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단양 온달산성과 '성주(城主)' 윤수경

浮萍草 2015. 10. 10. 00:00
    가을 내린 저 山城에 바보 온달 살았다더라
    면서기 취직해 고향 샅샅이 훑어 마흔한 살에 쓴 온달 논문 '대박' '바보 온달 전사지는 단양' 입증 山城 아래에는 웅장한 촬영장 도담삼봉… 석문… 활공장… 영월, 영주까지 하루 나들이 집불통 농사꾼 아버지 강압에 공부를 포기했던 윤수경은 단식 농성 끝에 고등학교에 들어가 꿈에 그리던 고향 면서기가 되었다. 고향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이다. 후반부 삶은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나이 마흔한 살에 이 고졸 면서기는 온달산성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철들 때부터 보고 자란 고향 앞산 하늘 아래 산성이다. 쉰 살에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그러곤 절에 가서 2년 동안 도를 닦다가 군 의회에 당선돼 의장까지 지냈다. 전직 군의회 의장은 지금 본인에게 득 될 거 별로 없는 문화해설사로 일한다. 근무지는 논문 주제였던 온달산성 아래 온달관광지다. 육십갑자(甲子) 한 번 돌고도 남는 세월,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이 사내 별명은 '온달(溫達) 성주(城主)'다. ㆍ"이런 바보 온달 같은 놈"
    온달산성 논문을 쓴 윤수경. 산성 역사만큼이나
    살아온 내력이 복잡하다.
    대대로 농사를 지었던 윤수경네 집은 잘살지도 못살지도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서 아버지가 말했다. "무학(無學)도 농사는 잘만 한다. 중학교도 호강이니, 한학(漢學) 일년 배우고 농사지어라." 꼼짝없이 서당에 나갔다. 아버지는 무학이었다. 큰아버지는 만주에서 교사를,둘째아버지는 면서기를,셋째아버지는 운동을 했다. 그런데 이 넷째 아들인 아버지는 힘이 장사라 진즉에 할아버지가 선언했다. "공부할 생각 말고 농사지어라." 이게 새옹지마가 됐다. 6·25전쟁 때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형들은 다 도망 다녔지만 손등과 손바닥에 느티나무 껍데기 같은 옹이투성이인 넷째는 '전형적인 무산계급( 無産階級)' 판정을 받고 살아났으니 농사보다 귀한 직업은 없었다. 서당 훈장 고우규는 기인이었다. 8척 장신에 발은 워낙 커서 공장에서 버린 불량품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해장술을 여든세 잔 마시는 술고래요, 마을 아이가 아프면 침을 놓고 주문을 외워 병을 고치는 도사(道士)였다. 윤수경은 점괘 보고 병 고치는 비결(袐訣)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명심보감 닷새 만에 다 외우면 가르쳐주마." 비현실적인 훈장님 말에 윤수경 또한 지금은 납득이 가지 않는 초능력으로 사흘 만에 다 외웠다. 훈장이 말했다. "바보 온달 같은 놈이구나." '설마 하고 시켰더니 진짜로 해냈다'는 뜻이다. 한마디 더 했다. "이런 거 배우면 야바위꾼 되는 거다. 고등학교 가서 큰 인물 되거라." 아버지한테 조건부 허락을 받았다.
    "영월공고,제천농고 단양공고는 절대로 안 된다." 1960년대 방학만 되면 영춘시장에서 놀다가 패싸움을 벌이는 이 세 명문 학교는 농부 아버지에겐 불량배 소굴이었다. 윤수경은 충주농고에 합격했다. 그리고 특전사에 자원해 군대를 마치고서 고향 영춘면 면서기로 금의환향했다. 1974년이었다. ㆍ뗏목꾼과 온달산성
    한강 하구 광나루에서 떠난 소금배가 올라가는 남한강 최북단은 용진(龍津) 나루다. 윤수경이 태어난 마을이다. 소백산에서 베어낸 통나무를 뗏목으로 만들어 서울로 향하던 출발지이기도 했다. 뗏목꾼들은 떼돈을 벌었다. 뗏목이 단양을 벗어나면 사내들은 열두자짜리 뗏목 아래에 숨겨둔 아홉자짜리 통나무를 꺼내서 서울까지 들르는 나루마다 예쁜 여자들 웃음과 바꿔먹었다.
    충북 단양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국경을 다투던 최전선이었다. 산성 아래 마을에는 바보 온달에 얽힌 지명이 산재해 있다.
    렌즈=삼양옵틱스 14mm 1:2.8 ED AS IF USM, 셔터 스피드=1/30초, 조리개=f8.0 /박종인 기자

    강 건너 하늘 꼭대기에 늘 산성이 떠 있었다. 바보 온달이 만든 성이라고 했다. 아득한 옛날부터 단양 사람들은 강 건너 마을 사람이 오면 "저기 신라 놈 온다"고 했고 별 볼일 없고 쓸모없는 사람은"(온달 장군이)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불렀다. 성(城)과 삶은 뗄 수가 없었다. ㆍ볼거리·먹거리 많은 단양
    삼국시대부터 6·25 때까지 단양에는 전쟁이 끊임없었다. 충청·강원·경상 3도 접경지에 남한강이 감싼 군사 요충지였다. 단양 군내에 산성이 20개가 넘는다.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양, 특히 영춘면 지역을 두고 엄청나게 싸웠다. 이름은 을아단(乙阿旦·고구려),자춘(子春·신라),영춘(永春·고려)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단양군과 합쳐졌다. 최종 승자는 신라였다. 옛 군사 요충지는 대개 천혜의 관광지로 바뀌었다. 단양이 그러하다. 하늘이 좁아 보이는 이 산골에 정도전이 찬양한 도담삼봉이 있다. 정도전은 이 삼봉을 자기 호(號)로 삼았다. 낮도 낮이지만, 조명 속에 빛나는 물속 세 봉우리는 사람이 만든 듯 정교하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속이 다 후련하다. 북쪽으로는 영월이, 남쪽으로는 수안보와 영주가 코앞인지라 단양에 숙소를 두고 며칠씩 여행을 하기에도 효율적이다. 군청이 있는 읍내에는 천하 절경을 편히 즐길 수 있는 숙소와 맛집이 많다. 옛날도 마찬가지여서 영춘 현감은 이 첩첩산중에 울면서 부임했다가 그 절경과 순박한 인정에 울면서 이임했다고 했다. ㆍ신참 면서기, 온달을 만나다
    마고 할멈이 온달을 도우려다 바위가 됐다는 사지원리
    선돌
    그 천하 절경에 갓 부임한 신참 면서기 윤수경이 맡은 일은 국민투표 투표함 운반과 화전(火田) 정리였다. 유신 시절 공무원들은 투표함을 짊어지고 60리 길을 걸어 군내를 훑었다. 마을 이장 집에 도착하면 막걸리판을 벌였다. 밤새 대통령부터 군수,면장까지 문제점과 비리를 취중 작파하고는 다음 날"그래도 찍어줘야 우리 마을이 발전하지" 하며 다음 마을로 떠나곤 했다. 윤수경은 정감록파 화전민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언젠가부터 단양 의풍계곡에는 정감록을 믿는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이 화전을 하며 살았다. 1975년 화전 정리 사업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낫을 들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머리에는 한학(漢學)이 몸에는 특전사에서 배운 생존기술과 살인 기술이 꿈틀대던 윤수경이었다. 낫 든 청년들에게"당신이 주먹을 지르면 나는 주먹과 발이 같이 나가니 죽어도 책임 못 진다"고 배짱을 부렸고노인에게는 한시(漢詩)와 보학(譜學)을 읊었다. 유식한 면서기와 밤새 대작한 노인은 다음 날"나라 정책이 그러하다니…하며 퇴거통지서에 도장을 찍어 줬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마을 어르신들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군간나루 속세목이에 살던 한춘봉은"여기가 온달 부대가 부상병 고치던 '군간(軍看)'"이라고 했다. 방터에 사는 노인 최용수는 "저기는 온달 부대 최전선인 꼭두방터고 여기 중간방터는 보급부대 군량미 창고"라고 했다. 면위실(免衛谷)에 살던 할머니 김부덕은"온달이 신라 포위망('衛·위')을 뚫고('免·면') 살아난 골짝"이라 고 했다. 천지사방에 온달이었다. 하늘 꼭대기 온달산성은 400번도 넘게 올랐다. 출장 갈 때마다 면서기는 노인들 구술(口述)을 채록했다. 군관,깃대봉,대진목,장군목이,은포동,장방터,망굴여울 기타 등등 온달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마을이 120 군데가 넘었다. 사지원리 적석총에는 온달이 묻혔고, 온달 도우러 날아오던 마고 할멈이 굳어서 선돌(立石)이 됐다고 했다. ㆍ고졸 공무원 논문으로 바뀐 세상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고구려 장수 바보 온달은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접경 아차산에서 죽은 줄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진단학회를 만든 사학자 이병도가 그렇게 추리한 이래 모두 그리 알고 있었다. 1990년 '고졸' 윤수경은 전국 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한 논문 공모전에 논문을 출품했다. 제목은 '단양·영춘 지역의 지명 유래와 전설에 관한 연구'.투표함과 화전민 퇴거통지서 각종 민원서류를 들고서 군내를 훑으며 축적한 자료들을 근거'지역민들의 생활사에 온달이 녹아 있으니 온달산성 위치는 아차산이 아니라 단양'이라는 논지였다. 온달산성에 관한 한 유례없이 풍부한 자료와 사실 관계를 담은 문화인류학적 논문이었다. 주최 측은 특별상을 만들어 윤수경에게 안겼다. 온달산성 위치는 이후 논쟁 끝에 단양으로 기울었다. 윤수경이 묻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계립현(문경새재 동북쪽 고개다)과 죽령(단양과 경북 영주 사이에 있다) 서쪽 땅을 회복하겠다고 출정했다가 전사했다. 두 고개가 서울에 있으면 온달산성도 가져가라." 논문이 발표되고서 단양에서 존경받는 원로 향토사학자 장충호가 윤수경을 찾아왔다. "윤형,학위를 받으시게.고졸 면서기 말은 씨알이 먹히지 않아." 1999년 윤수경은 군청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대학교에 들어갔다. 쉰 살이었다. 죽령 너머 영주 동양대학교 문화재발굴보존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산성(山城)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말발이 먹히는 사학자가 된 것이다. ㆍ관광객 몰리는 온달산성
    학교를 다니며 윤수경은 천태종 구인사에 입산해 2년 동안 도를 닦기도 했다. 주위 권유에 2002년 군의원 선거에 출마해 의장도 해봤다. 중졸 농부에 고졸 면서기, 사학자에 의장 나리까지 지낸 윤수경은 지금 온달 관광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온달 관광지는 온달산성 아래에 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정도전'을 이곳 드라마 세트장에서 찍었다. 온달 전시관에는 윤수경의 논문을 인용한 대형 지도와 모형도가 사료와 함께 전시돼 있다. 온달산성은 지금 세 번째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윤수경에겐 붙일 호칭이 따로 없는지라 사람들은 우스개로 '성주(城主)'라고 부른다. ㆍ단양 여행수첩
    온달 무덤이라는 적석총‘태장이묘’
    온달문화축제 10월 1일부터 4일까지 단양 일대에서 열린다. 첫날 대동제를 시작으로 지상 무예,연극,국악,불꽃놀이 등이 진행된다. 홈페이지에서 숙박, 맛집 등 검색 가능. ☞ 단양온달문화축제 ☜ 온달산성 온달관광지에서 걸어서 오른다. 남쪽 성곽은 무너지기 쉬우므로 건드리지 말 것. 현재 문화재 발굴이 진행 중인 곳도 출입 조심.온달관광지에서 1km. 입장료 무료. 온달관광지 입장료 5000원. 각종 드라마 촬영 세트장이 제법 근사하다. 함께 있는 온달전시관에서는 온달에 관한 사료와 해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온달동굴 온달관광지 안에 있다. 길이 800m짜리 종유동굴. 온달이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했다는 전설. 천연기념물 261호. 석문(매포읍 삼봉로 644-33) 도담삼봉 전망대에서 산길 300m. 거대한 바위에 난 자연 통문(通門). 구인사(영춘면 구인사길 73) 천태종 총본산. 역사는 짧지만 경내 분위기는 한적하고 가을 단풍 속에 오르는 산길이 근사하다. (043)423-7100, ☞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 ☜ 숙소 단양은 영월, 영주, 제천 등 중원 관광지를 구경하고 돌아볼 수 있는 동선 중심지다. 남한강을 따라서 펜션도 많다. 숙소 검색은 ☞ 단양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 맛집 ① 단고을한우마을(043-422-5411): 등심 7000원
    ② 으뜸식당(043-421-6849): 산채정식, 더덕정식(2인분) 2만4000원. 둘 다 온달관광지 내. 단양군청 문화관광과 20명 이상 단체는 문화관광해설사 해설도 문의할 수 있다. 온달에 얽힌 지명에 대해서는 윤수경 해설사 해설을 부탁해볼 것. (043)420-2553, ☞ 단양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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