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다시 쓰는 고대사

15 신라의 작은 도둑, 큰 도둑

浮萍草 2014. 8. 21. 06:00
    하급관리, 목숨 건 생계형 절도 … 권력층은 대놓고 뇌물
    김유신이 살았던 재매정택.17세 풍월주인 염장공은 김유신과 김춘추(태종무열왕)에게 정치자금 성격의 돈을 대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사진 권태균
    라는 골품 신분에 따라 특권과 의무가 달리 정해졌던 사회다. 당연히 경제력도 차이가 났다. 왕이 하사하는 곡식의 양에도 차별을 두었다. 제33대 성덕왕은 716년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며 벼 1만석을 주었다. 712년 성덕왕은 삼한통합 때 제 일의 공을 세웠던 김유신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내를 부인으로 삼고 매년 곡식 1000석을 주기로 했다(『삼국사기』 8). 제31대 신문왕은 삼한통합 때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회답하는 표문을 잘 지었던 강수가 죽자 그의 아내에게 벼 100석을 주었다.(『삼국사기』 46). 진골 중 왕실의 일원이었던 여자에게는 1만석 진골 김유신의 처에게는 1000석 6두품 강수의 처에게는 100석의 곡식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분에 따라 10배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5두품의 처에게는 10석 4두품의 처에게는 1석의 벼를 준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그 이하 신분의 백성(평인)들은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가졌다. 신라 골품사회에도 도둑질이 있었다. 왕의 측근에서 활동하던 신료들이나 하급 관리를 막론하고 도둑질은 널리 행해졌다. 『삼국사기』 48,「검군(劒君)」전은 하급 관리의 도둑질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검군은 대사(大舍)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 궁중의 일을 맡은 하급 관리)이 되었다. 왕궁의 사인은 4두품이거나 잘해야 5두품 정도 신분을 가진 자들로 경제적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관리들이다. 제26대 진평왕 49년(627) 8월 서리가 내려 흉년이 되자 이듬해 봄과 여름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먹고 살았다. 그때 궁중의 모든 사인들이 모의하여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도둑질하여 나눠가졌는데 검군 홀로 이를 받지 않았다.
    신라시대 유물인 굽다리 접시.성골·진골·두품 신분 등에
    따라 사용하는 용기와 재질이 달랐다.
    사인들이 그에게“여러 사람이 다 받는데 그대만 홀로 물리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적은 것이 문제라면 다시 더 주겠다”고 했다. 검군이 웃으며 “나는 근랑(近郞)의 낭도로 이름을 올리고 풍류도를 수행하고 있다. 의리에 어긋나면 천금의 이익이 있더라도 마을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근랑은 화랑이 된 대일(大日) 이찬의 아들이다. 사인들은 검군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의 행위가 누설될 것을 우려했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알고 근랑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오늘 이후에는 다시 서로 만나볼 수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묻자 검군이 경위를 간략히 설명해줬다. “어찌 담당 관리에게 말하지 않느냐.”(근랑) “제가 죽음이 두려워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지게 하는 것은 인정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검군) “그러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근랑) “그들이 잘못됐고 내가 옳은데 오히려 제가 도망한다면 장부가 아닙니다.”(검군) 여러 사인들이 술자리를 베풀고 사과하는 체하면서 검군을 불렀다.
    그리고는 검군의 음식에 은밀히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그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죽었다. 검군의 사건에 나타난 사인들의 도둑질은 흉년에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른 ‘생계형’으로 보인다. 궁의 창고 곡식을 턴 이러한 행위는 분명히 범죄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검군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에 세워진 비.성을
    축조한지 3년 이내에 파괴되면 성을 쌓은 사람
    이 벌을 받는다는 서약을 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다.신라의 율령에는 도둑질에 대한 처벌
    내용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도둑질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고조선이나 부여에서는 도둑질을 엄벌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칠 경우 남자는 데려다 그 집의 노(奴·종)로 삼고 여자는 비(婢·여자 종)로 삼는다. 다만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는 1인 당 50만 전(錢)을 내야한다(『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8하).“ 널리 알려진 (낙랑)조선의 8조 금법(禁法) 중 한 조목이다. “절도한 자는 12배로 갚아야 한다(『삼국지』30,「부여(夫餘)」 전).” 이는 부여의 법률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신라에서도 도둑질은 엄벌에 처했을 것이다. 이러한 도둑질은 신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조선 때도 행해졌다. 신라에서는 사인과 같은 하급관리뿐 아니라 조정에서 충분한 보수를 받던 진골 신료들도 도둑질을 한 예가 있다. 17세 풍월주(화랑도의 수장)를 지낸 염장공(廉長公·586~648)은 김춘추를 왕으로 세우려 활동한 결사인 칠성우 중 한 사람이었다(『화랑세기』「17세 염장공」 조). 그는 16세 풍월주 보종공의 부제(副弟)로 6년간 있으며 그 집안일을 해주고 재물을 취하여 사용했다. 염장공은 15세 풍월주 유신공의 부제였던 춘추공(김춘추)을 자신의 부제로 삼았다가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김춘추는 유신공의 뒤를 이어 16세 풍월주가 됐어야 하는데 두 번 양보하여 18세 풍월주가 됐다. 염장공은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631년 5월 일어났던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 632년 정월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염장공은 조부(調府·호별로 토산물을 거두던 관청) 에 들어가 령(令)이 되어 유신공과 춘추공 양공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염장공은 유신공과 춘추공에게 정치자금을 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 35금입택 중 하나)이라 했다. 금이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홍수와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염장공은 미생공(10세 풍월주를 지낸 사람으로 조부의 령이 되어 치부함)과 비교되기도 했다. 미생공은 극도로 사치를 했으나 염장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했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컸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염장공이 국가에 들어오는 조세를 빼돌려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는데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19세 풍월주를 지낸 흠순공(欽純公·유신공의 동생)은 재물에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했다. 염장공은 웃으며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나의 아이를 네가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다”고 했다. 흠순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했다. 흠순공의 아내 보단(菩丹)은“염형(廉兄 염장공)은 색(色)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家風)을 손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고 했다. 흠순공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다.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니 호색탐재(好色貪財) 또한 할 만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보단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염장공의 딸들은 과연 행실이 없었다. 흠순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염장공은 정처인 보단과 사이에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보단의 언니 이단(利丹)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셋째 아들 반굴공(盤屈公)만 염장공의 딸이 아니라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영윤(令胤)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흠순공은 여러 차례 큰 전쟁을 치렀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士卒)을 사랑하기를 적자(赤子 어린아이)같이 했다. 조정에서는 흠순공을 삼보(三寶)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흠순공의 아들 중 세 명이 집사부(執事部)의 장인 중시(中侍)가 되었다. 흠순공의 예를 보면 염장공이 도둑질한 재물을 받았어도 그 아들들의 정치적 출세에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염장공이나 흠순공은 잘만 살았다. 역사상 관리들에게 도덕적인 측면에서 비난받지 않는 불법적 수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그러한 수익은 뇌물이라 할 수도 있으나 선물이거나 감사의 표시라 할 수도 있는 것들로 이 경우 ‘양심적 수뢰(honest graft)’ 정도로 부를 수도 있겠다 (Gerhard E. Lenski, 『Power and Privilege』, 1966). 그런데 현대 사회의 뇌물수수는 역사상 관리들의 뇌물수수나 도둑질과는 그 결과가 다른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원전비리 사건이 터졌다. 원전 핵심 부품인 제어케이블의 시험성적서를 위조해 불량 케이블 180억원 어치를 납품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따르면 원전 가동 중단·연기 등으로 인한 국가·사회적 손실은 납품액의 677배에 달하는 12조 2000억 원이나 됐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 원전제어 케이블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일본의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처럼 대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설비·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원전 관련업체들이 정권과 한국전력·한수원 고위층·간부들에게 금품을 준 권력형 비리 사건이 함께 적발됐다. 뇌물 액수를 1억8000만 원으로 계산하면 6만7700배의 국가·사회적 손실을 발생케 하는 셈이 된다. 한국 사회의 도처에서 작동하고 있는 뇌물 경제를 단숨에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우리 헌법 제7조 1항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대 사회 공직자의 뇌물수수를 역사적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나마 이 시대의 검군이 도처에 있어 다행스럽다.
    Sunday Joins Vol 382 ☜        이종욱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leejw@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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