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기도도량

15. 청양 장곡사

浮萍草 2013. 4. 4. 07:00
    긴 세월 풍설 견딘 고목 병든 기도객을 인도하다 
    칠갑산 자락에 위치 국내 유일 대웅전 2곳 약사여래 영험 유명 동자 느티나무 기묘
    몇 백년 흘렀는지 모른다. 국보 약사여래가 가부좌 튼
    상대웅전 마당에 느티나무 한 그루 뾰족하다. 그 아래 장
    곡사. 뿔처럼 솟은 느티나무가 중생 번뇌를 찌른다.
    시간은 말이 없다. 몇 백년 흘렀는지도 모른다. 아니, 몇 천년인지도 가늠할 길 없다. 국보 약사여래가 가부좌 튼 상대웅전 마당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 홀로섰다. 상대웅전 떠받친 언덕에 솟았다. 느티나무는 제 뿌리 상대웅전 아래로 펼쳤다. 흙에 기대 긴 세월 풍설을 견뎠으리라. 그 아래 장곡사 가만하다. 뿔처럼 솟은 느티나무가 약사여래로 향하는 객 마음 속 번뇌를 찌른다. ‘왜 그리 많이 짊어지고 왔느냐’며 나무란다. 잠잠했던 바람이 애꿎은 풍경만 괴롭힌다. 청양 장곡사(주지 서호 스님)는 칠갑산 자락에 안겨 있었다. 칠갑산은 백제 땐 ‘금강산’, 지금은 ‘충남의 알프스’로 불릴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99개 골이 있다고 할 정도로 계곡이 깊고 숲은 울창하다. 명당이 7곳 있어 ‘칠갑산’이란다. 그 중 한 곳이 장곡사 아닐까. 잦은 비는 일주문서 하대웅전으로 이르는 길을 초록으로 장엄했다. 길 양 옆으로 나무그늘이 우거졌다. 하늘도 짙은 녹음에 제 자리를 내어 주고 있었다. 범종각 옆길로 장곡사에 들어섰다. 도량은 예스러웠다. 전각들은 아담하고 촘촘했다. 그 사이로 자리한 샛길이 정겹다. 절 대중이 사용하는 길에 놓인 ‘그대 발길을 돌리는 곳’이란 푯말은 객 마음을 여유롭게 했다. ‘출입금지’란 말보다 예를 갖춘 말 한마디가 고맙다. 장곡사는 850년(신라 문성왕 12년)에 보조선사가 건립했단다. 1962년 ‘칠갑산금당중수기’가 발견돼 알려진 사실이다. 1777년(조선 정조 1년)에 작성한 문서다.
    나무 바닥 대신 딱딱하고 찬 전돌이 깔린 상대웅전. 기도를 쉽게 생각지 말란 경책이다

    장곡사는 여느 절과 달랐다. 대웅전이 2곳이었다. 국내에선 유일하단다. 상대웅전(보물 제162호)과 하대웅전(보물 제181호)이 위와 아래로 사이좋게 자릴 잡았다. 상대웅전은 본사인 마곡사를 바라보고 있었고, 하대웅전은 남서쪽을 향했다. 조선 중기에 건립된 하대웅전의 주존도 남달랐다. 대웅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다. 대신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 객을 맞았다. 상대웅전도 마찬가지였다. 2기의 석조대좌 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 철조여래좌상을 모셨다. 주지스님은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약사여래 기도도량”이랬다. 상, 하대웅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만 봐도 그럼직하다. 아래 법당은 사바를 뜻하며 중생과 보다 가까이에 있으려는 약사여래를 상징한다 했다. 상대웅전은 수행자의 내면이랬다. 치열하게 정진해서 무명 걷고, 어두운 법당을 밝히는 세 분 부처님처럼 윤회 고리 끊고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라는 게 주지스님 설명 이다. 그래서다. 장곡사 약사여래에는 신묘한 일들이 많았다. 신도회장 무량심 보살은 수화기 너머로 신화같은 얘기를 전했다. 부마민주항쟁 때 하대웅전 약사여래가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고 했다.
    대웅전이 두 곳인 청양 장곡사.계단 하
    나에 번뇌 하나,계단 하나에 망상 하나 내려놓고 오르면 앞에 하대웅
    전,위에 상대웅전을 마주한다.약사여래 모신 대웅전 두
    곳이 객을 맞는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였다. 1979년 5월3일,신민당 전당대회에서‘민주회복’기치를 든 김영삼씨가 총재 로 당선 된 뒤 정국은 여야격돌로 치달았다. 박정희 정권은 야당의 손발을 잘라냈다.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해 10월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됐다. 다음 날 학생 5000여명이 시위를 주도했고 시민들이 동참 정치탄압 중단 과 유신정권 타도를 부르짖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 총 1500여명을 연행하고 125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민심 거스른 정권에 대한 경고였을까. 온 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견뎌야했던 민초의 설움을 대신한 측은지심 이었을까. 장곡사 약사여래는 피 같은 땀방울을 흘렸으리라. 땀은 눈물과 달랐다. 온 몸으로 짜낸 고름이었다. 곪아터진 유신체제, 민초의 가슴을 할퀸 시대상황이 남긴 상처에서 흐른 고름이었을 게다. 상대웅전 약사여래도 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졌다. 예산에 살던 한 거사는 꿈속에서 우연히 약사여래를 만났다. 합장으로 예를 갖추자 부처님은 약병을 건네며 ‘대웅전이 2개인 절을 찾아 기도하라’ 일렀다. 그는 부처님께서 주신 약병을 마신 뒤 알고 지냈던 사람 가운데 병으로 고생하는 이를 찾아 아픈 부위를 만졌다. 꿈이려니 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사람들의 병이 감쪽같이 나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대웅전이 2개인 장곡사를 참배했다. 상대웅전서 가부좌 튼 부처님이 꿈속 약사여래였다고 한다. 여래향(70) 보살도 상대웅전 약사여래 가피를 입었다.
    보살은 아예 장곡사서 먹고 잤다. 기도를 위해 제집으로 돌아갈 시간도 아까웠다. 허리가 아파 수술 전 부산의 한 사찰에서 108배를 한 뒤 치유됐던 기억이 장곡사 약사여래와 인연을 맺었다. 무릎이 아픈 어머니를 위해 대전에 사는 아들이 장곡사를 권했다. 보살은 무릎이 아팠다. 상대웅전 약사여래에게 매달렸다. 약사여래 명호를 부르며 사분정근을 빼먹지 않았다. 한 달이 다 될 무렵, 무릎 통증이 점차 사라졌다. 굳이 지팡이에 기대지 않아도 계단을 오르내렸다. “부처님은 있다. 빌고 또 빌면 나타난다”는 믿음이 기도에 답했다고 했다. 딸은 꿈에서 상대웅전 부처님에게 꽃공양 올렸단다. 시간 내 자신을 찾아온 남편과 딸 만나러 계단을 내려가는 보살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하대웅전 약사여래 주변에 눈이 갔다. 공양미가 가득이다. 예스러움 간직한 설선당에도 공양미 그득하다. 주지스님이 지역 소외이웃과 나누는 소중한 밥이었다. 장곡사 찾는 기도객들 시주였다.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건 밥 한 끼다. 장곡사 약사여래가 중생에게 밥 한 끼 대중공양 올리는 셈이다. 합장하고 상대웅전으로 발길 돌렸다.
     
    ▲ (좌) 국보 제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 ▲ (우) 예스러움 간직한 설선당. 소외이웃돕기를 위한 공양미가 그득하다.

    하대웅전 왼쪽으로 상대웅전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이 놓였다. 기왓장에 ‘뱀 조심하세요’란 글이 발걸음에 조심을 더한다. 숨 가쁜 계단 끝에서 상대웅전을 만났다. 국보 약사여래 부처님보다 바닥에 시선을 뺏겼다. 흔한 나무 바닥이 아니었다. 왕궁에나 쓰였던 고려시대 양식의 전돌이 깔렸다. 통일신라시대 팔잎연화문을 새긴 것도 있었다. 주지스님이 귀띔했다. 국보 제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 부 석조대좌’ 뒤편에 까맣게 그을린 전돌 8개는 중수하기 전 전돌이라 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쉽게 볼 수 없다고. 주지스님 귀띔 덕에 눈이 호강이다. 3배로 참배했다. 잠시 앉아 약사여래 부처님만 바라봤다. 전돌이 엉덩이를 찌른다. 그보다 차가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불편했다. 방석 깔지 않고 꿇었던 무릎이 빨갛다. 불편한 몸은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나무 바닥은 돌출 부위 없이 맨질한데 왜 전돌일까. 약사여래 찾는 기도객 맘 단단히 먹으라는 충고라고 지레 짐작이다. 무릎 한 번 꿇고 자신 낮추고 머리 조아릴 때, 오로지 간절한 마음만 공양 올리라는 게다. 자칫 정신 놓고 기도했다간 무릎이 남아나지 않으리라. 상대웅전 앞마당 느티나무 아래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장곡사 마음에 담고 느티나무 한 번 쓰다듬었다. 애썼다. 그 긴 세월 뿌리로 흙 움켜쥐고 작은 벼랑서 버텼다. 뿔처럼 솟아 그 긴 세월 못난 중생의 번뇌 찌르고 찔러 녹여 내렸다. 주지스님이 이 자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가늠해본다. 장곡사 ‘큰 북’이 발길을 붙잡는다. 북은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이곳에 살던 한 스님이 국난에 대비,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북은 상처 입었었다. 잦았던 외침과 깊어진 민초의 시름들이 쌓아온 세월 무게가 북을 찢어 놨다. 커다란 통나무 그릇은 옛날 사중스님들 공양구라는 데 장곡사 규모를 엿볼 수 있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Beopbo Vol 1160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