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역사 이야기

1 ‘조선 공인지식인 1호’ 정몽주

浮萍草 2015. 8. 27. 19:26
    역적서 忠의 상징으로 … 권력투쟁에 이용된 정몽주
      중종 12년(1517) 9월 17일. 조선 지식인 사회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났다.   정몽주(1337∼1392)가 조선의 문묘에 종사(從祀·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될 첫 번째 지식인으로   선정된 것이다.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조선 건국을 반대했고 그 이유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던   정몽주가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 1호로 국가에 의해 공인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정몽주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간이었다.   그의 먼 선조 정습명은 고려 인종과 의종 때 간관(諫官·임금이나 신하의 잘못을 간하는 벼슬아치)으로   활약했다고 알려졌지만,정작 그의 조부 정인수와 부친 정운관의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정몽주가 입신양명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밖에 없었다.   그는 공민왕 9년(1360)에 치러진 과거에서 연달아 세 번 수석을 차지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런데 이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고려 때 과거를 관장하던 주 시험관)를 맡아 정몽주를 선발했던 김득배가 불과 2년 뒤에 홍건적을 토벌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고 말았다. 이제 갓 공명의 길에 접어든 26세의 청년 정몽주로서는 스승의 죽음 앞에서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지 하늘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하여 말이 흘린 땀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개선의 노래가 아직 그치지 않았는데 태산 같은 공로를 칼끝의 피로 산화시켰습니까?” 그러나 역사의 심판을 앉아서 기다리기에 정몽주는 너무 젊었다. 결국 그는 김득배가 피살된 다음 해인 공민왕 12년(1363)에 여진족 정벌에 나서며 스승의 길을 따라갔다. 마침 여진족 토벌에 나섰던 이성계를 처음 만난 것도 이때였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성균관 박사를 맡아 성리학 강의를 참고 서적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해 이색으로부터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라는 찬사를 들었다. 정몽주는 명나라와 일본을 수시로 오가며 외교 분야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공민왕 21년(1372)에 오른 첫 사행(使行)에서는 귀국길 바다 한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바위섬에 표착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때 그는 말다래(진흙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안장 양쪽에 매단 가죽)를 베어 먹으며 13일을 버티다 명나라 태조가 보내준 배를 타고 귀국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일행 중 8할이 사망한 참변도 누구보다 강한 그의 삶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공민왕 피살 직후에는 이인임이 국왕 피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김의를 시켜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하고 북원 사신을 영접하려 하자,고려의 대명 관계 악화를 우려해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사태의 진상을 해명할 것을 촉구했다. 이 일로 정몽주는 권력 실세들의 탄핵을 받고 언양에 유배됐지만 2년 뒤 우왕 3년(1377)에는 일본 하카다(博多)에 파견돼 왜구 문제로 불거진 외교마찰을 원만히 해결하고 억류됐던 포로들과 함께 귀국했다. 우왕 대에는 정몽주와 이성계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계속됐다. 우왕 6년(1380)에는 이성계의 조전원수(우두머리 장수를 돕는 장수)가 돼 전라도 운봉에 출몰한 왜구를 물리치는 데 참여했고 우왕 9년(1383)에도 이성계의 동북 지방 원정에 조전원수로 참여했다. 이런 인연으로 정몽주는 이성계의 활 솜씨를 칭찬하는 시를 짓기도 했고 이성계의 초상화에 대한 찬사를 통해 이성계의 정치적 경륜과 탁월한 군사 전략을 칭송 했다. 정도전이 꿈을 찾아 함주의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갔듯이 이 시기의 정몽주도 이성계와의 만남을 통해 고려의 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그려갔을 것이다.
    정몽주의 정치적 성장은 이성계의 출정을 돕고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급속히 이뤄졌다. 그리고 마침내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신종(神宗) 왕탁(王晫)의 7대손인 왕요 (王瑤)를 공양왕으로 옹립하는 흥국사 모의에 가담했다. 1389년 11월의 일이었다. 정몽주가 이성계 진영에 가담해 ‘신돈의 혈통을 이은 가짜를 폐하고 진짜 왕 씨를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 논의에 동참한 것은 그것이 왕 씨의 나라 고려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몽주와 이성계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분열은 공양왕 2년(1390) 5월에 발생한 윤이·이초 사건에서 시작됐다. 사건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표면적인 주모자는 이성계의 명나라 침공 계획을 황제에게 거짓 보고한 윤이와 이초였다. 사건이 발각되자 이성계 세력은 사건의 배후로 이색과 우현보 등을 의심하고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반면에 정몽주는 관련자들의 죄상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대사면을 요구했다.
    공양왕은 우현보의 손자 우성범을 부마로 맞았기 때문에 우현보의 처벌에 미온적이었고 정몽주는 공양왕의 지지를 배경으로 구세력의 영수였던 이색의 입장을 변호했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 옹립 모의에 참여해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구세력을 옹호했던 것 이다. 결국 공양왕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이색과 우현보 등을 석방했고, 정몽주는 사건 해결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양왕 3년(1391) 12월에 이성계와 함께 안사공신에 책봉됐다. 공양왕이 이성계를 안사공신에 포함한 것은 이성계 세력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몽주에게 고려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공양왕 4년(1392) 3월에 찾아왔다. 이때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낙마하자 정몽주는 선수를 잡기 위해 우선 조준,정도전,남은을 귀양 보냈다. 그러고는 이성계를 문병하며 동태를 살피고,돌아가는 길에 자주 다니던 술도가에 들렀다. 술도가를 나서며 그는 마지막으로“오늘은 풍색(風色·남 보기에 좋지 못한 기색)이 고약해도 너무 고약해”라고 중얼거렸다.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 의해 살해당했고,그의 목은 개경 거리에 효수됐다. 4월 4일의 일이었다.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의 일곱 개 검은 점을 갖고 태어난 한 인간의 육체적 삶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반역자의 시신은 우현보가 천마산의 승려를 시켜 수습했다. 정몽주가 한때 우현보의 아버지 우길생에게 수학한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몽주의 비극적 최후를 ‘단심가’와 함께 처음 소개한 책은 심광세가 광해군 9년(1617)에 편찬한 ‘해동악부’였다. 심광세는 아이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시가의 형태로 가르치려고‘해동악부’를 편찬했고,정몽주의 최후와 관련된 일화를 ‘풍색악’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그 후 숙종 45년(1719)에 정몽주의 후손 정찬휘가 ‘포은집’에 빠진 기록들을 모아 ‘포은집속록’을 편찬하면서 ‘해동악부’의‘풍색악’ 부분을 처음 옮겨 실었다. 세종 21년(1428)부터 숙종 3년(1677)까지 여덟 차례나 간행된 포은집에 한 번도 실리지 않았던 ‘단심가’가 정몽주 사후 327년 만에 문집에 수록된 것이다. 몇몇 연구자가 지적했듯이‘단심가’는 정몽주의 의로운 죽음을 극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17세기 초반에 위작됐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사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정몽주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동정심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태조 즉위 직후 민여익은 정몽주를 동정하며“죽어서는 안 될 사람인데 죽었다”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신 책봉 반대 논의에 휘말렸다. 반면에 유만수, 최영지 등은 정몽주를 논죄한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원종공신에 책봉됐다. 그 후에도 정몽주의 정치적 행보와 충성심에 대한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조식(1501∼1572)은 신돈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최영이 중국을 침범하던 때에 정몽주가 벼슬을 버리지 않았던 것을 비판했으며 정구(1543∼1620) 역시 정몽주의 죽음이 가소롭다고 비난했다. 정몽주의 죽음이 갖는 상징성을 간파하고 그 역설의 정치적 활용을 최초로 제안한 인물은 권근이었다. 그는 왕위쟁탈전을 거쳐 보위에 오른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태종에게 정몽주의 복권을 건의했다. 권근의 논리는 정몽주의 충성심을 선양하는 것이 태종의 치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권근은 태종에게 정몽주의 복권을 제안하며 그는“자신이 섬기던 곳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지조를 바꾸지 않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권근의 주장은 정몽주가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큰 절개를 선양해 그 정신을 태종 시대의 정신적 가치로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태종도 재위 1년(1401) 11월 7일 권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몽주를 영의정부사로 추증했다. 정몽주의 정치적 복권에 대한 최종 결정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사지로 내몬 장본인 이방원이 내렸다. 정몽주의 절의 정신을 치세의 요건으로 인정한 태종의 결단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선례가 됐다. 세종은 태종의 뜻을 이어 정몽주를‘충신도’에 포함했고,문종은 정몽주의 후손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중종 12년(1517)에는 문묘에 종사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됐다. 그는 조선을 위해서는 단 하루도 살지 않았던 고려인이었지만, 문묘 종사를 통해 조선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활했다. 문묘 종사를 통해 그의 충성심은 정치 윤리의 모범으로 공인됐고, 그의 학문은 조선 지식계보의 출발점으로 확정됐다. 그러나 정몽주의 문묘 종사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문묘 종사 논의를 주도했던 조광조가 원래 염두에 뒀던 대상자는 정몽주가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자 연산군 폭정의 희생자였던 김굉필이었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지식인의 저항정신을 반정의 시대정신으로 각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좌절됐다. 당파를 형성하려 한다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대안으로 정몽주를 선택했다. 정몽주는 저항정신의 기원으로서도 손색이 없었고, 태종 때 이미 복권돼 정치적 문제도 해결돼 있었다. 정몽주를 선택하자 길재,김숙자,김종직을 거쳐 김굉필과 조광조로 이어지는 계보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었다. 지식계보의 확립을 위한 정치투쟁의 서막은 이렇게 열리기 시작했다. 도학의 계보는 하나의 순정한 기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치열한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
    ㆍ최연식
    △ 1965년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연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현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연세대 국학연구원 부원장·동아시아고전연구소 소장 △ ‘조선의 지식 계보학’(옥당) 등 출간

    Munhwa ☜       최연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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