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종교

이슬람 1400년 2

浮萍草 2007. 11. 1. 23:33

이슬람 율법해석─샤리아를 알아야 이슬람이 보인다 14세기 이슬람사회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율법학자였던 이븐 힐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펜타곤에 대한 자살 테러 공격으로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 테러의 배후로 미국은 이슬람권의 무장세력을 지목하고 보복을 다짐하는 가운데 이 사건이 국제 정치질서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기독교권과 이슬람 권의 문명충돌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시각도 있다. 펜타곤 설립 60주년 되는 날 벌어진 테러(아랍신문 보도)에 미국은 적극 대응하는 양상 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에 관한 한 매사에 지나치리만큼 비판적이고 폄하적인 서구 언론을 통해이슬람 종교와 이슬람 사회의 사정을 접해온 우리는 이번 사건의 보도를 접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층이 더욱 두꺼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이번 사건을 이슬람 문화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는 계기로 삼아야 하며 세계평화를 위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문명의 충돌을 넘어 문명간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종종 이슬람권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거나 서구적 시각으로 이슬람권을 해석해 대화가 다시 충돌로 이어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슬람권이 정교일치의 사회체제로, 믿음과 행동이라는 양면의 가치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종교)를 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인간생활 전반을 포함 하는 생활양식이며 고도의 복합적인 문화로서 종교와 세속 쌍방을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세계다. 참수형 절단형 실행의 비밀 이라크의 저명한 율법학자 바케르 알 사마리가 바그다드 한 사원에서 수백명의 무슬람과 함께예배하고 있다. 또한 신은 어떤 행위가 옳아서 그것을 명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명령하는 행위 자체가 옳은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신앙이다.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원칙적으로 샤리아가 유일한 법규범이고 샤리아 외의 독립된 법체계 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혹 샤리아 이외의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샤리아를 보충하는 것으로 인간 (정치지도자)이 만든 것이며 샤리아와 병존한다거나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까눈 혹은 니잠 등으로 불리는 실정법이다. 법은 강제력이 부여된 사회규범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불리듯 통상의 인간이 실행 가능한 것이고 또한 원칙적으로 실행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샤리아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법규범 해석상의 부과적 판단이다. 이슬람 법리론에서 법에 대한 판단은 부과적 판단과 설명적 판단 두가지로 나뉜다. 부과적 판단(알후쿰 알타클리피)이란 인간이 행위를 실천에 옮기거나 그렇게 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행위의 실행 또는 미실행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부과적 판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들이 어떤 행위를 실행하거나 하지 않도록 의무 로써 부과되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행위 요구나 금지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실행 혹은 미실행의 선택을 인간에게 맡긴 것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 경우 의무 부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과적 판단으로 분류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례에서 의무 부과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샤리아와 세속법의 갈등과 조화 고정형 및 동형·동태와 짝을 이룬 교정형은 꾸란과 하디스에 그 형벌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모든 죄에 적용된다. 따라서 교정형은 샤리아의 확장성과 유동성에 맞춰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사회의 상황에 맞게 판단한다. 그 권리를 맡은 사람은 피끄(fiqh·법학) 학자들이며 종교·개인·재산 등을 지키고 이슬람사회 의 질서와 인간의 복리를 위해 모든 시대와 장소에 존재하는 사회에 해악적인 새로운 범죄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다. 따라서 양적으로는 바로 이 부분이 고정형이나 동형·동태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교정형은 고정형과 동형·동태의 사건에도 적용된다. 즉 고정형 혹은 동형·동태의 범죄지만 의문점이 발견되어 형을 선고하지도 못하고 무죄로도 선고할 수 없을 경우 교정형을 적용시켜 형을 확정짓는다. 그러므로 샤리아의 판결에는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시간과 장소의 변화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금기와 의무이며 고정형과 동형·동태 의 범죄가 이에 속한 것이다. 두번째는 시간과 장소의 변화에 따라 그 환경에 맞는 복리를 추구함으로써 변하는 교정형 범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고정형과 교정형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고정형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해져 그 형량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반면 교정형은 인간의 능력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그 판결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해받는 이슬람, 그 7가지 虛像 이슬람 여성이 쓰는 히잡은 여성의 처녀성을 보장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방어 장치이다. 이번 미 테러사건으로 인해 이슬람과 이슬람권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구 13억명의 이 거대한 문화권을 단순히 서구의 시각으로 보아왔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슬람문화권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깔려 있다. 그러나 21세기 국가경쟁에서 이슬람권에 대한 이해는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이슬람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1.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일찍이 서구인들은 무슬림들에 의한 정복사업을 소위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이슬람의 호전성과 종교의 강압적 전파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서구인들의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 에서 만들어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이슬람교는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가 극심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태동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이슬람의 진출을 확대시켰고 정복 과정에서 많은 이교도들이 이슬람 으로 개종했으나 강제적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슬람 정부가 피정복민들의 문화나 관습·종교 등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그들에게 무슬림 들보다 많은 세금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슬람 정부는 대량 개종을 통해 세금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개종금지 백서를 발효하기도 했고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 공납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공납 액수도 비잔틴이나 페르시아의 수탈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어서 이슬람제국 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은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어느 정도 향유할 수 있었다. 아랍·이슬람권의 전쟁,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팔레스타인 영토전쟁과 이슬람권 4大 분쟁 아랍·이슬람권의 분쟁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가 아랍·이슬람권 내부의 정치적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아랍·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 간의 분쟁이다. 전자는 이란·수단·이집트·알제리·시리아·요르단·예멘 등 아랍 국가들에서 지속적으로 있어 왔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기존 정권의 정치적 투쟁이었다. 이 분쟁에서 이란·수단을 제외한 어느 나라도 정권과의 투쟁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승리하지 못했다. 후자의 경우에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쿠르드 분쟁,코소보 분쟁,아프간 분쟁,체첸 분쟁, 인도네시아 분쟁 등이 포함된다. 아랍·이슬람권 분쟁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략 네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이 분쟁을 둘러싼 역사적 원인이 대부분 강대국의 식민주의와 자국중심주의에 입각 한 영토분할에서 야기됐다는 점이다. 둘째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무슬림들이 부당한 정치적,종교적 간섭과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 셋째는 이들이 줄곧 견고한 종교적 유대와 민족적 단결의식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넷째로는 지리적 고립으로 소수민족의 정체성과 집단 연대의식을 유지해 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中東의 꺼지지 않는 불씨!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유럽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대규모 流入 같은 시기 러시아의 묵인 하에 영국·프랑스 간에 체결된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아랍 지역을 양국의 직접통제지역과 간접통제지역, 공동관리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협정에는 맥마흔-후세인 서한에서도 나타났듯 영국이 결정적 시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러시아는 이 비밀협정을 묵인해 준 대가로 소아시아의 일부 지역인 흑해 남부지역을 병합 하였다. 이 비밀협정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후 혁명정부가 차르 치하 제정 러시아의 비밀 외교문서 를 폭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1917년에 발표된 밸푸어 선언은 영국 외무장관인 밸푸어가 영국 시오니스트기구 의장 이었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발표되었다. 이 선언에서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내에 하나의 유대인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에 대해 호의를 표명하였다. 또한 이 선언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기존의 비 유대인 공동체의 사회적 권리와 종교적 권리 또는 타국가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 및 정치적 지위에 대해 어떠한 편견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으며, 상호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였다. 아랍·이슬람권의 전쟁,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쿠르드족의 민족국가 수립은 가능한가? 쿠르드족은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와 티그리스강 상류의 평화지대로 구성된 쿠르디스탄에 살고 있는 세계 최대 유랑민족이다. 인종적으로는 이란계 백인이고, 언어적으로는 페르시아어에 가장 근접한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이들은 수천년간 언어·문자·종교·민족이라는 문화적 일체감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강국들과 이웃 5개 국가의 억압과 탄압 그리고 동화정책으로 단일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7세기에 이슬람을 종교로 받아들였으며 95% 이상이 순니파에 속한다. 쿠르드족은 약 2,200만명에 달하는 중동지역 최대의 단일민족이다. 이들은 터키를 비롯해 이란·이라크·시리아·그리고 옛소련의 아르메니아 등지에 분산되어 있다. 이들의 존재가 국제 여론의 초점이 된 것은 지난 1991년 걸프전쟁 때였다. 당시 이라크 정부군은 반군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하였으며 이로 인해 수만명의 사상자와 수십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서구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쿠르드 민족문제는 걸프전쟁후 다시 외면의 긴 늪에 빠졌고, 터키·이란·시리아 등지에서 쿠르드족들은 민족정체성 상실과 동화라는 힘든 적과 싸우면서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아랍이나 서구세계 등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강력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쿠르드족은 1923년 로잔조약의 인위적 영토구획에 의해 조국 쿠르디스탄 지역이 5개국으로 분할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이들은 터키·이란·시리아에서 극심한 민족말살 정책에 직면하였으며 20세기 좌절과 배신의 역사 속에서 신생국으로의 독립과 주권 부여라는 간절한 소망을 온 세계에 몸으로 호소하고 있다. 다시 부각되고 있는 카슈미르 분쟁 미국은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의 배후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거나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 특히 파키스탄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이슬람권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반미 감정은 파키스탄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은 미국의 협조 요청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이 지역의 난제인 카슈미르 분쟁에서의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다. 파키스탄에 카슈미르 분쟁은 종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47년 영국의 마지막 인도 총독이었던 마운트 배튼 백작은 인도를 독립시키면서 힌두교 의 인도와 이슬람의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간디의 처절한 종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종교다원주의는 정치적 단결과 단합을 이룰 수 없었다. 문제는 인도 서북부의 잠무 카슈미르였다. 잠무 카슈미르 지역은 힌두교도가 행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주민의 대다수는 무슬림이었다. 마운트 배튼 백작은 이 지역의 통치자였던 마하라자 하리 싱에게 결정권을 넘겨 주었다. 힌두교였던 그는 당연히 인도를 선택하였다. 잠무 카슈미르의 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험준한 산악지역인 잠무 카슈미르는 BC 3세기 이후 힌두교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14세기 이슬람의 무굴 왕조가 지배하면서 이슬람화 되었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던 펀자브 지방은 19세기 이후 시크교의 시크 왕조와 힌두교의 도그라 왕조에 합병되었다. 1947년 하리 싱은 도그라 왕국의 군주로서 잠무 카슈미르의 인도령 편입에 서명하였다. 지하드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이란? 이슬람 관련 투쟁이나 분쟁 그리고 폭력과 테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는 지하드 (Jihad)다. 이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정신 그리고 이슬람 관련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데 많은 유용함을 줄 것이다. 지하드란 곧 투쟁과 분투를 의미한다. 일부 무슬림들은 알라(신)의 대의를 위해 노력하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여섯번째 기둥으로 간주한다. 이슬람의 다섯가지 기둥은 신앙 행위의 근간으로서 신앙고백 하루 5번의 예배, 라마단달의 단식자카트(종교구빈세로 총수입의 2.5%) 하즈(순례)를 일컫는다. 초기 이슬람에서 지하드는 이슬람 전파를 위한 무슬림 개개인과 신의 약속 및 믿음의 강화 수단이었다. 말하자면 개인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한 내적 노력을 지하드라고 불렀다. 이 지하드는 대(大) 지하드로서 이슬람의 근본적 의미와 전파 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핵심 용어다. 하지만 초기 이슬람공동체(움마)를 형성했던 메디나 시기에 무슬림들은 메카의 중심세력 이었던 이교도 꾸라이쉬 부족과 투쟁을 벌였다. 이슬람 세력은 메카와의 투쟁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3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슬람 세력은 이 승리를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행위의 결과로 해석하였다. 이때부터 지하드는 신을 위해 이슬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성전(聖戰)의 의미로도 해석 되었다. 무슬림들은 이를 소(小) 지하드라 불렀다. 그러나 현대 이슬람에서 지하드는 주로 소 지하드의 의미로 전용되다시피 한다. 그러나 무슬림 학자들은 비록 일부 전쟁들은 불가피하게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이슬람의 평화주의를 주장하면서 선제공격에 의한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이다. 지하드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위한 내적 鬪爭 이슬람 세계를 움직이는 무슬림 지도자 15人 1) 테러리스트에서 노벨평화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의 대명사 야세르 아라파트 중동 지역에 관한 국제뉴스를 떠올리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1m65cm도 안되는 자그마한 키 거친 수염 하얀 천에 검은 색 체크무늬가 있는 독특한 아랍 식 두건에 군복차림 허리춤의 권총, 마치 시골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인상 하지만 카리스마 적 이미지와 오기 있고 당찬 모습을 보이는 인물 그가 바로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다. 그는 지난 30여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40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무하마드 압둘 라우프 알 쿠드와 알 후세인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본명보다 야세르 아라파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한때는 서방세계가 지목한 악명높은 아랍 테러리스트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1993년 오슬로평화협상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이스라엘과 힘겨운 중동평화협상을 이끌어내고 있다. 아라파트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1929년 8월24일 이집트 카이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카이로대학에서 도시 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부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팔레스타인학생동맹’을 이끌었다. 1957년에는 서독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대학에서 수학했다. 학업을 마친후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자금 조성을 목적으로 쿠웨이트에 자팔레스타인 건설회사를 세워 무장투쟁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1959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무장조직인 파타 결성에 참여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무장 게릴라를 인솔하여 70여회에 걸친 테러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슬람 세계를 움직이는 무슬림 지도자 15人 8) 문명대화 주창 21세기 이란의 리더 모하마드 하타미 1997년 5월23일은 변화를 갈망하던 이란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개혁의 선봉인 모하마드 하타미가 보수파의 상징인 국회 의장 나테크 누리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개혁파 하타미의 등장으로 이란은 이슬람혁명 이후 20여년만에 새로운 희망과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는 1942년 이란 중부의 야즈드 지방에 위치한 아르다칸(Ardakan) 마을에서 중산층 성직자 가문에서 출생했다. 하타미는 비교적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인 루홀라 하타미(Ruhollah Khatami)는 최고 성직자로서 그의 신실함과 진보적 인 견해로 이란 전역에서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던 종교지도자였다. 하타미를 성직자로 키우고자 했던 부친의 뜻에 따라 하타미는 아홉살때 고향인 아르다칸 을 떠나 1961년 성도 콤으로 가서 1965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마드라사에서 종교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1965년 콤을 떠나 당시 최고의 대학이던 이스파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69년부터는 테헤란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2년후 다시 콤으로 돌아온 그는 이슬람 법·법률학·철학 공부에 매진했다. 하타미의 부인은 유명한 이슬람법학 교수의 딸인 조흐레 사데기(Zohreh Sadeghi)다. 매우 명료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 민심紀行 레바논은 다른 아랍국가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여성을 쉽게 볼 수 있고 길거리에서 대낮에 맥주를 홀짝거리는 남자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으로 보면 여기가 정말 아랍국가인가하고 의문을 가질 정도다. 곳곳에 교회가 있고 기독교(개신교를 비롯한 가톨릭·그리스정교 등 여러 분파를 포함하는) 인이 대통령인 나라다. 아랍국가지만 이슬람국가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요즘 파키스탄·인도네시아 같은 이슬람국가에서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고 있지만 레바논에서는 그런 분위기와 움직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민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겉보기에는 세계문제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레바논이라고 9·11 미국 테러사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리 만무하다. 레바논은 인구 350만명의 작은 나라지만 해외이민자 수는 무려 1,400만명에 달한다. 순니파 무슬림으로 회사원인 티리크 사압은 이렇게 분위기를 전한다. "많은 레바논 사람들이 미국에 살고 있다. 이들이 미국의 여러 단체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벌써 많은 학생들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레바논이라는 존재와 이슬람이라는 존재는 같은 틀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미국으로 갈 생각을 아예 접었다.” 美 테러사건에 대한 종파간 선명한 입장差 이슬람 민심紀行 지난4월 이스라엘군이 이스라엘 북부 지방에서 레바논 남쪽지역을 향해 155mm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 테러국가인 이스라엘 지원국" 레바논의 보수성향 신문 알 ― 나하르는 9월29일 빈 라덴의 테러행위 부인 기사를 실었다. 빈 라덴은 거듭 테러사건과 자신의 관련 사실을 부인하면서 나는 무슬림으로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 공격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고 죄 없는 남성·여성·어린이를 살해하는 것을 지지 하지 않는다. 내가 없더라도 지하드는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오사마가 아니라 이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런 빈 라덴의 주장은 파렴치한 테러리스트의 거짓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의심하는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강화하게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레바논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헤즈볼라를 미국이 테러집단 리스트에 올렸다. 레바논 정부의 불명확한 태도에 대해 미국의 불만이 이미 전달된 상태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레바논 사람들은 미국이 적이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또한 미국에 반대하는 생각이 있다. 이번 사건을 이용한 미국의 ‘음모’에 대한 여러 추측도 나온다.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알지만 미국은 인종주의에 기초한 나라다. 우리는 지금 미국의 아랍에 대한 인종주의적 만행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테러국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나라다. 생화학무기 등을 갖춘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 주변에 있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미국은 새로운 기지들을 건설하려 하는 것이다. 또 이를 위해 현재 질서가 잡혀 있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을 선택한 것 같다. 나는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의 시스템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슬람 略史 (A.D.306~2001) A.D 306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선언 310~379 샤푸르 2세의 통치 312 밀라노 칙령에 의한 기독교 공인 325 니케아 공회 330 콘스탄티노플 건설 337~350 페르시아 - 로마 전쟁 359~361 페르시아 - 로마 전쟁 363 로마 샤푸르 2세와의 전쟁 371~376 페르시아 - 로마 전쟁 381 콘스탄티노플 칙령으로 기독교의 국교화와 이교 금지 384 페르시아 - 로마 전쟁 395 테오도시우스의 사망과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 503~505 페르시아 - 로마전쟁 524~531 페르시아 - 로마전쟁 527~565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와 아프리카 이탈리아 재정복 527~532 페르시아 - 비잔틴 전쟁 531~579 호스로우 Ⅰ세 통치(페르시아) 533 로마 - 페르시아간 ‘항구적 평화’ 시대 537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사원 봉정식 540~562 페르시아 - 비잔틴 전쟁 572~591 페르시아 - 비잔틴 전쟁 606~628 페르시아 - 비잔틴 전쟁, 614년 페르시아의 예루살렘 점령 이슬람 用語사전 가니마 이슬람법에서 전리품을 뜻하는 아랍어. 경전민(經典民) 꾸란과 이슬람교의 문헌에서 유대교도와 그리스도교도를 가리키는 아랍어 아흘 알키타브의 번역어. 나흐타둘 우라마(Nahdlatul Ulama) ‘이슬람 학자의 覺醒’이라는 뜻으로, NU라는 약칭 으로 불린다. 인도네시아 전국에 걸쳐 약 3,000만명의 회원이 있다. 다르위시 데르위시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dervish 고전 아랍어로는 faqir이다. 아랍어·페르시아어·터키어로 이슬람교의 탁발수도자를 일컫는다. 답실만(答失蠻) 색목인의 일종인 이란계(系) 이슬람교도에 대한 호칭. 라마단 아랍어로 ‘더운 달’을 뜻하는데 꾸란이 내려진 신성한 달로 여겨 이슬람 교도 는 이슬람력 9월27일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한다. 마크타바(maktab) 이슬람교도의 초등교육기관. 쿠타브라고도 한다. 그 기원은 자히리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모스크에 처음으로 부설되었으며, 그 후 각지에 설치되었다. 말리키학파 말리크 이븐 아나스(715∼795)가 창시한 이슬람의 4대 법학파. 생애의 대부분을 메디나에서 보낸 말리크는 사상적 입장을 초기의 이슬람 정신 계승에 두고, 꾸란과 이슬람 전승을 중시하면서 메디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여 추리적 해석보다 공공복지 를 존중하였다. 메디나헌장(Constitution of Medina)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히즈라)했을 때 메디나 주민들과 맺은 맹약. 야스리브 聖約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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