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문화유산이야기

17 서울 낙산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의 상징성

浮萍草 2015. 9. 15. 23:14
     
    ▲ (左) 서울 낙산의 남동쪽 기슭인 창신동 바위 자락에 새겨진 관음보살상
    뭔가 답답하면 ‘나무관세음보살’하고 되뇌이는 할머니들을 본다. 대표적인 불교경전의 하나인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중생이 온갖 고통과 고뇌에 시달릴 때 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깊은 가르침을 알 길 없고,해탈에 이르기는 더 더욱 어려운 중생이라도 그저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하고 마음을 모아 부르기만 하면 구원해준다는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티베트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퍼져나가면서 수많은 관음성지를 만들었다.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산 포탈라카(Potalaka)는 스리랑카에서 멀지 않은 인도 남동쪽에 자리잡은 것으로 믿어졌다. 따라서 관음성지, 즉 포탈라카의 상징성이 부여된 도량은 바닷가에 위치한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바다가 없는 티베트조차 키추강을 바다로 상정하고 수도 라사를 포탈라카로 의미를 부여했다. 라사의 포탈라(Potala)궁은 글자 그대로 관음보살이 살고 계신 곳이다. 그러니 포탈라궁의 주인 달라이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이끄는 달라이라마를 변함없이 정신적 지도자로 여기는 까닭이다. 중국에서 포탈라카는 다양한 음역(音譯)이 이루어졌지만, 일반적으로 보타락가(補陀洛迦)로 표기한다.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저우산(舟山)군도의 보타도(補陀島)가 대표적 관음성지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1년(671)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관음굴을 지었다는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을 최초의 본격 관음도량으로 보아야 한다.

    양양 낙산사를 비롯해 인천 강화 석모도의 낙가산 보문사,경남 남해 보광산 보리암은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여기에 전남 여수 돌산도의 향일암을 포함시켜 4대 관음성지로 부르기도 한다. 낙산이나 낙가산은 모두 보타락가의 줄임말이다. 서울의 낙산 역시 보타락가산을 상징한다. 연극의 거리로 유명한 대학로 뒷산이다. 안앙암은 낙산 남동쪽 기슭인 창신동 산기슭에 조금은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다. 커다란 바위에 관음보살이 새겨졌는데, 지붕을 씌우고 문을 달아 전각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높이 3.53m의 관세음보살상 곁에는 마애불을 조성한 내력도 새겼다. 관음보살이 조성된 1909년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병탄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해가 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대한제국의 고통이 갈수록 깊어지던 시기다. 이후 6.25전쟁으로 낙산이 피난민의 판잣집으로 가득찬 뒤에도 관음보살은 위안을 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불교적으로 낙산 관세음보살은 서울 주민 모두,나아가 국민 모두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조각이라고는 해도,안양암 마애관음보살상이 갖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듯 하다. 창신동은 청계천과 함께 한국 봉제산업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으로 지금도 동대문 패션타운의 배후생산기지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창신동이 서울의 새로운 문화적 부심(副心)으로 떠올랐을 때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상은 매우 중요할 역할을 해낼 것이다.
    Seoul        글·사진 서동철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