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문화 대탐사

22 - 2 국악<중>

浮萍草 2014. 8. 10. 10:23
    마음 아우르는 우리 가락, 마을 하나로 엮는 묘한 힘 
    아마추어 국악인들의 모임인 한소리국악원 회원들이 8일 서울 방배동에 모여 궁중음악인 정악을 연주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 장면1 8일 오후 7시 서울 방배동 사당역 근처 한소리국악원. 서른 명의 아마추어 국악인들이 7음계(도레미파솔라시)가 아닌 정간보(井間譜)를 보며 궁중음악을 합주한다. 정간보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가로 세로 줄로 음의 길이와 높낮이를 표시한 옛날 악보다. 연령층도 직업도 거주지도 다양한 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민속음악이 아닌 정악을 연주한다는 게 놀랍다. 쉽고 흥겨운 민속음악과 달리 정악은 어렵고 지루하다. 민속음악이 팝이라면 정악은 클래식에 해당한다. 연습실 벽면에는 이들이 화려한 궁중 복장을 하고서 국립극장과 국악원에서 연주한 사진들이 걸려 있다. 수십 년 경력을 가진 이들은 아마추어 음악인들 같지가 않다. # 장면 2
    경기도 성남과 분당, 판교 일대의 10여 개 풍물패는 해마다 양력 1월 1일 새벽 6시 반에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모여 해맞이굿을 해오고 있다. 올해로 18년째다. 정월대보름에는 당산굿을 하고 달집태우기를 하며 여름에는 단오제와 백중놀이,가을에는 풍물이야기 한마당을 펼친다.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한다. 농어촌에서조차 시나브로 사라진 풍물패가 도시에서 되살아나 세시풍속행사를 주도한다. 이들은 8월 10일 오후에도 남한산성에서 놀이마당을 펼친다. # 장면 3
    지난달 22일 전남 진도 국립남도국악원. 러시아 사할린의 에트노스 예술학교 교사와 학생 35명이 소고춤과 사물몰이,가야금을 배우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을 가슴에 품다’는 주제로 열리는 해외동포 대상의 합숙 연수 프로그램이다. 16~17세 나이의 동포 3세 학생들이 주로 참가하고 있다. 올해로 세 번째 방문이다. 이들은 국악 사랑이 깊고 실력도 뛰어나 지난 번 소치동계올림픽 때 뽑혀가서 진도북춤과 설장구 춤을 공연해 극찬을 받았다. 연수기간에 틈틈이 문화명소 탐방을 하는데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 버스 안에서 멀리 국악원이 보이면 환호성을 지르며 고향집처럼 여긴다. 국립국악원은 2013년 한 해 동안 총 221회를 공연했다. 정기·기획·해외공연은 물론 ‘국악을 국민 속으로’ 같은 다채로운 행사에 좌석 점유율도 평균 70% 가량으로 높았다. 지방에 있는 3개 국립국악원에서의 공연도 활발했다. 민속국악원(남원)은 102회 남도국악원은 134회 국립부산국악원은 216회나 되었다. “우리 한소리국악원(원장 조성래)도 지금까지 36회의 정기공연을 했지만 국악은 역시 생활음악일 때 가치가 큽니다. 노동과 여흥이 분리되지 않아야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하죠. 농어촌의 풍물굿이 좋은 예입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하는 일이 제각각입니다. 기업체 대표나 교사·한의사·학생·주부 등 다양하지만 농어촌과는 또 다른 공동체 의식이 있어요. 애경사를 함께하다 보니 회원들끼리 15쌍이나 결혼했지요.” 한소리 정악풍류회 악장 엄태경씨는 정악의 매력으로 ‘배우기 어렵지만 제대로 배워서 합주할 때 서로 맞춰가며 느끼는 묘미’를 들었다. 1980년 7월부터 시작해서 어언 35년간 국악 대중화에 앞장서온 한소리국악원은 그간 서울에서만 5만 명 강원도 강릉과 충북 제천 경북 영주지부까지 합치면 총 8만 명가량의 국악 동호인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국악기 하나쯤은 다루는 진정한 문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LG빌리지 아파트 중심의 칠보산마을은 2001년부터 한가위 강강술래 한마당을 펼쳐오고 있다. ‘사이좋은 어린이집’ ‘사이좋은 방과후’ ‘도토리교실(생태·환경 활동 단체)’ ‘칠보농악 전수회’ ‘칠보산 마을신문’이 외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한다. 한가위 강강술래는 정월 대보름 행사로 이어져 풍물굿과 고사,달집태우기,쥐불놀이,소원 등(燈) 만들기,음식나누기를 하며 마을 공동체를 이룬다. 겨울철 산불조심 기간인 대보름에 도시 외곽에서 불놀이를 한다는 게 놀랍다. 이제는 시골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세시풍속이다. “수백 명이 크고 작은 원무(圓舞)를 하며 노래하는 강강술래는 40~50분간 이어지는데 마을 주민이 하나가 돼요. 초저녁에 풍물패의 길놀이가 시작되면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복을 차려입고 고깔을 쓰고 소고를 들고서 모여들죠. 어른들은 색색의 깃발을 들고 풍물패를 따라 마을을 돌면서 축원하고 덕담하며 춤판을 벌여요. 인근 마을에서 전수해주기를 원해서 점차 확산될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탈춤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초등학교 교사 조경숙씨는 강강술래 선소리꾼이다. 정치색을 띤 인사나 국악 전문가들이 나서면 주민들이 싫어해서 순수 민간 주도의 마을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도시생활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마을굿의 한 전형이다. 한국인에게 전통적인 마을굿은 한해의 수고로움을 달래고 다가올 내일의 희망을 충전하는 대동의식이자 통과의례였다.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전남 영광의 우평마을굿이다. “신청(神廳) 걸궁으로 진행되는 우평마을굿은 옛날 전문 광대패들이 하던 굿입니다. 신청은 무속인 중심의 음악단체로 함경도는 스승청 서울 노량진은 풍류방(風流房) 경기도는 재인청(才人廳) 제주도는 심방청 등으로 불렸죠. 이들은 마을 공동체는 물론 국가 기관의 믿음치레와 각종 행사를 주관했어요. 피리·대금·해금·북·장고로 구성된 삼현육각과 풍물굿·판소리·산조·탈춤 등 각종 재주를 부렸죠. 400년 전통의 영광 신청 걸궁은 전학근·전병남·최화집에서 전경환으로 이어져온 우도농악(무형문화재 제17호)으로 일제강점기는 물론 한국전쟁 때도 끊긴 적이 없었습니다.” 우도농악보존회 최용 회장은“지금 전국에서 마을굿 살리기 운동이 일고 있는데 농어촌 인구의 고령화에 따라 전수할 젊은이들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도시에서 귀촌한 이들이 마을굿을 복원한 사례도 있다. 강원도 원주시 정대호씨(협동조합 풍류마을 이사)가 그 경우다. 20년간 의욕적으로 모두골 예술단을 이끌었지만 끝내 토착마을주민들과는 동화되지 못했다고 한다. 정씨는 “지역공동체의 와해가 심각하다. 우리가 파고들 틈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이 아닌 ‘뜻’ 공동체를 하자는 쪽이다. 전국네트워크로 만나 풍류마을을 여는 거다. 이른바 풍류 순례길인데 정주민 문화와 유목민 문화의 융합 같은 것”이라며 새로운 풍물패의 시작을 알렸다. “풍물 같은 민속음악은 배우기 쉽고 신명이 나서 좋지만 자칫 감정에 치우치기 쉬워요. 그에 비해 정악은 자연을 테마로 해서 정신건강에 아주 좋죠. 역동적인 한국인은 좀 차분해질 필요가 있어요. 이제는 정악도 사회 전반에 확산시켜야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맞는 정악 창작곡을 많이 만들어 보급해서 국민정서를 고양시켜야 할 때입니다.” 한소리국악원 영주지부장 최대섭 풍기초등학교 교장의 주장은 균형 잡힌 국악의 미래상이기도 하다.
    Sunday Joins Vol 387 ☜        김종록 객원기자·문화국가연구소장 kimkisan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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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외면했던 ‘음악 주권’
    한국인의 음악 언어 제대로 가르쳐야 세계적 콘텐트 나와 국에서 음악은 곧 서양음악을 뜻한다. 대학에는 국악과와 양악과가 아닌 국악과와 음악과가 있다. 심지어 국립 예술대학인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음악원과 무용원, 그리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전통예술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자주권을 잃어버린 우리의 음악, 이것이 바로 국악의 현주소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국악 수난사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부터 비롯된 일본식 음악교육에 익숙해져 있다. 전통음악을 배제한 일본식 서양음악 교육은 중장년층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일본음악 또는 일본식 서양음악과 한국의 전통음악을 구분하지 못한다. 한국 대중가요는 일본 엥카(演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신나게 불렀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우리 집에 왜 왔니’‘아침바람 찬바람에’‘짱껨뽕’ 등의 놀이와 노래가 모두 일본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해방 이후 우리의 학교 음악교육은 국악을 철저히 외면했다. 제1차 교육과정(1946~54)부터 제5차 교육과정(87~92)까지 긴 기간 동안 국악의 비중은 고작 5~6%를 넘어서지 못했다. 제6차 교육과정(92~97)에서 약 30%, 제7차 교육과정(1997~2007)부터 비로소 40%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국악인들이 투쟁하다시피 해서 얻어낸 결과다. 음악교육에서 서양음악의 주도적 점유는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음악가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에 조선시대 신분이 낮았던 전통 음악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신분차별 의식도 한몫했다. 그 다음 세대에서는 이탈리아나 미국 유학 러시로 서양음악은 우대되고 국악은 천대받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서양음악 전공자들은 국악 같은 걸 왜 하느냐고 비아냥댄다. 자기 나라 음악인 국악의 진면목을 모르면서도 당당하다. 이러한 인식은 음악교육과정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음악과 교육과정과 음악 교과서의 작업에는 대부분 서양음악전공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고 교대나 사대 역시 서양음악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짜고 있다. 이들은 뒤늦게 음악교육에 끼어든 국악에 절대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교과서의 국악 비중은 높아졌지만 이를 교육할 인적 자원 확보와 시스템 구축은 여전히 요원하다. 우선 국악 전공 교수가 턱없이 부족한 교대와 사대에서의 국악교육은 형식에 그치고 있다. 결과적으로 초·중등학교에서 국악을 빼놓고 가르치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모르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현장의 음악교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5차 교육과정 이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인 것이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들의 고유 음악교육에 힘쓰는 나라들도 많다. 베트남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음악을 중심으로 음악교육을 한다고 한다. 그들은 ‘자기 말(음악)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말부터 배울 수 있는가’라고 이야기한다. 국악은 한국인의 얼이 깃든 소리다. 한국인 고유의 정서를 담는 도구이자 음악언어다. 국악은 세계가 인정하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음악언어를 가지고 세계적인 문화콘텐츠로 만들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 될 것이다.
    Sunday Joins Vol 387 ☜        김혜정 경인교육대 음악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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