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종교

8세기 혜초가 걸어간 5萬里 길

浮萍草 2007. 11. 27. 13:22

혜초를 찾아 나선'우리시대의 이야기꾼'소설가 김탁환 역사 속 인물들은 그의 펜 끝에서 마치 현재를 사는 듯 생동감 있는 캐릭터로 되살아난다. '김탁환 표'소설이 사랑받는 이유다. '불멸의 이순신''나 황진이'는 드라마로 제작돼 큰 성공 을 거뒀고 충무로에서 러브 콜을 받아 영화로 제작 혹은 제작 준비 중인 작품도 여럿이다. 나오기만 하면'베스트셀러'가 되곤 한다. 그가 요즘 또 하나의 대작을 준비 중이란다. 이런 이유로 그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은 꽤나 설�다. 그리고 그가 궁금했다. #1.1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서울 상암동 집에서 소설가 김탁환을 만났다. 고정관념일까. 뿔테 안경에 덥수룩한 수염은 왠지 모르게 '소설가'와 잘 어울린다. 수줍은 미소도 그랬다. △20일 오후 서울 상암동 산학협력센터에서 김탁환씨가 ‘혜초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송 원영 기자 "어휴 2시간은 좀 그렇네요. 1시간만 하시죠.”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그의 말이 떠올랐다. 차기작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다. 김씨는 지금 8세기를 살고 있었다. 혜초(慧超·704∼787년)와 혜초의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차기작에 대한 그의 설명은 거침이 없다. 김씨는 이미 혜초가 걸었던 길을 따라 실크로드와 인도 내륙을 세 차례 답사했다. "해외에서는 혜초를'세계적 여행가'로 평가합니다. 중국 현지의 교수들도 서유기의 모티브가 된 현장(陳玄·600∼664년) 법사보다도 여행가로서의 면모는 혜초가 더욱 뛰어났다고 얘기합니다. 현장은 천축(지금의 인도) 중심의'날란다'라는 절에서 불교 공부를 하다 돌아온 것이 전부이지만, 혜초는 4년간 무려 20여개국을 다녔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배낭여행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죠. 왕오천축국전에는 동로마제국까지 언급이 돼 있습니다. 스케일도 장난이 아닌 거죠.” 그는 혜초에 대해 설명하면서'흥미로운 인물'이라는 단어를 자주 끼워 넣었다. 아주 오랜 시간 관심을 가져온 인물이라고 하니 그 ‘애정’이 여간할까. "중국과 인도에 가선 기차 아니면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보통이 10시간이고, 길게는 22시간 동안 내리 기차를 탄 적도 있죠. 그런데 그 옛날 걸어서 그 길을 다녔다고 생각해 보세요. 혜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김씨는 애초 723∼727년 혜초의 발길이 닿았던 모든 곳을 답사하는 게 목표였다. 사실 1980년대 한 방송사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한·중 수교 전이어서 중국을 가지 못했고 인도 촬영분만 카메라에 담겼다. 몇몇 역사학자들을 제외하면 혜초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시도인 셈이다. 큰 그림 보기 결과적으로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간다라 지역을 끝내 가보지 못한 것이다. 간다라 지역은 8월 첫 번째 답사코스에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7월 한국인 선교사 피랍사건이 터졌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입국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아쉽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는 다음달 혜초가 죽었다고 기록돼 있는 중국 오대산을 다녀올 예정이다. 혜초의 삶에 방점을 찍는 장소인 만큼 아주 중요한 여정이 될 터다. "혜초에 대한 저의 관심은 기본적으로'신라나 고구려인들의 흔적이 얼마나 멀리까지 가 있나' 는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사 시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기껏해야 중국과 교역을 했을 뿐이라고 배웠지만 실제는 달랐거든요. 신라는 중국과 교역한 흔적이 4∼5세기 초까지 거의 없었는데 오히려 뱃길을 통해 로마와 교역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랍시아 유적지에서는 고구려인들로 추정되는 인물벽화가 발견되기도 했잖아요. 그게 7세기 유물로 밝혀졌으니까 신라나 고구려인들은 아마 혜초 이전에 실크로드를 이미 알았던 것 같아요.” 동서 문명 교류가 중국과 인도, 유럽에 의해서만 이뤄졌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도 사막과 초원 건너편 나라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당대의'주역'이었다는 사실에 그는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혜초 프로젝트는 그래서 그에게 더욱 뜻깊다. △중국의 쿠차 키질 석굴의 쿠마라지바 동상 앞에서.쿠마라지바는 쿠차국의 왕자로,현존하는 불경 번역본의 80% 이상은 이 사람이 쓴 것이다.김탁환씨는 “쿠마라지바는 혜초에겐 일종의 ‘롤 모델’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윤 동진 사진가 #2. 그는 소설 한 권만을 쓰려는 건 아니었다 답사는 치밀하게 준비됐다. 그저 지도 하나, 왕오천축국전 번역본 하나 가지고 혈혈단신 떠난 여행이 아니었다. 우선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혜초 전문가'인 정수일 박사가 동행했다. 왕오천축국전 완역본을 탈고한 정 박사로서는 이를 대중화하고 싶은 바람이 컸고 김씨는 그의 전문지식을 빌려 역사적 사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둘의 의기투합은 예정된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사진작가와 디지털 복원 전문가 그리고 제대로 된 동영상을 남기기 위해 영화 조감독 출신인 후배까지도 일행에 포함됐다. 답사팀은 모두 10명. 기차에서,버스에서,그리고 밥을 먹다가도 이들의 토론은 끊이지 않았단다. 언제 다시 시도될지 모르는 프로젝트인 만큼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번 혜초 프로젝트는 김씨가 수 개월간 기획안을 준비한 끝에 지난 7월 문화콘텐츠진흥원의 지원과제로 선정되면서 시작할 수 있었다. "진흥원에서 받은 돈이 1억8000만원쯤 될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죠. 지금은 학교 돈까지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일이 점점 커지는 게 그 이유다. 진흥원에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과제만 하더라도 그의 소설은 물론 사진책,동영상 자료, 모든 자료를 담은 홈페이지 구축 등 여러가지다. 그런데도 김씨는 또 다른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다. 디지털 전시회. 혜초와 관련한 오프라인 전시회를 열고 이를 아예 상설화하자는 게 그의 목표다. "인도의 날란다 성원에 가니까 현장 법사의 기념관이 있더군요. 아마 중국 측에서 인도와 사이좋을 당시 지어 놓은 모양이에요. 현장기념관은 중국 서안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혜초는 어떤가요.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뒤 비가 내렸다는 중국 서안에 겨우 기념비 하나 달랑 있을 뿐이에요.” 나긋하던 그의 목소리가 어느새 조금 높아져 있다. "혜초가 지나간 장소들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전시관이 되죠. 혜초가 다닌 길에는 다양한 인종이 살았고 또 다양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진시황 전시회'이런 걸 수입해서 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혜초가 살았던 8세기와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겠죠. 공간여행에 시간여행까지 더하는 것이니까요.” 김씨는 혜초를 소재로 한 소설을 4월에 탈고할 예정이다. 시간이 많지는 않다. "책은 책대로 가고 전시회는 전시회대로 준비해야죠.” 그이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체 ‘다작’으로 유명한 그가 아닌가. 지난해 출간된 '리심'과 올 9월 나온'열하광인'모두 혜초 프로젝트를 한창 준비하던 시기에 탈고한 작품들이다. 앞서 소개되진 않았지만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교수님'이기도 하다. △지난달 중순 김탁환씨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랍시아 유적지를 찾았다. 1965년 이 유적지에서 고구려인들로 추정되는 인물 2명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됐다.윤 동진 사진가 #3. 소설가가 카이스트에 간 까닭은 사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어두컴컴한 작업실이나 어디 한적한 시골마을의 외딴집이 아닌 한국 과학기술원(KAIST)에서였다.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환경분야 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맡은 카이스트 교수들 중 한 명 이었다. 그가 소속된 곳은 카이스트가 미국 MIT의 미디어랩을 모델로 만든 문화기술(CT)대학원. 그를 인터뷰한 집무실도 7개월 전 CT대학원이 입주한 상암DMC(디지털미디어시티) 내 산학 협력연구센터 건물 3층이었다. 2005년 설립된 CT대학원으로 김씨가 자리를 옮긴 것은 이듬해 3월이었다. CT대학원은 모두 6개 전공(각 전공별 학생 20명씩)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는 DiSCo laboratory (디지털스토리텔링 앤 코그니션 랩)의 책임교수다. 이 파트는 바이오뇌공학을 전공하는 정재승 교수와'경성기담'의 저자인 전봉관 교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시정곤 교수가 함께 이끌고 있다. “소설 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학제 간 연구입니다. '열하광인'만 하더라도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농기구 개량법부터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했죠. 평소 문과와 이과가 통합된 르네상스형 인재를 만드는 대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카이스트에서 CT대학원을 만든 것이고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아주 자연스러웠죠.” 좀 더 쉽게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예를 들어 바이오와 소설이 만나 어떤 걸 연구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공포소설을 읽히고 나서 뇌파를 측정해 보기도 합니다. 현재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그런지 한 번 재보자 뭐 그런 식입니다. 뇌를 연구하되 예술적인 부분과 연계해서 하는 것이죠. 예술작품 또한 예전에는 작품 내적인 완성도만 가지고 따졌는데, 작가와 작품과의 관계 독자와 작품과의 관계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선 없었던 시도죠.” 혜초 전시회 또한 CT대학원의 김정화 교수가 힘을 실어주고 있다. 김 교수는 올 2월 세계 5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아르코(ARCO)에서 주빈국 행사'코레아 아오라' 를 총 지휘했던 전시기획 전문가다. 그의 다음 한마디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CT대학원의 의미를 단숨에 정리해 버린다. "이 학교 아니면 제가 혜초 프로젝트 같은 걸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약속했던 1시간을 훌쩍 넘겨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전화를 하겠다는 말에 그가 대답한다. "오전에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제가 제일 몰두해서 작업하는 시간이니까요.” 그제서야 오후 느지막이 약속을 잡았는지 이해가 됐다. 김씨와 헤어진 뒤 그의 홈페이지를 찾았다. 한 언론매체에 기고한 글 마지막 부분이 눈에 띈다. "돈황에서 서안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대학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길은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안다 이 길을 역사를. 길은 내 앞에 놓여 있다.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 어떤 의미인지는 그만이 알 수 있을 테다. 다만 뿔테 안경과 수염처럼 그와 참 잘 어울리는 문장인 것 같았다.


김탁환 누구인가
▲1968년  ; 10월 27일 경남 진해 태생
▲1987년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1989년  ;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길 안에서의 겹쳐보기―장정일론’
▲1991년  ;  동대학원 석사과정, 1993년 박사과정 진학
▲1994년  ;  ‘상상’ 여름호에 ‘동아시아 소설의 힘’ 발표, 본격적인 비평활동 시작
▲1995∼1998년  ;  해군사관학교 사회인문학처 국어교수
▲1996년  ;  비평집 ‘소설중독’, ‘진정성 너머의 세계’ 발표, 
              처녀작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 출간
▲1998년  ;  ‘불멸’(4권)
▲1999년  ;  건양대학교 문학영상정보학부 전임강사 임용, ‘누가 내 애인을 사랑했을까’ , 
             ‘허균, 최후의 19일’(2권)
▲2000∼2001년  ;  대하소설 ‘압록강’(7권)
▲2001년  ;  ‘독도평전’
▲2002년  ;  ‘나, 황진이’, ‘한국소설창작방법연구’,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발표
▲2002∼2006년  ;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2003년  ;  ‘방각본 살인사건’
▲2004년  ;  ‘불멸의 이순신’(8권)
▲2006년∼  ;  KAIST CT대학원 교수
▲2006년  ;  ‘리심’(2권)
▲2007년  ;  ‘열하광인’
김 창덕 기자 drake007@segye.com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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