을 숨겼다. 눈앞에 들어온 연주암이 가슴에 담긴 순간이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신심이 말없는 풍경을 달랬다. 짙은 녹음은 연주암을 자식마냥 감싸 안았다. 관악산은 늦여름이었다. 짝 찾는 매미소리가 절절했다. 땅 속에서 2~5년 동안 뿌리 즙으로 연명하다 겨우 허물 벗고 새 생명을 남기고자 목청껏 부르짖는 사랑가였다. 1~2달 뒤 새 생명 잉태하면 먼지로 돌아간다. 연주암 찾은 객들도 목청껏 부처님 향한 소리 없는 사랑가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네들 마음도 늦여름일 게다. 결실 맺기 전 더 뜨거운 법. 먹구름 물러간 연주암 하늘이 파랗게 불탄다.
    Beopbo Vol 1158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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