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이봐 해봤어?'

31 피할 수 없었던 라이벌 정주영-박태준(상)

浮萍草 2014. 9. 29. 12:23
    정주영, 제철사업 진출을 놓고 박태준과 정면대결하다
    박태준 전 포항제철 사장./포항제철 제공
    주영 회장,박태준 회장,이 두 사람은 한국 경제사에서 우리나라가 중화학 공업을 바탕으로 한 선진 공업국으로 진입하는데 가장 중요한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철강은 산업사회의 쌀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래서 한 나라의 산업 측면에서의 국력을 일인당 철강 생산량을 가지고 가늠하기도 한다. 한편 조선과 자동차공업은 이 철에다가 기계, 전자, 화학 등 현대 첨단 기술을 더하여 부가가치 높은 첨단 기술 복합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미국,영국,독일,일본 등은 모두 일찍이 이들 분야에 기반을 다짐으로서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어느덧 세계 양대 최강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예외 없이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이 분야 산업 역량 강화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약 반세기 전 우리의 1 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못 미치던 최빈국 시절 - 자본,기술,경험,시장 등 모든 여건이 열악한 정도가 아니라 참혹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이를 극복하고 신화같은 업적을 이룩하여 한국 경제도약의 기틀을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한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국가 경제의 장래를 내다본 통찰력과 불굴의 집념,불가능하다는 세론을 돌파한 도전 정신과 추진력, 리더십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이 두 사람은 그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정치,경제적 환경 조성과 적극적인 지원을 당시의 절대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성장 배경,출신에서부터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나이도 정회장이 12살이나 더 많다. 철강 생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철광석을 고로에서 녹여 철강을 생산하는 일관제철소와 고철을 녹여 재생산하는 방법이 있다. 생산품은 여러 용도의 철판,강재,형강,철근 등 엇비슷하지만 요구되는 투자규모의 천문학적 차이뿐만 아니라,장비의 규모, 기술,그리고 품질의 고급화 등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선진공업국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철광석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 자체에서도 철광석은 수출하되 자력으로 고로 방식의 일관제철소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은 자유당 정부,그리고 민주당 정부 때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시절 그러한 계획은 언감생심 구상과 계획일 뿐 이를 실현하기에는 나라 형편이 턱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관제철소 계획은 5·16으로 정권을 잡고 국가경제 재건과 산업 현대화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국가 최고 지도자의 강한 집념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박 대통령 정부가 내어놓은 계획을 가지고 1966년 미,영,독,불,이태리 5개국의 8개 회사가 참여한 타당성 조사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왔고,이에 따라 1969년 4월에 세계은행은 “한국에서 고로 방식의 일관제철사업은 시기상조라 투자불가”라고 결론지었다.
    포항제철을 시찰 중인 박정희와 박태준.

    그러나 국가 장래를 위한 이 중요한 계획을 쉽게 포기할 박 대통령이 아니었다. 당시 한일 협정체결로 확보되는 대일 청구권 자금 중 농업분야에 사용하기로 한 2억달러를 돌려서 일관제철소 설립계획에 쓸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전면에 박태준을 내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일 협정 체결 과정 자체에서부터 박태준이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던 점이다. 그는 박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에 8 개월간이나 장기 체류하면서 암암리에 일본 지도층 내의 박 대통령의 인맥,그리고 자신의 인맥을 접촉하며 한일협정 체결의 물밑 작업을 맡았다. 당시 이러한 일본 측 인사들 중에는 일본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박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어 한일협정 성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세지마 류조씨도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 억달러로는 아직 태부족한 자금, 기술 유출과 세계시장에서 경쟁자를 키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계 철강 업계의 경계 등 넘어야 할 과제들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특유의 추진력과 많은 일화를 남긴 강한 개성의 군 지휘관식 리더십을 발휘하여 수많은 난관을 돌파하고 착공 후 약 5년 만에 대망의 일관제철소를 완공 시켰다. 박태준 회장이 비록 국가의 최고 통치자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공기업을 이끌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그는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와 비유되기도 한다. 흑묘백묘론을 내세워 중국의 경제 도약에 몰두하던 생전의 등소평이 중국 지도층에게 박태준 회장을 주목하라고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철강 제품의 가장 큰 수요처 중의 하나는 거대한 선체와 내부 골격 모두가 철로 되어있는 선박과 역시 차체와 프레임이 철로 되어있는 자동차 산업이다. 포항제철 초기 아직 해외 수출이 미흡했던 상황에서 이 시기 한창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현대 조선과 자동차는 당연히 포항 제철에게 중요한 시장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편에서는 이미 정주영 회장과 박태준 회장과의 라이벌 관계가 배태되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도 고로방식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의 포부는 포항제철과의 경쟁차원이 아니고 세계시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가 조선과 자동차 산업을 계획했을 때도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세계 무대였다. 그는 이런 계획을 표면화하고 이의 구체화를 위해 정부와도 접근을 시작했다. 정 회장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박태준 회장의 반대는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의 저지를 위해 특히 정부 관련 부처 장관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그러나 상대가 포철 신화로 국가적으로 영웅시되고 있던 박태준 회장이라도 이에 순순히 물러날 정 회장 또한 아니었다. 그는 굽히지 않고 이런 계획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현대 조선과 자동차의 성공,중동 건설 진출로 파산 지경의 국가경제를 구해 낸 정 회장 역시 박 회장 못지않는 명성과 한국 경제계에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박 회장의 저지 노력은 포철 성공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개성만큼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이었다. 가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포항제철의 영업기반 보호,천문학적 투자와 가장 긴 투자자본 회임기간을 요하는 일관제철소에 대해 국내 중복 투자를 허용하면 제한된 국가 투자재원을 낭비할 가능성 등을 내세우며 왜 포항 제철이 독점적 위치를 유지해야하는지 강변하고 나섰다. 이에 대하여 정 회장은 일관 제철소 역시 크게 세계시장을 목표로 해야 하고, 한 기업에 독점적 위치를 정책적으로 보호해 주는 것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품질 개선,그리고 가격 경쟁을 통해 경쟁적 우위를 확보해야 되는 세계 시장을 생각할 때 옳지 않다는 것을 내세우며 강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두 주장 중 어떤 한 쪽 주장의 당위성 차원을 넘어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었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군에서 인연을 맺은 선 후배 사이다. 박태준은 10 살 위인 대선배 박정희 장군을 일찍이 그의 인품에 매료되어 극진히 존경하며 그를 따랐다. 박 장군 역시 박태준을 단순히 군 후배 차원을 넘어 모든 면에서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기에 이르렀다. 박태준은 박 장군이 가는 길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꺼이 따라갈 수 있는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박 장군이 5·16 거사를 계획,실현하는 과정에 행동 일선에서 박태준을 제외 시켰다. 거기에는 비장한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거사가 실패 했을 경우에 대비 박태준이 화를 면하게 해 줌으로서 박 장군의 가족을 돌볼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두 사람 간의 의리와 신뢰 관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나를 잘 말해 준다. 5·16 거사 성공 후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박태준 대령을 곧바로 비서실장,그리고 상공 담당 최고위원 등 그가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중책을 맡긴다. 그리고 1968년 박태준을 새로 출범하는 포항 종합제철 사장에 임명한다. 박 대통령이 극히 어려운 여건에서도 일관제철소 건립에 집념을 보인 데는 산업 현대화라는 경제적 목표 외에 또 다른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자주국방 능력 확충을 위한 방위산업 기반 조성이었다. 방위산업에는 모두 철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국방 부문에 있어도 한국의 최고 우방인 미국이 극히 달가워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이 탱크와 대포 등 중화기를 미국에 의존하게 하는 상태를 견지하는 것이 그들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자주적 국방 역량을 키워야 하겠다는 박대통령의 의지는 견고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군 후배이며 돈독한 의리와 신뢰 관계 그리고 국가관을 같이하는 박태준에게 포항 제철 사업을 맡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박태준 사장은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고 이 일을 성취해 냈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