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종교

내 종교만 절대 옳다는건 우상숭배

浮萍草 2011. 6. 25. 13:06
부와 권력 독점해 성공하면 곧 타락하는 ‘역설’
종교 다원화와 선택의 자유는 되레 종교엔 ‘약’ 
한겨레 자료사진
주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가치 다원화 현상이다. 
민주사회는 사람마다 자기가 원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법과 제도로 보장해주는 사회이다. 
타인의 동등한 권리를 존중하고 해를 입히지 않는 한 누구든 자기가 선택한 선(good)을 추구하며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아무도 나에게 특정한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강요할 수 없다.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고 종교가 다원화된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든 자기가 원하는 종교를 선택
해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누린다. 
누구도 나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 
심지어 부모라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의 가치관 인생관, 종교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장성한 자식은 자신이 택한 종교와 가치관에 
따라 살며 부모라도 간섭할 수 없다. 
서구 사회는 물론이고 가족의 유대가 매우 강한 한국 사회에서도 우리는 가족 구성원들이 종교를 달리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이러한 종교의 역할은 근대 세속화(secularization) 사회로 들어오면서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서도 과거 종교의 역할이 관습이나 전통으로 상당 부분 남아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인의 의식은 종교가 제시하는 전통적 가치관이나 인생관과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괴리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사상적으로 주도한 것은 인간의 이성을 진리와 도덕의 준거로 삼은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였다. 
이로 인해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세계관, 비판적 역사와 신화적 전승 그리고 자율적 윤리와 전통에 의거한 타율적 윤리 사이에 
극복하기 어려운 괴리가 발생했으며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서구 그리스도교 사회와 유대교 사회가 이러한 위기를 제일 먼저 경험했지만, 지금은 세계 어느 사회, 어느 종교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되었다. 
종교가 적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 그리고 성인의 말씀이나 경전의 초월적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 한, 종교적 가르침과 세속적 지성 사이의 괴리와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대 종교의 운명이다. 
  
유교도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독점의 시대는 갔다   
과학적 세계관과 역사적 상대주의의 도전으로 권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현대 종교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이미 언급한 
현대의 개방사회, 가치다원사회 자체이다. 민주사회의 혜택이자 정신적 혼란의 원인이기도 한 가치다원화, 종교다원화 현상 
자체가 이미 종교들의 상대화를 수반한다. 
가치관과 종교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는 어느 종교도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고 사회의 통일적 
가치관을 제공하기 어렵다. 
인생의 중요한 가치들이나 종교적 가르침이 개인의 주관적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림으로써 사회적 보편성이 부여하는 권위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단’을 뜻하는 영어의 ‘헤러시’(heresy)라는 말이 ‘선택’을 뜻하는 그리스어(hairesthai)에서 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곧 이단을 의미했던 시대가 전통사회라면, 현대 사회는 이 이단적 선택이 모두에게 자유와 권리로 보장
되는 사회이다. 
하지만 현대 종교가 과학적 세계관이나 역사적 사고의 도전을 오히려 현대화의 기회로 삼아야 하듯이 개방사회의 가치 다원화와 
종교 다원화 역시 비관적으로 보거나 개탄할 필요는 없다. 
종교의 다원화와 선택의 자유는 오히려 종교에게 약이 되고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의 종교다원 사회가 종교들에게 주는 새로운 기회를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종교의 홀로서기와 이로 인한 종교의 순수성과 진정성 회복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간 대화의 기회이며 이를 통한 각 종교 
들의 창조적 발전이다. 
한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 종교로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는 영구히 갔다. 
적어도 민주사회, 가치다원 사회, 종교다원 사회로의 이행이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어느 종교도 지나간 시대에 누렸던 독점적 지위를 다시 누릴 수 없으며 거기에 향수를 지녀서도 안 된다. 
조선조 시대 유교나 고려 시대 불교가 누렸던 것과 같은 영광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또 단지 ‘전통’이라는 이름(전통문화, 전통종교)에 의지해서 혜택을 기대할 수도 없다. 
1970-80년대부터 급속히 성장해서 한국 사회의 주류 종교의 하나로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개신교, 가톨릭) 역시 이제는 권력의 
유혹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현대 다종교 사회, 탈종교 시대의 종교들은 외부의 도움보다는 ‘홀로서기’를 해야만 한다. 
어떤 종교든 순전히 메시지 자체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어느 종교도 국가권력이나 정부의 지원이나 시혜에 기댈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현대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영혼과 영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종교는 이전보다 더 순수한 종교, 더 진정성을 지닌 신자들을 확보하는 종교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종교의 교리와 사상의 진위나 우열을 가릴 객관적 잣대는 없다   
대등한 세력을 가진 종교들이 공존하는 종교다원사회에서는 종교가 권력의 독점만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독점도 상실 
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진리 주장을 한다.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종교다원사회는 이러한 주장의 현실성과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한 사회의 다수를 신자로 확보하고 있는 종교의 절대적 
진리 주장은 쉽게 설득력을 지니지만, 종교가 다원화된 사회는 그러한 주장에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지 않는다.  
지식사회학자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회적 기반이 결여된 ‘지식’은 지식으로서 힘을 지니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나 초월적 실재를 말하는 종교의 경우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나와 대등한 지성과 도덕성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신앙과 종교 사상을 따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종교지도자 
들이나 의식 있는 신자들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공하며 정신적 부담이 된다. 
나의 종교가 가르치는 진리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거짓 아니면 열등한 가르침
에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종교들의 상이한 진리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어떤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척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의 척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어떤 위대한 사상가가 그런 척도를 발견했다 해도 종교들 모두가 거기에 동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종교마다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있으며 바로 그것이 진리의 척도라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의 진리 문제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에 관한한 모든 종교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편 윤리, 세계 윤리(global ethics) 같은 것을 찾는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모든 종교의 교리와 사상의 진위나 우열을 가릴 객관적 잣대를 찾기란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불가능하다. 
  
종교 간 진정성 있는 대화는 창조적 발전 위해 필연적   
종교사회학자들 가운데는 현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가 처한 상황을 시장경제 상황에 빗대어 이해하기도 한다. 
종교에 대해 냉소적 시각이지만 생각해볼 시사점이 있다. 
시장 경제에서는 언제나 독과점이 문제가 된다. 
한 기업이 자본이나 기술력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에서 동종의 다른 기업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지배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사회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경쟁자 없는 기업은 횡포를 부리게 마련이다. 
독과점은 또 기업 자체에게도 해가 된다. 경쟁이 없으며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회사운영이 나태해지기 쉽고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 개발을 게을리 하게 된다. 
종교의 독과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라고 독점욕과 지배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지만 제도화된 종교는 항시 집단적 이기주의와 독점욕의 유혹을 받는다. 수많은 신도를 
확보한 종교는 권력화 되기 마련이다. 
경쟁과 견제가 없으면 권위주의적이 되고 타락한다. 
다종교 상황은 이러한 폐단을 막고 종교들로 하여금 홀로서기를 강요하는 숨은 축복이 된다. 
다종교 사회의 종교들은 당연히 서로를 의식하며 자극을 주고받는다. 경쟁의식도 갖게 된다.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경쟁이냐가 문제이다. 
세력 확장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개인의 삶과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메시지와 실천의 경쟁이냐가 
중요하다. 
종교 간의 진정성 있는 대화는 다종교 사회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 뿐 아니라 각 종교의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종교학자들 가운데는 대화를 강조하는 현대 종교의 현상을 두고서 종교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불가피한 타협의 산물, 혹은 현대 세계에서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면서 공멸의 위기에 처한 종교들이 살아남기 위한 고육 
지책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종교 간의 대화가 현대 종교들의 살아남기 작전의 하나라는 냉소적 시각이지만, 대화에 임하는 종교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종교 간의 대화가 종교가 시장화 된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를 위한 전략이거나 배타주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풍토에서 
독점욕을 은폐하고 영토 확장을 하기 위한 선교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대화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더 솔직하고 
좋을 것이다. 
결코 진정성 있는 대화, ‘상생을 위한’ 대화, 배우려는 자세의 겸손한 대화, 자기 종교의 개혁과 발전을 위한 창조적 대화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 자체가 또 하나의 ‘성스러운’ 이념이며 ‘종교’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와 질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국민들 가운데 일반화되지 않으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껍데기
에 불과하게 되기 쉽다. 
정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쉽게 모방하고 도입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배후에 있는 이념과 가치와 사고방식을 사회 구성원
들이 내면화하고 자기화하는 일은 더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는 우리 한국사회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정착 단계에 들어갔지만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초월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나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공인의식 같은 것은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종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종교의 신자이든 다종교 사회에서 타 종교에 대해 지켜야 할 민주사회의 덕목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작금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보인 몰지각한 행위는 바로 이러한 덕목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내면화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 자체가 또 하나의 ‘성스러운’ 이념이며 ‘종교’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민주사회의 구성원 모두 - 남녀노소, 신분, 계층, 지위, 종교 소속 여하를 막론하고 - 가 존중하고 지켜야 할 절대적이고 
성스러운 가치와 덕목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성전(sacred shrine)을 가지고 있다. 
이 민주성전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피를 흘렸고 생명을 바쳤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순교자들인 셈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간 대화는 따라서 단지 종교들 사이의 대화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스러운 이념과 가치들과의 진지한 대화 
이어야 한다. 
각 종교는 타종교들과의 대화 못지않게 민주적 질서가 요구하는 가치와 덕목들에 대해 자체의 입장을 확실하게 정립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는 현대 종교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민주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와의 대화가 종교 간의 대화보다도 더 선행하고 우선적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종교 간의 대화가 진정성을 지닌 상생의 대화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종교들은 타 종교와의 대화를 외치기 전에 민주사회의 근대적 질서와 가치를 가르치고 내면화하는 일에 먼저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한국 종교계의 많은 문제들이 민주 사회의 기본 상식과 덕목의 결핍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Well Hani ☜
浮萍草   glinhaus @ hanmail.net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