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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회화나무

浮萍草 2012. 11. 12. 06:00
    학덕높은 선비의 나무, 그 아래 다정한 군신의 모습이…
    가 나무를 즐겨 그리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나무가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객(客)을 맞아 준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같은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달라지는 나무의 그윽한 변화 때문이다.
     나무는 진정 ‘느리게’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멋진 존재다. 
    늘 풍경 속에 멈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매 시간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고, 해마다 달라진다. 
    짙은 녹음 때문에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지만 가을에는 가을빛으로 겨울에는 하얀 눈과 어우러진 앙상한 가지로,또 내년 봄에는 
    연둣빛 새싹으로 단장을 한다. 
    그러니 ‘계속해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뿐이다. 
    마치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 같다고 할까. 
    그렇게 시작해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나무 목록이 어느덧 수십 개에 이르게 됐다. 
    나란 사람은 나무에게 있어 긴 생애 동안 잠깐 스쳐가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간의 기록과 그 세월에 스스로 감동해 또다시 나무를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야 만다.
    ㆍ○ 집안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나는 나무
    내가 철마다 찾는 나무 중 몇 그루가 창덕궁 안에 있다. 창덕궁은 북한산의 깊은 숲이 북악산 자락을 타고 뻗어 내려온 끝에 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기도 한 곳이다. 궁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나이 먹은 나무들이 있다. 그중 회화나무 3그루를 스케치북에 담아 봤다. 회화나무라는 이름은 의외로 순우리말이다.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괴목(槐木)’또는 ‘괴화목(槐花木)’이라 한다.(우리나라에선 느티나무를 괴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괴’자의 중국 발음(huai)이 옮아와 우리말로 ‘회화’가 된 것으로 보인다. 숨 막힐 듯한 서울의 도심 속에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면 갑자기 초록의 낙원이 펼쳐진다. 두 눈을 맑고 시원하게 하는 초록빛. 바로 그 자리에 회화나무 세 그루가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돈화문에서 금천교에 이르는 일대는 왕실의 사무기관인 궐내각사가 모여 있는, 외조(外朝)에 해당하는 곳이다. 왕은 외조에서 삼정승(三政丞·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관료, 양반들을 만났다.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중국의 ‘주례(周禮)’를 보면 ‘면삼삼괴삼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이란 말이 있다. 삼공(우리나라로 따지면 삼정승)의 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그 표지로 삼는다’는 말이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학자수’라 하여 선비의 굳은 절개와 높은 학문을 상징하는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겨졌다. 옛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난다고 믿었다. 회화나무는 궁궐이나 서원, 선비의 집에만 심을 수 있었다. 그토록 뜻깊은 나무 아래 서서 임금을 대면하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회화나무 그늘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는 군신(君臣)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멋진 수묵화 같은 풍경이 떠올라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회화나무는 우리가 흔히 아카시아라고 잘못 알고 있는 아까시나무와 비슷하게 생겨 혼동을 주기도 한다. 두 나무는 모두 콩과 식물이다. 회화나무는 병충해가 적고 대기정화능력도 탁월해 요즘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 추세다. 이미 싱가포르는 도시 가로수 전체를 회화나무로 바꿨으며, 중국 베이징(北京) 시는 현재 가로수를 회화나무로 교체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에는 회화나무를 올림픽대로 주변과 압구정, 청계천변 등 여러 곳의 가로수로 심고 있다.
    ㆍ○ 기와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비 오는 날이 많아진 요즘이다. 비 내리는 궁궐은 여러 가지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 마루에 앉아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노라면, 옛 정취에 대한 감성이 절로 흐르게 마련이다. 스케치를 하는 손마저 덩달아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그림이 술술 그려졌다는 얘기! 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금 회화나무 아래에 섰다. 꽃이 피는 계절이지만 나무의 나이가 많아서인지 풍성한 느낌은 아니었다. 빗물에 떨어진 꽃을 주워 물기를 털어내고 가져온 책에 끼워 넣었다. 아마도 젖은 꽃잎 때문에 책장이 울고, 작은 얼룩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훗날 다시금 책을 펼쳤을 때 피어오를 작은 기쁨이 그 자국을 어루만져 줄 것이라고, 애써 책을 다독거렸다. 돈화문 기와 사이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물이 부드럽게만 느껴졌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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