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다시 쓰는 고대사

14 신분의 벽, 신라 골품제

浮萍草 2014. 8. 21. 00:00
    육두품 설계두, 당나라서 전공 세워 대장군까지 올라
    신라인의 모습을 묘사한 기마인물형 토기들.신라시대에는 성골·진골과 6개 두품(頭品)으로 나누어진 엄격한 신분제도인 골품제가 있었다.신분에 따라 취할 수
    있는 관직·관등이 구분됐고 사용할 수 있는 옷·도구·주택과 탈것도 달랐다.사진 왼쪽은 장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일 것으로 보인다.가운데는
    장식이 비교적 적고 오른쪽은 거의 장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왼쪽보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로 추정된다.사진 권태균
    라 제26대 진평왕 때 설계두(薛罽頭)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벗들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 말을 한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할 때 골품(骨品)을 논한다. 아무리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신분에 따라 법이 정해놓은 한도를 넘어 승진할 수 없다. 나는 서쪽 중화국(中華國·당시 당나라)으로 들어가 세상에 드문 지략과 비상한 공을 세워 영달의 길에 나아가 (관직을 가져) 천자의 곁에 출입해야 만족하겠다 (『삼국사기』 권47).” 타고난 신분 때문에 신라에서는 더 이상 큰 뜻을 펼칠 수 없어서 당나라로 가겠다는 말이다. 골품제 사회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설계두는 621년 몰래 큰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났다. 그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을 때 자천하여 좌무위(左武衛) 과의(果毅)가 됐으며 요동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가 세운 공(功)은 일등이었다. 당 태종은 “우리나라 사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형세를 보고 전진하지 않는데 외국인으로서 나를 위하여 전쟁에서 죽었으니 무엇으로 그 공에 보답하겠는가”라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설계두의 소원을 전해 들은 당 태종은 자신의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준 뒤 대장군의 직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설계두의 일화에서 보듯 신라는 골품제라는 매우 엄격한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성골(聖骨)·진골(眞骨)의 2개 골(骨) 신분과 6두품(頭品)에서 1두품까지의 6개 두품 신분이 있었다. 설계두는 성골이나 진골 같은 최고의 신분이 아닌 그 아래 6두품 정도의 계급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랑세기』‘13세 용춘공’ 조에는 왕위(王位)와 신위(臣位)를 구별하는 것이 골품이라는 말이 나온다. 법흥왕은 520년 율령을 반포 신분에 따라 백관 공복(公服)의 옷 색깔을 달리 정했다(『삼국사기』 권4). 또 6부인(六部人·왕경 6부의 사람들로 왕을 포함한 왕경인) 복색(服色)의 존비(尊卑)제도를 만들었다(『삼국사기』 권33 ‘색복’ 조). 여기서 말하는 존비 제도는 골품 신분을 구별한 것을 뜻한다. 성골·진골과 6개 두품 외에 지방인의 신분으로 진촌주(眞村主)와 차촌주(次村主)가 있었다. 그 밑에 평인(平人·백성) 신분을 편제했다(이종욱,『신라골품제연구』, 1999). 이 같은 골품 신분은 출생에 의하여 결정되고 신분 상승은 불가능했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 논했던 골품의 기준은 족(族)이었다. 족에는 종성(宗姓 박·석·김씨)과 육부성(六部姓 이·정·손·최·배·설씨)을 떠올릴 수 있다. 각 성(姓)은 하나의 씨족(clan)을 뜻한다. 각 씨족에는 서라벌 소국 형성 전후에 활동한 시조들이 있다. 그런데 법흥왕이 골품 신분을 정했을 때는 각 씨족이 만들어진 지 수백 년도 더 지났기에 씨족 성원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동안 씨족이 종족(宗族·lineage)들로 나누어졌다. 종족 중 중심 종족은 신분적 지위를 유지했고 방계로 된 종족들은 신분이 떨어지는 족강(族降)을 당했다. 신라 중고시대(법흥왕~진덕여왕)에 새로운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던 것이 그 예라 하겠다. 성골·진골은 종성을 가진 족을 대상으로 한 신분이었다. 그 이전 왕을 배출하던 종족은 진골이라 하였다. 그중 석씨족은 제16대 흘해왕 이후로는 정치적으로 도태되었다. 따라서 520년 당시의 진골은 성골이 되지 못한 김씨족과 박씨족의 종족 중 두품 신분으로 족강이 되지 않은 종족들이 차지한 신분이었다.
    두품 신분은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성했다. 6두품은 왕경을 구성한 6부의 각 부의 지배세력을 배출하던 종족들의 몫이었다. 5두품은 부를 나눈 구역인 리(里)의 지배세력을 배출하던 종족들이 차지했다. 4두품은 리를 나눈 마을의 세력들이 되었다. 6두품·5두품·4두품은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직할했다. 그러한 직할지 중 6두품이 살던 부의 중심 구역 일반 백성은 3두품,5두품이 살던 리의 중심 구역의 일반 백성은 2두품,4두품이 살던 마을의 일반 백성은 1두품이었다고 짐작 해 본다(이종욱,『신라골품제연구』,1999). 두품 신분은 육부성을 대상으로 편성된 신분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왕을 배출했던 종성에 속한 세력들은 왕국 전체의 지배세력으로 6촌 이나 6부의 세력이 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방 신분인 진촌주는 행정촌(직경 10㎞ 정도 공간,왕경의 부 정도의 규모)의 지배세력 이고 차촌주는 자연촌(직경 3~4㎞ 정도 왕경의 리 정도의 규모)의 지배세력들이었다.
    이렇게 보면 신라의 골품 신분은 지역적인 편제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골은 월성의 대궁, 금성의 사량궁, 만월성의 양궁으로 이루어진 3궁에 거주했다. 진골은 3궁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도시인 왕도(王都)에 살았다. 6두품은 부(部)의 중심 마을에 5두품은 리(里)의 중심 마을에 4두품은 리를 나눈 마을에 살았다. 그리고 지방의 진촌주는 행정촌의 중심 마을에, 차촌주는 자연촌의 중심 마을에 살았다. 설씨의 시조 호진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습비부(習比部·옛 명활산고야촌)의 설씨족의 경우 세대를 지나며 여러 종족으로 나뉘었다. 일부 종족은 신분적 지위를 유지해 부의 지배세력으로 남았다. 족강한 종족은 리의 지배세력이 되기도 했다. 골품 신분층 자체에 역사적 변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소멸된 것이 그 하나이고 삼한 통합을 전후하여 왕경인의 3두품·2두품·1두품이 통합되어 평인 신분으로 된 것이 다른 하나다. 설계두는 습비부의 세력가인 6두품으로 습비부의 중심 마을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를 배출한 족은 또 다른 경로를 통해 두품 신분을 가졌을 수 있다. 『삼국사기』2권 점해왕 3년(251) 조에는"한기부(漢祇部) 사람 부도(夫道)가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고 글과 계산을 잘해 이름이 알려졌기에 왕이 불러 아찬(阿湌) 으로 삼고 물장고(物藏庫)의 사무를 맡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예에 따라 설계두의 조상 중 누군가의 능력으로 조정의 관직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두품 신분을 받았을 수도 있다.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 등
    각종 정치·사회제도를 정비했다.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경주시 효현동의 고분. 사적 제176호.
    설계두가 당나라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신분 상승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라에는 골품 신분에 따른 관직(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어지는 직)과 관등(왕정에 참여한 대가로 보수를 주는 기준)의 상한선이 있었다. 법흥왕 7년(520) 율령이 반포된 이후 령(令·장관에 해당)-경(卿·차관에 해당)-대사(大舍)-사(史)의 4단계 관직이 설치됐다. 신문왕 5년(685)에는 사지(舍知)라는 관직이 추가돼 령-경-대사-사지-사의 5단계 관직체계를 갖추었다. 령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던 관직이다. 경은 진골은 물론 6두품도 오를 수 있었다. 관등은 왕경인에게는 17등급의 경위(京位)가(『삼국사기』 38권), 지방인에게는 11등급의 외위가 각각 설치·운용됐다(『삼국사기』40권). 왕경인 중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각간)까지 오를 수 있었다. 6두품은 6등급인 아찬(阿湌),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인 대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지방인 중 진촌주는 외위 술간(경위로 8등급인 사찬) 차촌주는 외위 5등급인 선간(選干·경위로 11등급인 나마)까지 오를 수 있었다. 신라에서는 왕경인과 지방인을 엄격하게 차별대우했다.
    무관(武官)의 경우 장군(將軍)-대감(大監)-대두(隊頭)-항(項)-졸(卒)의 5단계 직이 설치·운용되었다. 장군은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던 무관직이었고 6두품인 설계두가 오를 수 있던 무관직은 대감까지였다. 6두품이라는 신분적인 제한 설씨라는 족적인 한계로 인하여 설계두는 령이나 장군이 될 수 없었다. 대아찬의 관등을 받을 수도 없었다. 당나라에 간 설계두는 큰 공을 세웠다. 비록 전사했지만 그 공으로 인하여 당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설계두가 원하던 영달을 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설계두의 가족들이 있었다면 대장군에 맞는 신분적인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신라는 정치·사회·경제·종교·문화 등 모든 부문을 포함한 사회체제가 서로 얽히고설켜 연결되어 작동하던 골품체제 사회였다. 골품 신분에 따른 특권과 의무의 굴레는 신라가 멸망하며 사라졌다.
    Sunday Joins Vol 380 ☜        이종욱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leejw@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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