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수학 이야기

8 숫자와 권력

浮萍草 2015. 12. 5. 12:18
    이집트 달력·20세기 원자폭탄… 수학서 ‘통치의 힘’ 얻었다
    일러스트 = 송재우 기자 jaewoo@
    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얘기하면서 철인 왕은 20세에서 30세까지 산술, 평면기하학,입체기하학,천문학,화성학을 교육받아야 한다고 했다. 수학을 단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권력을 갖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귀족이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엘리트주의자였던 셈이다. 이런 이유로 민주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독을 마실 것을 선고받았다. 플라톤은 나중에 아카데미를 창립하고 철학과 과학 연구를 하면서 많은 엘리트들을 길러 냈는데 이 플라톤 학당은 무려 900년 동안 존속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수학적 지식과 능력은 권력 그 자체로 간주됐다. 왕이 다음 왕에게 전하는 비밀스러운 힘이었다. 피라미드 공사장의 수많은 인부들에게 공평하게 임금을 계산해서 지급하는 능력은 제왕의 덕목이었고,천체 관측 결과를 사용해서 달력을 만들고 이에 따라 홍수를 예측하는 능력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한때는 30일이 12번 모여서 1년을 이룬다는 생각도 있었는데,각종 천체 관측이나 농사 절기와 맞지 않는 게 분명해서 수정이 불가피했다. 왕이 시키는 대로 농사지었다가 절기가 맞지 않아서 망하면 체면을 구기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니까. 결국 1년은 365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지만, 이조차도 홍수의 예측에서 문제를 드러내서 무능한 집권 세력은 민중의 분노에 직면하곤 했다. 이 달력의 부정확성 문제는 나중에 그리스 후반의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에 의해 해결됐다. 그의 달력에는 1년이 365일이고 4년마다 하루가 덧붙여져 있다. 1년이란 게 사실은 365일에 6시간을 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혹자는 고대 이집트의 집권세력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믿는다. 이집트 집권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홍수를 예측하곤 했었는데 어쩌면 달력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 유지를 위해서 이를 비밀에 부친 거라는 음모론인 셈이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광대한 땅을 정복하고 그리스화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최북단 이집트에 있는 교역의 중심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항구도시를 세우고 고대 세계의 중심을 아테네에서 이 신도시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아테네 시대의 마지막 왕으로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엘리트들이 그러했듯이 플라톤 학당에서 수학했는데,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더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정복왕 알렉산더에게 일생의 스승이 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중세의 르네상스를 논하면서 흔히 범하는 오류가 르네상스를 아테네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대 그리스의 재발견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성취가 오랜 시간을 격하여 이슬람 문명의 확장기에 유럽에 전달되고 큰 변화의 동인이 된 건 맞다. 하지만 중세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후기에 해당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시대정신을 말한다. 정확한 달력을 발견한 에라토스테네스도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였다. 고대 그리스 문명을 양분하는 초기의 아테네 시대와 후기의 알렉산드리아 시대는 상이한 색깔을 가졌다. 고대에는 상업이나 재정은 노예가 맡아 수행했지만,알렉산드리아에서는 자유시민들에 의해 상업 활동이 이루어졌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학자와 분리되지 않은 동등한 계층이었다. 이런 상업적 관심은 지리적 문제와 항해 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만들었고, 생산과 기술의 향상도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이런 탓으로, 철저히 추상적인 수학을 추구하던 아테네 시대에 비해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들은 실용적 가치도 중요하게 여겼다. 현상의 이면을 더듬던 플라톤의 수학은 이제 과학 및 기술과 연계되었는데 아테네 시대에 기술이 어떤 경멸과 무시를 받았었는지를 기억한다면 놀라운 시대정신의 변화라고 할 만하다. 알렉산드리아를 고대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 공은 아마도 초대 왕인 프톨레미 1세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는 아테네 시대의 위대한 학교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넘어서는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을 알렉산드리아에 설립했다. 이 유명한 도서관은 현대의 대학과 유사했는데, 7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역사상 최대의 도서관으로 세계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들은 삼각법을 연구해서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원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해서 교역이 늘어나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고 고향인 시라쿠사에서 활동했던 아르키메데스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수학 및 과학 지식을 활 용했다. 로마군은 그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는데 장군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병사의 실수로 그만 살해되고 말았다. 당시 그의 존재는 당대 권력의 중요한 변수였다. 알렉산드리아를 불태운 로마 제국은 도시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그리스 학문까지 파괴했다.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던 6세기에서 중세인 15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역사상 수학의 발전이 가장 더뎠던 시기이다. 어떤 이들은 산술의 기본을 알지 못하는 로마제국이 역사를 퇴보시켰다고까지 혹평하기도 한다. 로마의 황제 권력과 중세 초기의 교회 권력은 여러모로 수학의 퇴행을 이끌었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관점을 유지했던 로마에서는 수학이나 과학이 조직화되거나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만들어가지 못했다. 자신의 코앞을 보는 데 급급해서 저 멀리 있는 오아시스를 보지 못한 것과 같다. 반면에 중세도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했는데 내세에 대한 관심에 몰입해서 세속적인 것을 경멸한 탓이다. 땅에 얽매인 로마인들의 실용지상주의는 황폐함을 낳았고 하늘에 얽매인 중세 교회의 신비주의는 지성을 가두고 창조적인 정신을 방해했다. 수학은 있을 곳을 찾기 힘들었고, 이성이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한 것은 중세 후반이었다. 지동설을 세상에 내놓은 코페르니쿠스는 가톨릭 신부였다.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이 신부는 관찰과 수학적 고찰을 통해 지구의 위치에 태양을 둠으로써 우아한 수학적 단순화를 이끌어 내고 기뻐했으나,이를 세상에 내놓는 것을 망설였다. 당시 교황이던 클레멘스 7세의 출간 허락을 받고도 다음 교황이 변덕을 부려 자신을 신성모독으로 단죄할 것을 염려했다. 결국 그의 원고는 사후에 출간되어 지동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중세의 벽을 깨고 근대로 넘어가는 단초는 아랍인들에게서 왔다. 알렉산드리아를 파괴한 또 다른 문명인 이슬람 문명은 방대한 서적을 약탈했고 많은 책들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유럽이 수학과 과학을 내팽개쳤던 긴 세월 동안 인도와 아랍은 발군의 성취를 이루어서 공허와 허무를 의미하기도 하는 0을 발견했고 음수의 불가피성을 끌어 냈으며,이슬람 사원의 예술적 치장에 높은 수준의 평면 기하를 이용했고 대수를 깊이 있게 발전시키고 있었다. 아랍어로 된 서적들이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지고 인쇄술의 개발과 함께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재발견된 헬레니즘의 성취는 중세의 암흑기를 날려버리는 힘이 되었다. 이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면서 중세 교회 권력의 급속한 쇠락을 불러왔다. 중세와 근대에는 왕족과 귀족이 예술과 수학 과학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일이 잦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지배 가문이었던 메디치가는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후원하는 데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 부었다. 궁중 음악가와 미술가뿐 아니라 궁중 수학자도 출현했는데, 데카르트를 초빙하여 후원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대표적인 예이다. 방법서설의 저자인 이 위대한 수학자는 금욕주의자 여왕의 요구에 따라 새벽 5시에 차가운 왕의 서재에서 강의했는데 결국 이로 인해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마르코니가 무선통신을 발명한 것은 기술의 발전이 군사에 영향을 미치고 국제정세에 주요한 요소로 등장한 예이다. 이제 육군사령관은 예하 부대가 어디로 가든 작전지시를 할 수 있게 됐고, 바다로 나간 전함들은 오랜 기간 항해하며 명령을 전달받고 작전을 벌일 수 있게 됐다. 무선통신은 군사적 측면에서의 새로운 이정표였을 뿐 아니라 수학의 발전도 촉발했다 유선통신과 달리 무선통신은 아군뿐 아니라 적군도 공평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암호의 사용이 절실해진 것이다. 이전에 고안된 암호는 높아진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암호론은 수학의 한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독일군이 사용한 에니그마 암호는 난공불락의 암호로 여겨져서,각 국가들은 암호 부대를 창설하고 이의 해독을 위해 고심해야 했다. 봄베라는 기계를 만들어서 이를 해독하는 데에 성공한 수학자 튜링은 이를 이론적으로 발전시켜서 인간의 뇌를 기계가 흉내 내게 하는 연구를 계속했고, 현대 컴퓨터과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바야흐로 수학은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수준에 다다랐다. 20세기 들어서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과학자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치 독일을 탈출한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상당수를 받아들인 미국은 과학 강국으로 부상했다.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는 이 과학자들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수학자 폰 노이만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계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의 개발을 통해 프로젝트의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컴퓨터의 개념을 확장하고 구현하면서 수소폭탄의 개발에도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폰 노이만이 췌장암과 싸우며 병상에서 쓴 마지막 논문은 1957년에 그가 사망한 뒤 ‘컴퓨터와 뇌’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세계대전의 승리와 인류의 향방에 관여한 이 천재는 이미 60년 전 인공지능의 개념에 가까이 가 있었다.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응용되면서 기술적 진보를 만든다고 많은 이들은 믿는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견해는 그 반대이다. 존재를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자원으로 만드는 의지가 기술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지식이 과학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수학의 시작과 발전과정도 인류 문명의 필요와 유관할 수밖에 없고 이는 수학과 권력의 대비를 통해 역사에서 확인된다.
            박형주 아주대 석좌교수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