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양구 펀치볼 마을과 '영신약방 김영숙'

浮萍草 2015. 10. 1. 00:00
    '약방 할머니' 인생 보듬으며… 최전방 평화 지켜온 펀치볼 마을
    "길섶에 천막 치고 살았어 머리에 헌데 난 애들, 발 튼 애들, 지뢰 밟고 피투성이 된 여자들… 그런 사람들을 치료했어" 양구 최북단 고산 분지, 전쟁을 겪고 가난을 딛고 분단 현실을 품어 안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경 그곳에서 만나보는 박수근과 이해인의 '흔적'
    펀치볼 마을 주민 김영숙. 그녀를 스쳐
    지나간 모진 세월이 55년이다.
    한민국과 지구촌, 이 땅에 새겨진 삶과 흔적을 좇는 인문 기행'땅의 역사'순례를 시작합니다. 산으로 에워싸인 마을에 약방이 하나 있다. 55년 전부터 지금까지 하나뿐이다. 이름은 영신약방이다. 마을 이름은 펀치볼이다. 강원도 양구 북쪽 끝에 있다. 김영숙은 오늘도 약방에 앉아 온종일 창밖을 본다. 김영숙은 올해 여든 살이다. 창밖 풍경은 많이 변했다. 55년 전 나이 스물다섯에 고향 청평을 떠나왔을 때 황톳길이던 도로는 새카만 포장길이 되었다. 북풍한설에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던 자갈밭은 사과밭으로 인삼밭으로 변했다. 인민군 포격 때 노출될까 창문에 담요를 두르지 않으면 전등도 켜지 못했던 민통선 마을은 은하수가 흐르는 별천지로 변했다. 김영숙이 젖먹이 딸을 업고 이틀 걸려 들어왔던 마을에,그 별천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두 시간 걸려 찾아 오니 이 또한 꿈같다. 땅은 늙는다. 사람들 흔적을 안고 함께 늙는다. 펀치볼 마을 사람들, 그들이 땅에 남긴 흔적 이야기. ㆍ돼지 해(亥)에 편안할 안(安), 해안면과 펀치볼
    금강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물건은 해안면 장터에 모였다. 남에서 올라가는 물건은 험준한 돌산고개를 넘었다. 이틀이 걸렸다. 고갯마루를 넘으면 고산준령에 에워싸인 마을이 나타났다. 돼지 해(亥)에 편안할 안(安)자, 해안면은 강원도 양구군 동북쪽 끝에 있다. 북쪽 가칠봉 능선은 군사분계선 남방한계선이다. 해방이 되고 38선 이북 해안면은 북한 땅이 되었다. 전쟁이 터졌다.
    8000명이 넘던 인구는 급감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피의 능선,단장의 능선,가칠봉과 도솔산과 대우산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마을을 적셨다. 봉우리들은 스탈린고지와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라고 불렀다. 외국 종군기자들 눈에 360도 산에 에워싸인 마을은 화채를 담는 펀치볼(Punchbowl)처럼 보였다. 지금도 해안면은 펀치볼이라고 부른다. 펀치볼은 무른 땅이 침식돼 생긴 지형이다. 별똥별이 떨어진 지형,혹은 끝없는 폭격에 파여 버린 폐허라는 말도 있지만 거짓말이거나 근거 없는 말이다. ㆍ약초 半, 지뢰 半
    "해발 700m니까 공기야 말할 필요도 없겠고 웬만한 데는 땅을 파면 물이 나오니까 이번 가뭄도 여기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이 물, 얼마나 좋은지 손이 다 미끌미끌하다니까." 서울에서 귀농한 금종근이 말했다. 여든 살 된 금종근은 3년 전 들어왔다. 금종근이 사는 곳은 펀치볼 마을 현3리다. 전쟁이 끝나고 인제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지금도 그때 만든 집들이 남아 있다. 어떤 집은 기둥만 남기고 싹 뜯어고쳤고 어떤 집은 유리창 깨진 빈집으로 남아 있다. 집 주변은 텃밭이다. 그가 만든 텃밭에는 토마토와 가지와 상추가 무성하다. "한여름에도 자고 일어나면 이슬이 비 온 것처럼 내린다니까. 뒷산은 약초밭이다, 약초밭. 더덕, 두릅, 고사리, 없는 게 없다. 이런 데가 또 어딨겠나." 약초도 지천이지만 지뢰가 지천이기도 했다. 수효를 알 수 없는 지뢰를 전쟁 동안 적과 아군이 뿌렸다. 나물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던 아녀자들 발목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갔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다친 사람을 둘러업고서 김영숙네 약방으로 달려갔다. ㆍ펀치볼 약방
    1956년 인제 주민 160가구가 펀치볼로 집단 이주했다.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벌판에 모진 바람이 불었다. 이주는 2회에 걸쳐 이뤄졌다. 사람들은 지뢰밭으로 들어가 나물을 캐고 자갈밭을 일구고 나무를 베 땅을 넓히며 삶터를 만들어갔다. 청평 여자 김영숙도 그즈음 펀치볼에 들어왔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펀치볼 마을 풍경이다. 사람들은 이 고원 분지에 들어와 팍팍한 산기슭에 역사를 기록해갔다. 북쪽 능선은 비무장지대로 막혀 있다.
    렌즈=Canon EF 24-70mm, 3컷 파노라마 이어붙임. /박종인 기자

    "전쟁 때, 하루는 집 앞으로 중공군 하나가 총을 메고 오는 거야. 말은 못 알아듣고, 보아하니 나더러 길을 알려달라는 게지 아마?" 열여섯 살 소녀가 총부리를 잡고 개머리판을 병사가 잡고 승강이를 하다가 마을 어른이 몽둥이로 병사를 쫓아냈다. "최승억 선생님이라고 계셨어. 아이들을 호명산으로 자주 데려갔지. 땅을 파면 시체가 나왔어. 선생님은 아이들이랑 시체를 가져와서 양잿물로 삶아. 그걸 인체 표본으로 만들어 공부했어, 우리." 전주 이씨네 둘째 아들 이병철에게 시집간 김영숙은 맏딸을 낳고서 펀치볼로 들어왔다. 인제에서 약방을 하던 시숙이 주선해 펀치볼에 약방을 냈다. 약사가 있는 약국이 아니라 약을 팔 수만 있는 약종상이다. "길섶에 천막 치고 살았어. 머리에 헌데 난 애들, 발 튼 애들, 지뢰 밟고 피투성이 된 여자들, 그런 사람들한테 약 팔았어. 수색 부대에 오 중위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랑 우리 남편이 다 치료했어. 남편은 약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떡해, 사람 살려야지." 2년 만에 벽돌로 집 짓고 이사 한 번 하고 김영숙은 지금까지 그 집에 산다. 밤에는 전등도 밝히지 못했다. 15촉짜리 전구를 켜도 창문에 담요를 둘러야 했다. 겨울날 방앗간에 가서 불쏘시개용 왕겨를 얻어 올 때면 옆집 창고 가득한 땔감을 보고서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눈밭에서 훈련받다가 탈진해서 약방으로 온 애들이 나한테 그래. 아줌마는 아들들 꼭 대학 보내서 장교 시키라고. 자기네는 돈 없고 빽 없어서 처맞는다고." 딸 아래로 아들을 셋 낳았다. 다들 대처로 나갔지만 셋째 아들은 "세종대왕이 셋째라 효자였으니 나도 효도하겠다"며 양구에 남았다. 새 이불도 장만해주고 용돈도 주던 효자 아들은 5년 전 잠자다가 기도가 막혀 죽었다. 중공군을 만났을 때도, 펀치볼을 처음 봤을 때도 그때만큼 기가 막히지는 않았다. 흔적이 많은 땅이 완만하고 무르듯, 상처 많은 노인은 지혜롭다. 김영숙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성모 마리아에게 의지하며 이겨냈다. 제대한 군인들이 놀러 오면 아들 보는 것 같아 반겨주지만"이 파파 할머니는 기억 못 하고 술집만 알아보는 젊은 심보가 얄미울 때도 있다"고 했다. 주유소도 하나, 이발소도 하나 미장원도 하나요 파파 할머니가 온종일 약방을 지키는 이 마을에 몇 년 전 터무니없이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ㆍ지구온난화와 펀치볼의 부활
    3년 전 펀치볼로 들어온 농부 금종근의 현관.“ 물
    좋고 공기 좋고 사람 좋은 곳”이라고 했다.
    들깨도 제대로 자라지 않던 들판에 사과가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참깨가 꽃을 피우는가 하면 포도가 자라고 하우스에서는 수박과 멜론이 큼직하게 맺히더니 마침내 이 동토 (凍土) 기슭을 인삼밭이 가득 채웠다. 온갖 욕 다 먹는 지구온난화 현상이 준 선물이었다. "이상하지, 어느 날 보니 펀치볼에 참깨가 되는 거다. 사과가 되는가 하면 하우스에 수박도 되고 저기 봐라. 저거 다 인삼이다." 펀치볼에서 태어나 50년을 살아온 현3리 이장 신현근이 말했다. 나라님도 못 구하던 가난을 지구온난화가 구제한 것이다. 첫 번째 구원은 시래기였다. 1980년대 초 펀치볼에서 시래기를 처음 출하하자 당시 신생 농산물 시장이던 서울 가락시장이 이를 수매했다. 고랭지 시래기는 불티나게 팔렸다. 이후 사람들은 무 뿌리는 거름으로 쓰고 무청만 거둬서 팔았다. 그리고 전 지구대적 은총이 강림했다. 초목은 심는 족족 무성하게 자라나고 현란한 일교차에 열매는 당도가 그 어느 고장 과실보다 높으니 양구는 어느 틈에 사과, 수박에 인삼까지 브랜드로 내건 고장이 되었다. ㆍ선녀폭포와 미스코리아
    펀치볼 동북쪽 능선에 을지전망대가 있다. 전쟁 때는 모택동고지라 했다. 전망대 북서쪽에는 가칠봉이 있다. 금강산 마지막 자락인데 이 봉우리가 있어야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완성된다고 해서 더할 가(加)에 일곱 칠(七), 가칠봉이다. 가칠봉 북쪽, 군사분계선 안쪽에는 스탈린고지가 있고 전망대 동쪽에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스탈린고지에서 군사분계선을 따라 동쪽 끝으로 금강산이 보인다. 그 사이에 북한 인민군 초소가 숨어 있다. 망원경으로 보면 초소 옆 짙푸른 골짜기에 하얀 물줄기가 떨어지는, 대단히 아름다운 폭포가 보인다. 1970년대 후반 북한 여군들이 폭포에서 나체로 목욕을 했다. 망원경으로 핥듯이 감시하는 국군 초소병들 앞에서 거풀거풀 옷을 벗는 그녀들 덕에 폭포는 선녀폭포로 명명됐다. 1980년대까지 계속된 이 나체 미녀 선동 쇼에,병사 하나가 홀린 듯 월북했다. 가만히 있을 우리가 아니었다. 1992년 해발 1200m가 넘는 가칠봉 초소에 수영장이 설치됐다. 그해 5월 미스코리아 수영복 촬영이 이 수영장에서 이뤄졌다. 소문에는 탈의실 북쪽은 투명한 통유리벽이었다고 한다. 지난 7월 3일 미스코리아 32명이 을지전망대를 찾아와 또 이벤트를 벌였다. 메르스가 한창이라 일반인은 물론 군 관계자도 출입 금지된 때였다.
    군사 지대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남쪽을 본다. 반구형으로 푹 꺼진 분지가 펼쳐진다. 동서로 한눈에 겨우 들어오는 거대한 분지다. 가슴 무거운 옛 역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장엄한 풍경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분단만 생각하지 않으면 펀치볼 남과 북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그 풍요로운 풍경을 감상하는 데 60년이 걸렸다. ㆍ고단했던, 그러나 추억이 된 흔적들
    중공군에서 선녀폭포까지 말 폭포를 쏟던 김영숙이 파리채를 휘두르며 파안대소했다. "옆집이 이발소야. 여기 하나밖에 없어. 근데 이발사가 관둔대. 재미없다고. 그럼 어떻게 돼? 머리 깎으려면 읍내 나가야지 머. 우리 영감 죽으면 약방도 없어지는 거고." 그러면 이제 젊은 50대 이장 신현근과 여든 살 신참 농부 금종근도 70리 밖 양구 읍내로 나가 머리를 깎아야 한다. 인삼밭,참깨밭,시래기밭,논,과수원에서 일하는 필리핀,태국,베트남,러시아 사람들도 모두 읍내로 나가야 할 것이고. 역사는 흉터로 남았다. 전쟁이 났고,사람들이 돌아왔고,개간을 했고,굶주렸고 고통스러웠으며,통제 속에서 목숨을 걸고 고단하게 살았다. 지나고 나면 흔적은 추억이다. 그 추억을 훔쳐보려는 사람들이 펀치볼로 틈입한다. 거기 김영숙이 산다. 열다섯에 전쟁을 만나 열여섯에 중공군 만나고,스물둘에 시집와서 스물다섯부터 지금까지 펀치볼을 지키는 파파 할머니가 산다. ㆍ양구 여행수첩
    1. 을지전망대 펀치볼에 있는 양구통일관에서 방문 신청. 제4땅굴 포함해 입장료 2500원. (033)480-2674, 월요일 휴관. 최근 북한 도발로 개방여부 반드시 확인할 것. 2. ☞ 펀치볼 둘레길 ☜ 펀치볼 사람들은 그 지난한 역사를 꿰뚫는 '펀치볼 둘레길'을 최근 완성했다. 들판과 지뢰밭, 저수지와 인삼밭 사이를 안전하게 걸어다니며 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길이다. 맛집, 숙박도 안내한다. 3. ☞ 시와 철학의 집 ☜ 평남 출신인 철학자 안병욱과 김형석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두 사람은 생전에 고향 갈 방도가 없으니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뿌리를 내리자고 작심했다. 그리하여 고른 곳이 양구다. 2년 전 하늘로 간 안병욱은 양구읍내 파로호변에 묻혀 있다. 그 옆에 시와 철학의 집이 있다. 안병욱과 김형석이 기증한 자료들, 양구가 고향인 시인 수녀 이해인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원명은 '이해인 시 문학과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4. ☞ 박수근 미술관 ☜ www.parksooke un.or.kr 화강암을 닮은 마티에르 질감으로 토속적 정서를 풀어낸 화가 박수근은 양구 사람이다. 그의 유족과 뜻있는 사람들이 생가터에 박수근 미술관을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기타 조선 백자 도요지로 밝혀진 양구에는 ☞ 백자박물관 ☜ 이 있고 위성사진으로 판명 난 '대한민국 정중앙'을 기념하는 탑과 ☞ 천문대 ☜ 가 있다. ☞ 양구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033)480-2251 ☜ 펀치볼 내비게이션 키워드 '해안면사무소'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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