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우리 고전 비틀기

1〈단군신화〉의 영웅들은 가고, 〈쥐 변신 설화〉의 간교한 쥐만 득실대는 시대

浮萍草 2016. 1. 25. 11:37
    삽화: 인천광역시 블로그 ‘인천이야기’.

    리 민족의 조상은 누구인가? 인종이니 어족이니 하는 복잡한 것을 따지면 누가 나올지 모르지만,우리나라 신화에서는 우리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초등학생들도 아는〈단군신화〉이야기인데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곰의 자손이라야 맞을 것 같다. 곰에서 여자가 된 것이 왠지 찜찜해서 곰 여자, 웅녀(熊女)를 무시한다면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환웅의 자손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곰도 환웅도 아닌 단군을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일단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옛날 하늘나라에 옥황상제의 서자(庶子)인 환웅이 살았다. 그는 자주 아래의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인간들을 잘 다스려서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弘益人間). 그래서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고는 세 명의 대신들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새로운 정치를 펴서 인간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어느 날,환웅에게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서 인간이 되고 싶다며 빌었다.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먹으며 햇빛을 피해 동굴에서 백일(百日) 동안 기도하면 인간이 될 것이다.” 둘이 같이 시작했지만 호랑이는 견디다 못해 동굴을 뛰쳐나갔고, 곰은 삼칠일(三七日)을 잘 참았더니 인간 여자로 변했다. 곰 여자는 자신과 결혼할 남자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나무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소원했는데,그 기도를 들은 환웅이 잠시 변신해서 곰 여자와 정을 통했다. 그 결과 곰 여자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檀君)이다. 단군은 오랫동안 인간세상을 다스렸다.〉 ㆍ‘백일’은 ‘계속’을 의미
    너무 잘 아는 이야기다 보니 이야기의 핵심을 간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환웅이 기도하라고 한 기간은 ‘백일(百日)’이었는데 실제로 곰이 여자로 변한 것은 ‘삼칠일’ 그러니까,21일인 3주였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환웅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둘 중 하나가 나갈 때까지 경쟁을 시키다가 곰이 남게 되자 불쌍해서 그냥 빨리 인간이 되게 해준 걸까? 둘 다 아니다. 환웅이 말한 ‘백일’은 100일이 아니라 ‘될 때까지 죽 계속’의 의미를 지닌 긴 시간을 뜻한다. 즉 환웅은 “인간이 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며 참으라” 한 것이었고,그것을 못 참은 호랑이가 뛰쳐나갔던 것이다. 만약, 호랑이가 21일만 참으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삼칠일’은 지금도 출산(出産)과 관련된 금기(禁忌)로 이어져, 여성들이 아이를 낳으면 적어도 삼칠일인 3주는 몸조리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담이긴 하지만 만약 100일 후에 곰이 여자가 되었다면,혹시 우리나라 여성들은 출산 후 삼칠일이 아니라 100일을 몸조리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백일이냐, 삼칠일이냐보다 더 사소해 보이지만 정작 꽤 중요한 문제는 환웅이 서자라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옥황상제에겐 여러 아들이 있고 그중에 하늘나라의 정통성이 있는 적자(嫡子)가 따로 있다는 소리로,결국 환웅은 하늘나라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신세란 말이나 다름없다. 그가 자주 인간들이 사는 아랫동네를 힐끔거렸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ㆍ변태 곰은 왜 여자가 되었을까
    이런 몇 가지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정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그건 ‘왜 하필 곰이 여자가 되었는가’이다. ‘웅녀’라며 자주 부르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하게 곰은 꼭 ‘여자’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사실 곰이 여자가 된다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곰이 암컷이니까 여자가 되었겠지.” “호랑이는 남자가 되고 곰은 여자가 될 거였는데, 호랑이가 뛰쳐나간 거야.” 대충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군신화〉가 수록된 《삼국유사(三國遺事)》문면을 아무리 뚫어져라 살펴보아도 곰이 암컷이었다는 설명은 없다. 물론 수컷이라는 설명도 없다. 그냥 곰일 뿐이다. 그리고 호랑이를 남자처럼 곰을 여자처럼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곰을 상당히 우습게 여기게 된 데는〈단군신화〉가 한몫을 한 것이 분명하다. 곰은 맹수다. 호랑이만 흉포한 것이 아니라 곰도 마찬가지다. 꿀을 좋아하는 허둥쟁이 곰돌이 ‘푸’가 있고 귀여운 곰인형이 지천에 널려 있다 보니 곰을 온순하고 만만하게 생각하지만 그건 정말 착각이다. 바로 이런 착각에 곰이 남자보다 유순한(?) 여자가 되었다는 신화가 일조한 것이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물론 곰은 여자로 변해야만 한다. 그건 곰에게 여성성이 있어서도 아니고 곰이 호랑이보다 부드러워서도 아니다. 만약 곰이 뛰쳐나가고 호랑이가 남았다면 그 호랑이가 여자로 변했을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누가 남았든 반드시 그 동물은 꼭 ‘여자’가 되어야 했다. 왜 하필 여자가 되어야 할까? 여기에 신화의 비밀이 있다. 이를 풀기 위해 먼저 주변 상황을 정리해 보자. 곰이 여자로 변했던 그때에 곰 말고 다른 인간 여자는 있었을까, 없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알쏭달쏭하겠지만 답은 분명하다. 환웅이 이 세상에 내려온 이유는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소위 홍익인간(弘益人間),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땅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어야 할 것이고,그리고 그 인간들은 남자와 여자가 있어 죽죽 자손들을 낳아서 번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답은 곰이 여자로 변하던 그때에도 인간 여자들은 당연히 있었다가 정답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 여자들이 있는데 굳이 곰이 여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변태(變態)’ 곰은 아이 배기를 소원한다. 어폐가 될지 모르지만 여자들이 모두 다 아이 배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 텐데,아무튼 이 변태 곰은 제 출신도 모르고 아이 배기를 원한다. 물론 이때 이 ‘아기’는 인간 아기이지 곰 아기는 아닐 것이니 더 복잡하다. 사람들은 모두 다 이 ‘여자 아닌 여자’의 요상한 정체를 아니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환웅이 나섰다. 이 대목의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임시로 변해 결혼했다’ 또는 ‘거짓으로 변하여 성교했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假化而婚之(가화이혼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환웅이 본래는 남자가 아닌데 남자 역할을 해서 임신을 하게 했다는 말이 된다. 환웅은 신(神)이다. 그리고 본래 신은 성(性)이 없다. 여성인지 남성인지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성적 구별 같은 것으로부터 초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웅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냥 전능한 신이다. 잘 이해가 안 된다면, 기독교의 신인 ‘하나님’은 남성인가 여성인가를 생각해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남성일까? 종종 하나님을 예수와 혼동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예수는 분명 남성이다. 신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는 태어날 때 남성으로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남성이기에 그리고 또 관습적으로“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기독교의 신에게 남성성을 부여해서 남성처럼 여긴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냥 신이다. 서양의 일부 여성운동가들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어머니”라고도 하자는 주장을 펴는 바탕은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은 성이 없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인 환웅이 웅녀와 성교를 하려면 임시로 변하든 거짓으로 변하든, 짐짓 일부러 잠깐 변하든지 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곰 여자를 임신시켰던 것이다. 둘이 어떻게 성교를 벌였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자유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인간 여자를 내버려두고 굳이 곰을 인간의 여자로 만들고 거기에 신인 환웅이 인간의 남성으로 변신해 일을 치렀다는 점이다. 그렇게 복잡하게(?) 거사를 행한 것은 그들의 소생으로 태어난 단군이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ㆍ제우스와 환웅의 임무
    제임스 베리 작 〈이다 산 위의 주피터와 주노〉. 제우스와 헤라의 애증관계를 표현했다. 1790~1799년. 캔버스에 유채, 127×101.6cm, 셰필드 미술관.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고 가자. 우리는 어떤 인물을 지도자로 생각하는가? 리더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하늘에서 내려오는가,아니면 땅에서 솟는가? 만약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강림하고 땅의 바위가 솟아서 알을 깨고 나오면 그 존재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따르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아니다.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당장 잡혀서 UFO 연구를 하는 미국과 손을 잡고 연구 대상물로 삼을 것이고 땅에서 솟는다면 이상한 괴물로 여겨 역시 실험실로 직행할 것이다. 적어도 죽이지는 않아도 그를 지도자로 따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리더를 선출하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먼 옛날에는 어떤 사람을 리더로 삼았을까? 쉽게 생각하면 힘이 센 자나 날쌘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을 것 같다. 일단 폭력을 쓰면 이길 수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힘이 세서 동물을 잡아와 먹고사는 데 도움을 주니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우리 인간들은 지금과 같이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물리적 폭력만으로는 일정 숫자 이상의 두목 노릇을 할 수 없다. 게다가 물리력의 기반이 되는 근력(筋力)이란 것은 나이 들면 쇠퇴하기 마련이고 또 아무리 힘이 세도 한번에 서너 명의 집단적 린치를 감당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니 말이다. 선거가 없던 그들에겐 다른 무엇이 필요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승복할 만한 것이어야 했고, 자발적으로 따를 만한 것이어야 했다. 지금 우리가 투표라는 것을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가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그들 사이에서 가장 타당하고 옳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 지도자는 하느님의 아들이야!” 이 강력한 언술(言術)로 인해 그 지도자는 권위를 얻고 그 지도자는 힘을 얻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기 때문에 거기서 권력이 발생하여 구심점이 되었다. 그 권력관계와 사회역학 구조가 신화라는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것이다. 땅은 밟고 산다. 하지만 하늘은 그렇지 않다. 바라는 봐도 만지지도 건드릴 수도 없는 저 멀리에 하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도 오고, 번개도 치고 천둥도 고막을 때리게 무시무시하게 울려 퍼진다. 두려움과 공포와 함께 자애로운 은혜도 주는 것이 하늘이다.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그 경이로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 바로 우리 지도자라니! 이 얼마나 든든하고 황홀하겠는가. 단군은 그렇게 왕이 되어 인간을 다스렸다. 그 탄탄한 기반 아래에서 말이다.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라는 권위로 세상을 자알~ 다스렸다고 말하는 순간,퍼뜩 잠시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다. 곰 여자야 곰이든 여자이든 수명이 있으니 단군을 낳고 언젠가는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니,그녀의 출산 이후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 환웅은 신이었다. 신은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군이 떵떵거리고 왕 노릇 할 때 환웅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하늘로 올라갔나? 거기 가봐야 주도권 다툼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서자일 텐데 대체 어디로 간 거지? 게다가 환웅이 아버지 옥황상제에게 들이댔던 공약(公約)을 떠올리면 머쓱해지기까지 한다. “널리 인간들을 이롭게 하겠습니다.” 인간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대담한 공약을 들이밀고 당선되어 지상에 내려온 환웅이 실제로 그 공약을 실천했던가? 물론 이런저런 인간사를 처리해 주고 법률을 정비하고 다스렸다는 말은 있다. 하지만〈단군신화〉에서 가장 분명하게,그리고 의미 있게 한 일은 그저 곰을 변화시켜 아들 낳기뿐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고 해놓고서 한 일이라고는 애를 낳은 것밖에 없다. 세상에 이런 공약(空約)이라니, 공약의 전통은 이다지도 오래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낙심할 필요도 속았다고 분노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애를 낳은 것이 자신의 공약인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널리 인간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정통성 있고 힘 있는 굳건한 지도자를 세웠던 것이고,그것이 바로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환웅이 애초부터 맘먹었던 것은 지상에 내려와 자기 자식을 낳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잠시 눈을 돌려〈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를 떠올려보라. 우리 환웅천황과 어찌도 그리 닮으셨는지 모르겠다. 제우스가 한 일이 무엇인지 퍼뜩 떠오르는 게 있는가? 지혜는 아테네 신이 맡았고 아름다움은 비너스가 담당했다. 아레스는 싸움이라도 했고 아폴론은 태양이라도 움직였다. 하다못해 절름발이 헤파이스토스 신은 땅땅 두드려서 물건이라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신 중의 신이신 제우스께서는 도무지 일을 하지 않으셨다. 하는 일이시라고는 인간세상을 돌아다니며 여자 꼬드기기에 전념하신다. 부인인 헤라 여신이 눈을 부라리고 달려들지만,그 눈을 속여가며 온갖 여자들을 꾀어 성교하는 것에 미친 듯이 열을 올린다. 헤라가 그토록 바가지를 박박 긁어대도 제우스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성욕을 주체할 수 없어 미쳐 날뛰는 것일까? 보는 여자마다 족족 넘어뜨리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 주신(主神)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기실 제우스는 헤라 말고 다른 여신과도 관계해서 자식들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세상을 다니며 인간 여자들을 덮치는 짓을 도무지 멈출 줄 모른다. 이제 감이 오는가? 제우스가 한 일은, 아니 해야만 한 일은 바로 그런 씨 뿌리기였다. 자신의 자식을 세상에 널리널리 퍼지게 하는 거였다. 그의 자식들이 트로이의 선조가 되었고,스파르타의 조상이 되었으며,여기저기에서 왕이 되어 불쑥불쑥 나타났다. 다시 말해 단군이 되었단 말이다.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 역시 제우스가 바람피워 낳은 아들이란 점을 놓치지 않는다면,우리 환웅천황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아니 ‘하시고 싶었던 일’은 바로 자기 씨 뿌리기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것이다. 제 할 일을 다 한 신은 어떻게 될까? 연어처럼 회귀해서 알을 낳고는 죽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제 소임은 모두 다 한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다음을 신경 쓴단 말인가. 단지 그의 씨가 필요했을 뿐이니 말이다. 씨를 뿌리는 자는 사실 자신의 씨가 밭에서 어떻게 자랄지는 잘 모른다. 심하게 말해 어느 놈이 자신의 자식인지도 잘 모른다. 왜냐하면 한두 곳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자기만 거기에 씨를 뿌렸다는 확신이 없다. 그러니 제 자식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 아이를 배 속에서 키웠던 여자뿐이다. 요즘도 힘 있고 권세 있는 남자들의 핏줄이라며 여자들이 유전자 검사를 요청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적어도 여성은 자식이 누구의 씨인지 알기에 시치미를 떼는 남자를 향해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곰이 남자가 아닌 여자로 변한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그건 바로 ‘자신이 누구의 소생’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기제(機制)가 되기 때문이다. ㆍ환웅이 여자로 변신해 단군을 낳았다면
    충북 제천의 명물인 동산 능선의 남근석.
    그 옛날에는 성교가 한 사람의 배우자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남자 여러 여자와 성교를 하는 난교(亂交)의 형태였을 것인데,그것에 지금의 윤리적 잣대를 가져다 재면 안 된다. 당시는 출산율이 현저히 낮은 시대였고,출산해도 제대로 살아남기도 어려운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난교가 성행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식의 일부일처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아니었다. 성인 남자들은 사냥이나 외적 문제 해결에 힘을 쓰는데, 거기엔 희생이 따랐다. 인명의 귀중함, 바로 옆의 존재의 소중함이 지금보다 더 사무치는 시절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조선시대만 해도 해안가 서낭당에 ‘나무좆’을 깎아 매다는 풍습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성적인 방종의 문제가 아니라 풍요와 번성을 기원하는 바람이었다. 배 타고 바다에 나가는 남자들은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웃으며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지금처럼 첨단 장비와 일기예보를 실시간으로 듣는 시대에도 바다는 불가항력적인 미지의 무서움을 지닌 괴물 같은 것이다. 하물며 그 옛날은 말할 것도 없다. 자연히 남자들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남성 숫자의 감소는 단지 성적 쾌락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할 가능성의 기회가 줄어듦을 의미하고 나아가 실질적으로 당장 먹고살 것을 얻어오는 인력의 감소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서낭당에 걸린 남자 성기를 깎은 아이템을 보고 ‘나무좆’으로라도 성적 쾌락을 느끼려고 했던 여성들의 욕망이라고 본다면,정말 저승에 가 있는 한 맺힌 여성들의 분노를 살 것이 분명하다. 서낭당의 그것은 기원이고 바람이고 소망이었다. 그건‘생존’이라는 숭고한 문제 앞에 선 인간이 할 수 있는 진지하고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니 척박한 환경에서 새로운 인물이 탄생하는 것은 정말 축하하고 경이롭게 생각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어느 누구 하나만이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돌보고 사랑하는 존재였다. 태어난 자식들 입장에서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이런 모계사회의 입장에서 보면,곰은 꼭 여자로 변해야 했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단군이 인간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기반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곰 여자가 낳은 단군은 ‘출처’가 분명한 ‘우리’ 사람이란 증명이니 말이다. 누구든 외지에서 온 존재에 대해서는 두려움부터 갖는다. 그 낯선 자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주민등록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같은 민족이라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도 아닌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외부에서 온 자는 이쪽이 아닌 저쪽의 다른 존재이고 그것은 대부분 위험한 존재였다. 많은 신화가 이런 점을 담고 있다. 아무튼 곰 여자에게서 단군이 태어났기 망정이지 만약 어디선가 나타난 알 수 없는 존재였다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환웅이 여자로 변신해서 단군을 낳았다면 그 단군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단 말이다. 비록 단군이 힘이 세고 능력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능력이 있기에 배척당한다. 왜냐하면 그 막강한 힘으로 우리 마을, 내 것을 파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경우든 지도자가 될 자는 우리에게서 나와야 한다. 우리라고 믿어지는 분명하고 든든한 기반에서 나와야만 한다. 그래야 믿을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단군은 믿을 수 있다. 곰 여자에게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곰은 반드시 ‘여자’로 변태하고 환웅은 남자로 잠시 변신해서 성교를 했던 것이다. ㆍ野合을 통해 태어난 孔子
    밝은 대낮에 두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새긴 〈야합〉.작자 미상,쓰촨성 성도 신룡향 출토.한나라 화상전.사마천은 저서《사기》의〈공자세가〉
    편에‘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그의 조상은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라고 한다.방숙이 백하를 낳았고,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흘(紇)은 안씨(顔氏) 딸과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으니…’라고 공자의 탄생을 적고 있다.

    이쯤에서 잠시 공자(孔子)의 탄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현재 공자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솔직히 말하면 공자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만들고 첨가하고 삭제한 정리된 기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공자는 별로 실수도 없는 훌륭하고 탁월한,그야말로 성인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의 탄생에 대해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남아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야합(野合)’을 해서 공자를 낳았다는 거다. 아니 이런 위대하신 공자님이 그렇고 그런 사생아라니?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도대체 그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왜 삭제하지 않은 것일까? 무슨 생각으로 이런 불미스런 사실을 남겨놓은 걸까? 정답은 ‘야합’을 지금과 같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야합으로 태어난 존재를 놀림의 대상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한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즉 야합을 성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한 요소로 생각했기에 추종자들이 그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며 반가운 일이다. 별다른 감흥이 안 생긴다면 한번 상상해 보라. 어느 날 지하 주차장에 에쿠스 한 대를 주차해 놓았는데 며칠 후 보니 그 옆에 똑같이 생긴 에쿠스 한 대가 나란히 서 있다면 어떻겠는가? 누가 장난으로 가져다 놓은 것도 아니라면,저절로 생겨난 거라면 그 얼마나 놀랍고 두렵고 또 신기하겠는가? 우리에 양 다섯 마리를 넣었는데 어느 날 보니 일곱 마리가 되었다면 그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출생은 바로 이런 거였다. 이렇게 불어난 양들, 소들, 곡식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 이해는 그들 나름의 타당한 바탕 위에서 세워졌고 인식 가능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그것이 일단 그렇게 규정되는 순간 진실로 굳어졌다. 그것이 바로 신의 역할이고 신의 존재였다. 신이 복을 내려서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는 것이고 소와 양이 번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신이 진노한다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을 섬기는 일이 생겨났다. 다들 아는《삼국지》〈위지 동이전>의 우리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시작할 때와 곡식을 거두는 추수 때에 ‘모두 모여 춤을 추고 노래 하며 술을 마시기를 며칠 동안 밤을 새워 했다’고 한다. 지금 느낌으로 단순하게 보면 노동의 수고를 덜기 위한 파티 정도로 여기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 모여서 여는 축제는 신에 바치는 축제이고, 그것은 광란의 축제였다. 그저 모여 같이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만 했다고 생각하면 난센스다. 그때의 음주가무(飮酒歌舞)는 성적 결합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은 난교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행위는 터부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되었고, 혹시 이때 임신한다면 그것은 정말 축복받아야 할 일이었다. 왜냐하면 소위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제천행사(祭天行事)는 곡식이 잘 열리기를 바라는 기도였고, 곡식이 풍성하게 된 은혜에 대한 감사이며,다음에도 변함 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묻은 행위였다. 그 모든 것이 신에 대한 감사이며,하소연이고,신의 뜻을 듣는 방식이며, 신의 현현(顯現)을 비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때 임신한다면 그건 곧 신이 그녀와 합일하여 이룬 것으로 인식되었다. 임신은 신의 복 중의 복이었던 것이다. 들(野)에서 성교를 통해 신과 합일(合)되는 체험이었던 야합(野合)이 부정적으로 변질된 것은 그 신성적 의미가 퇴색한 자리에서 조금씩 자라난 결과이다. ㆍ매춘업의 연원
    바알(왼쪽)과 아세라 신상
    이런 농경,목축에 관련된 제천행사,야합 같은 의식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디오니소스의 광란의 축제 역시 이런 신성한 신과의 결합을 바탕에 둔 축제였다. 알다시피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인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술은 신을 위한 음료이고 제사의 핵심이다. 이런 술을 마신다는 행위는 그대로 신적 행동의 모방을 의미하고 그렇게 취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성교는 신적 행위의 ‘인간적 버전’이 되는 거였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인들의 신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가나안인들의 종교인 바알 신앙을 ‘음란한 종교’로 규정하고 본받지 말 것을 누차 강조한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해석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성적 음란함에 빗댄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바알신앙은 보기에 따라 ‘음란’했다. 바알 신은 농경을 관장하는 신으로 남성으로 이해되었다. 바알에는 아세라라는 부인 여신이 있었는데, 그 두 신이 하늘에서 성교를 하는 것이 지상에 비를 내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남신과 여신이 하늘에서 성교를 함으로써 지상에 풍성한 곡식이 자라게 하고 농사가 잘되게 한다고 여겼다. 이런 사항을 머릿속으로 이해만 한다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신앙이란 그런 사실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 내 것으로 만들어낼 때 종교가 된다. 바알신앙을 지닌 가나안 사람들은 당연히 풍족한 비와 알맞은 온도에 적당한 바람이 불면 바알과 아세라가 하늘에서 즐겁게 성교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 신들이 만날, 그렇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 아닌지 비도 오지 않고 땅이 쩍쩍 갈라지는 가뭄이 비일비재했다. 그럴 때면 가나안 사람들은 각기 자기 집에 복을 끌어들이기 위해 예물을 준비해서 바알신전으로 간다. 거기서 준비해 간 지극한 예물을 정성껏 바치고 바알신전의 여사제들과 성교를 벌였다. 그렇게 여사제와 둘이 하나 되어 뒤엉키는 순간, 복을 받기 원해 예물을 준비한 남성은 바알 신으로 변화 되고 여사제는 아세라 여신으로 변화된다고 믿었다.
    즉 그들의 성교는 삿된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성스러운 행위인 바알과 아세라의 교접을 지상에서 그대로 재연·구현하는 행위로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집에 복이 내려 곡식이 잘 자라고 풍성하게 여물게 되는 복이 임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들의 땅에서의 뒤엉킴은 하늘의 뒤엉킴이고,그것이 그대로 신적인 성스런 행위라고 믿던 것이 차츰 그 신성성이 퇴색하면서 육체적 쾌락만이 남아 그 종교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언젠가 캘리포니아에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가두시위를 하면서“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을 탄압하지 마라”고 한 것은 이런 신전 여사제들에게서 매춘업의 연원(淵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출생에 관련된 야합은 신에 정성을 드리는 제단이 있는 공개적 장소인 ‘들’에서 춤과 노래와 몸짓으로 즐거움을 드리며 신과 ‘합일’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신의 성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며 그때 임신한다면 그 자손은 ‘신의 자식’인 것이다. 물론 쾌락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결국 공자는 신적인 존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인물인 것이었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왜 이런 귀중하고 자랑스런 내용을 삭제하겠는가 말이다. ㆍ‘변태 곰’과 河伯의 딸 柳花의 공통점
    이제 단군을 낳은 곰이 암컷이건 수컷이건 반드시 여자로 변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졌다. 여자가 낳아야 그 부족 소속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곰이 여자가 되었으니 신이 남자가 되어야 궁합(?)이 맞는 것이다. 그래서 환웅이 ‘잠시 임시로 변신해서’ 그녀에게 들어갔던 거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자식은 하늘의 자식이 되어 이 땅을 다스리는 권위를 생득(生得)하게 되는 거였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여자가 자식을 낳아야 그 부족의 인물로 받아들여진다면,다른 여자들도 많은데 왜 하필 곰을 여자로 변화시켜가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다른 인간 여자들도 많은데 굳이 복잡하게 곰을 바꾸다니 말이다. 다른 여자들을 무시하는 것인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시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차별을 두려는 거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진정한 지도자를 낳을 어머니로서,또 하늘의 천신이 감응하기 위해서는 흔한 여느 여자가 아니라 특별한 여자여야 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아무나 제천의식 때 춤을 추고 아무나 야합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여자, 뭔가 새롭고 탁월한 여자, 바로 그런 여자만이 지도자를 생산할 여자가 되는 것이다. 소위 지모신(地母神)이라고 불리게 될 정도의 여자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 잘 알기 위해서는 〈단군신화〉의 구조를 베낀 것처럼 동일한 〈동명왕 신화〉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는 어느 날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 갔는데 거기서 한 여자를 만났다. 누구냐고 묻자, 그녀가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를 만나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鴨祿)가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중매 없이 남을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여기에 귀양 보낸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금와가 그녀를 데려다가 자신의 궁전에 두었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햇빛이 비쳐오는데 유화가 몸을 피해도 쫓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들이나 되었다. 왕이 가져다가 개·돼지에게 던져주었지만 먹지 않았고 길가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도로 어미 유화에게 주었다. 유화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여 7세에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하였다.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기 때문에, 그를 주몽이라 불렀다.〉 이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유화이고,주몽의 아버지는 바로 하늘나라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이다. 이 해모수는 유화를 웅신산 아래에서 만나 사통하고는 떠나버린다. 그런 유화를 금와가 데려다가 궁궐 깊은 곳에 두었는데,햇빛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비추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유화가 그 햇빛에 임신하여 어마어마한 크기의 알을 낳는다. 그리고 그 알을 깨고서 나온 아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주몽이라는 것이다. 유화를 보통 여자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녀는 이 땅의 모든 물을 다스리는 하백의 딸로, 인간이 아니라 물의 신의 딸이니 적어도 용녀(龍女) 정도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주몽을 출산하는 것도 태생(胎生)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난생(卵生)으로 했다. ㆍ신화에 등장하는 특별한 여자
    아무튼 어쩌면 이리도 곰 여자와 환웅,그리고 단군의 모습과 똑같은지 모르겠다. 떠나버리는 아버지 신과 남아 있는 특별한 여자,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영웅,완전히 판박이처럼 똑같다. 곰 여자나 용 여자나 둘 다 ‘흔한 여느 여자’가 아니라 ‘특별한 여자’인 것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한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서동설화〉를 보면, 훗날 백제 무왕이 되는 서동은 과부의 아들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삼국유사》 기록은 이렇게 말한다. 〈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미가 과부가 되어 수도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려서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마를 캐서 파는 사람이란 의미로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이젠 우리도 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적 존재인 용과 과부인 어머니가 결합하여 훌륭한 영웅,서동을 낳은 것이다. 그러니 서동이 자연스레 백제의 무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신이니 그 정통성과 탁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로소 우리는 곰이 변한 여자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라 ‘특별한’ 그리고 ‘탁월한’ 여자로 ‘선택받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굴 속에서 참고 인내하는 모습은 결코 평범한 아무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여자들은 모두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곰 여자는 아이 배기를 위해 신단수 아래에서 연일 기도하고 유화는 깊고 깊은 방에 있지만 햇빛이 따라가며 덮쳤고,과부는 연못가에 살고 있었기에 용이 왔던 것이다. 이들 여자들의 공통점은 ‘놓인 여자’라는 점이다. 이는 수동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로 선택되어 자발적으로 나선 여자란 의미이다.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을 거치며 힘겨운 의식을 치른 여성,가리고 뽑아 길러낸,정예 중의 정예 여성이 바로 이들이었다. 아무나 신과 교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옛날만 해도 환경이 척박한 곳마다 있는 음침한 사당에는 꼭 뱀 귀신이나 지네 귀신이 살았다. 그 귀신들은 하필이면 꼭 처녀를 바치라고 마을 주민들을 협박하고 괴롭힌다. 먹을 것도 아니고 일을 부려먹을 튼튼한 남자도 아닌 여자를,그것도 처녀를 바치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지네는 처녀를 데려다가 뭐에 쓰려는 걸까? 포르노그래피적 상상은 자유지만 진실은 그런 상상과 관련 없다. ㆍ夜來者 설화
    뱀과 지네로 상징되는 길쭉한 모습이 남성적 아이콘으로 상징되어 그것이 처녀와 뱀 등이 벌이는 인간적 성적 결합을 환기시키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그 본래적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뱀이나 지네처럼 남성적 존재의 신이 선택된 여성,특별한 여성과 벌이는 새로운 질서 창출의 모습이 그 핵심이고 본질이다. 해마다 처녀를 바쳤던 것은 바쳐진 처녀가 제대로 된 처녀가 아니기에 그랬던 것이다. 탁월하고도 빼어난 새로운 여성을 바치라고 말이다. 이러던 것이 후대로 내려오며 바알신전의 여사제들이 단순한 매춘업에 종사했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처럼 신성성이 퇴색하면서 퇴치해야 할 징그러운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나 햇빛으로 덮쳐오는 해모수나 연못에 서려 있는 용처럼 뱀이나 지네 모두 마찬가지다. 훌륭한 인물을 탄생하게 하려는 신들이었다. 잘생기고 늠름한 제우스의 또 다른 버전이었던 것이다. <처녀는 고민이 생겼다. 밤마다 이상한 남자가 자기가 자는 방에 귀신같이 스며들어 자신을 겁탈하고 가는 것이다. 전전긍긍하던 처녀는 할 수 없이 아버지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놈의 옷깃에 바늘을 꿰어놓아라.”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 처녀는 또다시 찾아온 그 밤손님과 정사를 펼치는 중에 그의 옷깃에 실을 꿴 바늘을 꽂는다. 그러자 놀란 밤손님이 도망친다. 날이 밝은 후 그 바늘에 꿰어져 있는 실을 따라가 보니 방문을 넘고 담을 넘어 멀리멀리 실의 끝에 웬 지렁이가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바늘은 바로 그 지렁이 몸통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처녀는 배가 불러오고 출산을 하는데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후백제를 건설한 견훤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모아 밤손님이 찾아온다고 해서〈야래자(夜來者) 설화〉라고 이름 붙였는데,이야기마다 태어나는 아들이 견훤이기도 하고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이기도 하다. 둘 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부정적인 인물이라 그들을 ‘지렁이 아들’이라고 폄하하려고 이런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런 밤손님들의 겁탈로 태어났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가문이 적어도 둘은 있다. 평강(平康)채씨(蔡氏)의 시조와 창녕(昌寧)조씨(曺氏)의 시조가 모두 〈야래자 설화〉를 시조 설화로 갖고 있다. 지렁이는 땅의 용이란 뜻인 ‘지룡(地龍)’의 음이 변한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아도,지렁이가 신적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용이나 지렁이,지네,뱀,심지어 절굿공이도 있는데,모두 ‘남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것들로 남성 신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처녀는 바로 그런 신들에 의해 선택된 특별한 여성들이다. 신단수에 있던 웅녀,궁궐 안에 갇혀 있던 유화,연못가에 있던 과부,그리고 방 안에 홀로 있던 처녀, 모두 마찬가지다. 이는 처녀의 말을 들은 아버지의 반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힘센 장정들을 시켜 방을 보호할 생각도 않고 방을 바꿀 생각도 않는다. 고작 바늘을 옷깃에 꽂으라는 당부를 할 뿐이다. 바로 밤손님이 찾아오는 그 처녀는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빌었던 곰 여자이고 어두운 방 안에 갇힌 유화이며 연못가에 살던 과부였다. 처녀가 실을 꿴 바늘을 밤손님의 옷깃에 꽂았던 것은 찾아온 존재, 그 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정체 확인의 방법이었고 말이다. ㆍ“쥐뿔도 몰랐냐?”
    《남원고사》 필사본.

    사춘기가 되려면 아직 조금 더 남은 어린 시절, 동네 아주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의아해했던 적이 있었다. “아, 글쎄 저 뒷집 그 머리 풀어헤친 그년 있잖아, 글쎄 말이야….” 이어진 이야기는 짐짓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지만,더 강렬하고 단호한 어조였다. 내가 옆에 있었지만 제대로 사리분간도 못할 코흘리개인지라 그 누구도 나를 의식하지는 않았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처럼 수군거린 말은 그 ‘화냥년’이 자신이 키우는 개와 흘레붙어 먹는다는 거였고,그 말을 듣던 다른 아주머니는 그래서 그 몹쓸 년이 ‘언나’를 낳는데 곧 죽었다는 말을 보탰다. 내용의 충격 때문인지 “말도 안 된다”며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고 또 다른 아주머니는“농담하지 말라”고 했지만,대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주머니들은 혀를 차며 욕을 하는 것으로 뭔가 찜찜한 것을 달래는 듯했고 난 ‘흘레’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었지만 아주머니들의 뒤숭숭한 표정과 묘한 긴장감 속에서 뭔가 아슬아슬한 것을 발견한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장면과 말들이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하나도 남김없이 머릿속에 한동안 새겨져 있었다. 그러다 기억 저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까마득 잊고 있던 그 장면과 말과 눈빛이 순식간에 되살아난 것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같은 종에 속하지 않으면 종족 번식을 할 수 없다.” 개와 고양이는 섹스를 해도 새끼를 낳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옛날 머리 풀어헤친 뒷집 여자가 개와 그렇고 그랬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자식 비스무리한 것은 낳을 수 없다는 거였다. 결국 그 옛날 뒷집 여자를 두고 아주머니들이 찧고 까불었던 것은 그냥 지저분함으로 처바른 비난이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욕망을 왜곡해 투영시켰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상상에 의해 포장된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시작되어 사실처럼 온 동네를 휘감고 흘렀던 것을 생각 하면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흉을 보기 위한 모함이 음담패설이 되면서 사실을 넘어 진실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오랜 옛날 웅녀가 단군을 낳고 유화가 주몽을 낳던 그 신성함은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이 시대에 남은 것은 어쩌면 그런 음담패설뿐일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언제 왜 신성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너저분한 것들이 차지했을까?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마을의 선비가 결혼을 한 후, 과거 공부를 하러 절에 올라갔다. 절에서 공부하던 선비는 자신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 아무 데나 버렸는데,그 절에 있던 천 년 묵은 쥐가 그것을 먹고는 그 선비로 변신하여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 집에서는 선비가 돌아온 줄 알고 같이 지냈다. 얼마 후, 공부를 마치고 선비가 절에서 돌아오자 난리가 난다. 진짜와 가짜가 뒤엉켜 서로 자신이 진짜 선비라고 주장하는데, 결국 진짜 선비가 가짜라고 오해받아 쫓겨난다. 다시 절로 돌아온 선비는 절의 주지 스님에게 고양이를 받아서 내려가고 그 고양이를 집에 있던 가짜에게 던지자, 가짜가 쥐로 변해 도망가다 잡아먹히고 만다. 한바탕 난리가 지난 후, 선비는 그동안 가짜로 몰려 수모를 당한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아내에게 화풀이를 한다. “이년아 넌 쥐뿔도 몰랐냐?”〉
    《옹고집전(雍固執傳)》 원본
    <옹고집전〉의 근원설화이기도 한 이〈쥐 변신 설화〉의 핵심은 바로 마지막에 한 말에 있다. 화가 난 선비가 아내에게 말한,‘쥐뿔’이 무엇을 뜻하는지,“쥐뿔도 모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하다. ‘쥐뿔’은‘쥐의 성기’이고“쥐뿔도 모른다”는 말은 ‘밤마다 같이 얼싸안고 자면서도 그것이 남의 성기인 줄도 몰랐느냐?’는 선비의 분노와 짜증 섞인 면박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민중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그런지‘쥐뿔도 몰랐냐?’는 말보다는 더 적나라하게 “쥐좆도 몰랐느냐?”는 원색적인 말이 훨씬 더 많다. 그 많은 짐승 중에 쥐를 두고 이런 이야기가 생긴 이유는 쥐의 생김새가 남자 성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여성이 무슨 일을 당하고도 남에게 창피해서 말도 못 한다’는 뜻으로“뒷간 쥐에게 ○○ 물린다”는 속담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쥐와 남성 성기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은유는《춘향전》의 이본(異本)인〈남원고사〉에도 나온다. 한양으로 떠난 이몽룡을 위해 절개를 지킨다며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해 춘향이가 옥에 갇히는데,옥을 찾아 간 월매가 딸 춘향에게 이렇게 타박한다. “물라는 쥐나 물지 대체 수절이 다 뭐냐?” 여기서 ‘쥐를 문다’는 것은 성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여러 이야기를 떠올린다면,이‘쥐’역시 뱀이나 지네,지렁이,용,해모수의 빛,그리고 옥황상제의 아들 환웅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신적 존재가 모두 남성으로 변신하고 선택된 탁월한 여성과 결합하여 자식을 낳는 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신화의 기본 구조이다. 그런데 이〈쥐 변신 설화〉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 아니 낳아서는 안 된다. 아내가 낳으면 정말 곤란하다. 그건 결코 인간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설화에는 이런 말들이 덧붙기도 한다. <“그 아내가 임신을 해서 애를 낳게 되었는데 말이야, 쥐새끼를 오무루하게 낳더란 말이야.” “그래서 그 쥐하고 자식을 낳았는데 쥐 반쯤 사람 반쯤 된 튀기를 낳더라고.” “아, 이게 애를 뱄어.
    그 마누라가 낳는데 보니까 맨 쥐새끼들이 오글오글하게 나오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쥐를 낳는 여자를 그대로 둘 수 없어 참혹하게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배를 갈라 배 속에 든 쥐새끼를 끄집어내 죽인다. 그 배 속에서 나올 그것은 결코 정상적인 인간일 수 없으니 말이다. 이런 논리라면 단군이나 주몽도 몽둥이찜질 당해 죽어야 했던 것 아닐까? 곰 여자의 배를 가르고, 멋대로 정을 통한 유화도 때려죽여야 했던 것 아닐까? 왜 단군은 영웅이고 주몽은 나라를 건국했지만 선비의 아내가 낳은 것들은 더러운 것들일까?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인,아니 정확하게는 반은 신이고 반은 곰이었던 단군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차이가 나지 않는가 말이다. 대체 신이며 인간인 영웅들은 다 어디로 가고 더러운 쥐새끼들만 오글오글한 것일까? 그 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ㆍ영웅 없는 시대에 남은 淫談悖說
    <쥐 변신 설화〉에서 천 년 묵은 쥐가 변신을 해서 남자가 되어 아내와 성관계를 했다. 꼭 〈야래자 설화〉에서 귀신같이 찾아온 그 밤손님처럼 그랬다. 하지만 그 끝은 전혀 달랐다. 야래자는 자신의 자식을 남겼지만 쥐는 자신의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야래자는 영웅을 탄생시켰지만 쥐는 죄악만 남겼다. 그건 야래자를 신성한 존재로 보는 시대와 쥐를 성적 동물로만 보는 시대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야래자나 환웅,해모수가 했던 일,아니 하려고 했던 숭고하고 높은 뜻을 이 망할 놈의 천 년 묵은 쥐는 애초부터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근본적 차이이다. 천 년이나 묵은 쥐는 변신해서 선비가 없는 틈을 노려 간사하게 선비의 모든 것을 다 뺏어버렸다. 그리고 떵떵거리며 사치하고 낭비한다. 게다가 진짜 선비가 나타나자 제 욕망 채우기에 급급해 진짜를 가짜라고 매도하고 그를 쫓아버린다. 이 간교한 변신 쥐가 한 짓이라고는 사람들이 애써 쌓고 기른 것을 훼손하고 깨뜨리고 망친 것뿐이다. 남의 노력을 뺏고 남의 피와 땀을 가로채버렸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환웅과는 도저히 댈 수도 없는 말종인 것이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하지만 그건 어설픈 소리다. 영웅은 그를 낳은 누군가의 헌신과 정성이 만들어낸다. 영웅을 낳고 그가 성장하고 그가 우뚝 서는 것을 보는 순간,어디론가 가버려서 도무지 생각나지도 않는 그 누군가가 영웅을 영웅답게 만든다. 숭고하고 높은 뜻을 품은 기억하지 않는,아니 기억하려 하지 않는 그 누군가의 깊고 잔잔한 눈빛이 영웅을 영웅이 되게 만든다. 더 이상 영웅이 보이지 않는 시대,더 이상 영웅이 출현하지 않는 시대,아니 영웅이란 것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시대가 슬픈 것은 영웅이 없기 때문 만이 아니다. 영웅의 빈자리에 오글거리는 쥐들을 둘러싼 흉흉한 음담패설이 진동하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ㆍ劉光洙
    ⊙ 46세.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 同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수상 : 2007년 《조선일보》 주최 ‘제1회 뉴웨이브 문학상’. ⊙ 저서 : 장편소설 《진시황 프로젝트》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인문서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번역 《홍계월전》 연구서 《19세기 소설 옥루몽 연구》 《고전서사의 대중성》. ⊙ 現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글 유광수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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